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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4화 한 달간의 휴식(休息)(2)


시박이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혼백을 다시 육체에 집어넣는 일이란 상당량의 기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셋에 맞춰 호흡을 들이마셔라.”
시박의 양손에 백색의 기운이 어렸다.
저승차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선계의 빛이었다.
혼백을 거둬들이는 저승차사의 특성상 실수를 했을 시를 대비해 되살림을 위한 한 번의 힘이기도 했는데, 시박은 무식하게도 총 세 번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필시 일반 저승차사와 달리 시박이 얻은 특별한 깨달음과 연관이 된 것이다.
“발레포르인가 하는 애송이가 오면 곱절로 받아 내야지.”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찾아올 발레포르를 생각하니 어딘지 모르게 흐뭇한 생각이 드는 시박이었다.
위이잉.
양손을 뒤덮은 빛이 점차 압축되며 커다란 손바닥 형상이 되었다. 아미가 불안한 눈길로 시박을 바라봤다. 시박은 긴장감을 풀어 주려는 듯 말했다.
“이거 상당히 아프다.”
“언니야, 이럴 때는 반대로 말해야…… 꺄악!”
시박이 양손을 겹치며 아미의 명치를 그대로 눌렀다.
선계의 백색 빛이 아미의 혼백을 감싸며 종이에 물을 먹이듯 육신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혼백과 육신의 결합. 포말이 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으. 확실히 인간이 돼서 그런가?”
아미가 육신에 완전히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빠 왔다.
아미는 이미 되살림의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상태, 여기서 멈췄다가는 정말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
심박수가 빨라지고 괄약근이 한 번 더 꿈틀거렸다.
완전한 교합이 되기 일보 직전.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짭조름한 묵직한 빛이 집 안을 덮쳤다.
“크악!”
시박은 비명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

시박은 꼬박 열흘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되살림의 후유증인지, 인간이 돼서인지는 몰랐지만 숨소리는 고른 게 드래곤이 다음 생을 위해 수면기를 겪는 것처럼 피곤해 보였다.
“시박 언니야, 어서 일어나라. 응?”
아미가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시박의 얼굴을 닦았다.
곁에는 시박이 풀어 줬던 정령들이 함께 했다.
운디네들이 시박의 두루마기 틈새를 파고들어 몸을 씻겼다.
모닥불 주위를 맴돌며 몸을 데워 겨울철 석탄처럼 시박을 따스하게 해 주기도 했다.
노움은…… 손을 턱에 괴고 꾸벅꾸벅 졸았다.
아미가 배고픈 듯 배에 손을 가져갔다. 생각해 보니 오늘 하루 종일 시박이를 간호하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아, 맞다. 감자!”
아침에 모닥불을 피우며 장작더미에 던져 놨던 감자가 생각났다.
“물탱이들아, 나 밥 먹고 올게!”
운디네들이 까르륵 웃었다. 혼백이었을 당시 정령과 대화를 나눠서 그런지 환생 후에도 아미는 운디네들과 말을 나눌 수가 있었다.
“홀홀!”
소란스러움에 노움이 잠에서 깼다.
운디네들의 웃음소리가 거슬린 듯 짝다리를 짚더니 이내 팔자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운디네들이 그런 노움을 불안하게 바라봤다.
노움이 음흉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필시 몇 백 년간 이어 온 총각 딱지를 떼려는 심산이었다.
그때였다.
“으음…… 나는 시빡이 아니야.”
시박이가 잠꼬대하듯 헛소리를 내뱉었다.
노움과 운디네들이 놀라며 시박의 얼굴 주위로 모여들었다. 시박이는 알아듣기 힘든 말을 몇 번 더 중얼거렸다.
“덕춘이, 저리 안 비켜. 소연이가 목욕 재개하는 게…… 흐으, 안 보이잖아.”
순간 콩알 같던 의식이 야릇한 감정에 번개 치듯 깨어났다.
‘……내가 왜 누워 있는 거지?’
시박은 잠이 덜 깼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여기가 어디야. 대체…… 방금 덕춘이랑 공동파 소연이 훔쳐보고 있었는…… 아! 내가 지금까지 꿈을 꿨던 거였구나! 청룡을 잡으러 간 것도 차원에 휘말려 괴상한 것들을 만난 것도 모두가 꿈이었어!’
