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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3화 낭만사신 환생하다(2)


어린 여아의 혼백을 붙잡은 저승차사는 귀를 막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싫은지 짜증 어린 표정이 얼굴에 한가득했다.
“조용히 안 해?! 확 소멸시켜 버릴까 보다!”
“흐끅…… 배, 배고파. 무서워…… 으앙!”
혼백은 열 살가량의 여아였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황당한 꼬맹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혼백이 되어 버린 주제에 살려 달라는 말 대신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다니.
‘꼬맹이가 참 특이할세. 생김새도 중원인이 아니라 서역인의 모습 같고. 잠깐 쟤는 모양새가 또 왜 저래?’
혼백이 생김새가 이상했다면 동업자라 생각한 자는 모양새가 문제가 있었다.
‘허어.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시박의 눈썹이 저절로 팔(八)자가 됐다.
자세히 보니 사천 땅 저승차사로 보이는 자는 차사 특유의 복장과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 시박의 이마에 철사 줄기 같은 힘줄이 돋아났다.
‘대체 머리에 돋아난 뿔은 어디 지역 풍습이야. 경망스럽게 보이는 저 꼬랑지는 또 뭐고. 어쭈, 가장 가관은 박쥐처럼 달고 있는 날개인데, 꼭 미친년 치맛자락마냥 펄럭이고 있잖아.’
결정적으로 갓도 쓰고 있지 않았다.
시박은 생각했다. 반동분자가 아니면 멋모르고 깝죽대는 신출내기라고.
시박이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녀석의 뒤로 다가갔다.
‘십중팔구 사천 땅을 관리하는 저승차사렸다.’
시박의 손이 그대로 신출내기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빠악!
“으헉!”
빠악!
“커헉!”
빠악!
“누, 누구냐! 천계의 기습이냐!”
두개골이 부서지는 충격을 받은 사천 땅 저승차사, 아니 악마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순간, 시박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시박의 창백한 얼굴을 본 악마.
악마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마주한 김시박.
“까꿍.”
“으악!”
악마는 체통머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그럴 만도 한 게 악마 역시 살아생전 저승차사란 존재를 언제 본 적이나 있겠는가. 더군다나 뒤통수를 때리면서 나타났는데 말이다.
시박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이런 신출내기도 자신을 알고 있다 생각한 것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
시박은 슬쩍 허공에 딱밤 때