시박은 가엽게도 자신이 염라대왕의 명을 받기 전 숙면을 취한 때로 착각을 했다.
시박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뭐야. 이 씹다 뱉은 개떡스러운 얼굴은.”
노움의 얼굴을 본 시박의 첫마디였다.
노움은 웃음소리를 높이며 손수건을 흔들었다.
이때껏 자신이 간호했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었다.
운디네들이 뻔뻔한 노움의 행동에 화가 난 듯 머리 위로 수증기를 뿜었다.
“염병. 역시 그게 꿈일 리가 없지.”
시박은 한숨을 푸욱 쉬었다.

약간의 소란이 지나고 난 뒤 시박은 아미에게서부터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열흘간 정신을 잃은 것부터 잡귀로만 생각했던 노움과 운디네들이 정령이란 해괴한 존재라는 사실.
가장 의문스러웠던 것은 역시 발레포르였다.
“그 얼간이가 나타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응. 근데 그 얼간이는 이제 코빼기도 안 보여!”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아미는 앙증맞은 두 손바닥을 모두 펼쳐 보였다. 시박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세 번을 넘어서 열 번은 이상했다.
“혹시 이런 걸 들고 있지 않디?”
시박은 백지로 변해 버린 명부를 보여 줬다.
“피이. 얼간이가 왜 책을 갖고 다니냐?”
맞는 말이었다. 시박은 생각지도 못한 아미의 항의에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당돌한 꼬맹이가 아니었다.
“맞아. 얼간이가 책을 갖고 다니면 얼간이가 아니지. 큭큭.”
시박은 바구니에 놓인 감자 하나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미도 싱글벙글 웃으며 감자를 집어 껍질을 조심스레 벗겼다.
“사실 처음에 얼간이가 왔을 때는 막 기뻤어.”
“취향도 이상한 꼬맹일세. 저승차사 보고 기뻐하다니.”
시박이 감자를 큼지막하게 베어 물었다.
맛있게 익힌다고 애썼는지 여기저기 탄 곳이 많았다.
“깜깜한 밤에 누가 날 찾아온 건 처음이었거든. 얼굴도 모르는 아빠인 줄 알았어. ‘아빠?’ 하니까 얼간이가 괴상한 표정을 짓더라.”
시박은 감자를 우적우적 씹었다.
“아직 덜 여물었군. 앞으로 하루에 세 번 이거를 먹도록 해라.”
아미는 우스꽝스런 얼굴로 발레포르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운디네 하나가 껍질만 벗겨 놓은 아미의 감자 위에 앉았다.
“사과같이 생긴 거였는데 진짜 맛있었어. 오늘은 얼간이가 오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구.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먹었다고 칭찬도 들었어.”
운디네가 고개 숙인 아미의 얼굴로 날아올랐다.
투명한 운디네의 몸에 돌이라도 던진 것처럼 잔잔한 파문(波紋)이 일었다.
“손가락을 모두 접었을 때는 사과도 다 먹었을 때였어. 칭찬 들으려 기다렸는데…… 흐끅, 함정이었어. 흐끅, 퍼엉 했어.”
시박은 슬며시 감자를 바구니에 놓았다.
숲 속에서 처음 아미를 봤을 때 배고프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과라고 했던 것은 사과가 아니었다. 외로움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흠. 이게 잡귀가 아니란 말이지.”
시박은 괜스레 운디네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몸이 붉어지는 게 웃음을 참는 듯했다. 노움을 제외하면 정령이란 게 사람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배고프냐?”
“흐끅. 감자나 먹어, 멍충아.”
“……당분간은 배고픈 걱정 없게 만들어 주마. 망할 놈의 꼬마야.”
아미가 눈물이 그렁그렁해 고개를 들었다.
사나운 새벽에 상처 받은 기분이다. 또르르 떨어지는 눈물에 싸구려 동정은 들지 않았다. 아미의 발갛게 상기된 젖살은 살짝 올라간 눈꼬리처럼 앙큼했다.
갈대처럼 풀어헤친 밤색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고 싶다. 언니라고 부르는 순수함이 왈미라는 애칭처럼 정겹게 엉켜들었다.
살아 있음에 있어 이어진 첫 인연이었다.
“언니야가 뭔데 배고프지 않게…….”
“난 남자다.”
“내가 꼬마라고 거짓말해도 안 속아!”
“남자라고. 엉덩이에 고뿔 난 꼬마야.”
“나 눈썰미 하나로 먹고 살아왔는데…….”
“보여 줄까?”
시박은 망설임 없이 바지춤을 내리려 했다.
아미의 얼굴에 이제껏 볼 수 없는 불안감이 떠올랐다. 생각하면 외모 말고는 행색이 전부 남자였다.
‘말괄량이 언니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며칠 전 흙냄새 나는 노움을 강제로 씻기려다 보았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오, 오빠! 시박이 오빠!”
“그래, 그래. 훨씬 듣기 좋구나.”
시박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니 오빠라고 불려 본 지도 언제인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아미는 심술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오빠가 여장남자라도 이제 아무도 안 믿을…….”
“갈 데가 없다.”
“응?”
“생각하니 잘 곳도 없다.”
“오빠, 거지였어?”
거지란 말에 시박은 마지막으로 잡어 넣었던 개방 방주 고(故) 취걸개가 생각났다. 아미는 여전히 거지였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딴에는 남이 들으면 기특할 소리를 했다.
“거지라면 같이 살 수도 있어.”
시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누가 거지야! 내가? 이 평생 북해 벌판에서 삽질이나 할 꼬마 같으니라구!”
시박의 격한 반응에 아미가 당황했다.
오고 갈 데가 없는 사람의 직업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거지밖에 없었다.
“그러면 이유가 없잖아!”
시박은 바구니에 넣었던 감자를 다시 입에 넣었다.
한낱 감자일 뿐인데 혓바닥을 파괴하는 맛이다.
“나도 배고픈 건 싫거든.”

시박이 아미와 같이 살게 된 지 이틀이 지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간 시박의 생활은 저승[黃泉]에 있었을 적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갓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뒤늦게 세상과 적응을 시도했다.
우선 이 땅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크 종족에 관한 것이었는데 잡귀라 치부했던 정령이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됐다. 덕분에 취익거리는 오크를 돼지로 착각해 잡아먹으려던 어제의 실수를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됐다.
“감자 줄까?”
필시 이렇게 되기까지는 아미가 괴상하게 구워 오는 감자도 한몫을 했다.
종족에 대한 설명은 운디네보다 노움이 도움이 됐는데 땅의 정령이란 특성 때문이었다.
노움은 기특하게도 이걸 기회 삼아 시박과 자신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로 승화시키려다 복날 개 패듯 먼지 나게 얻어맞기도 했다.
두 번째는 하루에 세 번 주린 배를 채울 궁리였다.
저승차사도 이제는 먹고 살아야 했다.
어느 정도의 노잣돈도 필요했고 청룡에 대한 정보도 틈틈이 알아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한 달간의 휴식도 명(命) 받았으니까.’
시박은 가부좌를 풀고 눈을 떴다.
언제 왔는지 아미가 시박을 흉내 낸답시고 양반 다리를 한 채 꾸벅 졸고 있었다.
심부름시켰던 냄비, 찜통, 멥쌀가루, 벌꿀, 소금 등 따위를 한 아름 안은 채 말이다.
숲 속에서 정령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저 몸으로 어떻게 사냥을 했는지 멧돼지와 사슴을 들고 낑낑거렸다.
앞서 아미가 사 온 물건들도 정령이 잡아 온 사냥감을 팔아 구해 온 것이었다.
“앗. 물탱이들이다!”
아미가 잠에서 깨 정령들을 맞이했다.
운디네들도 그에 반응하듯 들고 있던 사슴을 노움에게 던져 버렸다. 단말마의 비명. 자연스레 수다가 이어졌다.
만약 정령사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땅을 치고 통탄했을 것이다. 정령과 평생 말 한 마디 섞는 것도 어려운데 꼬맹이가 보란 듯이 수다를 떨다니.
“빨리 오지 못해?!”
시박의 불호령에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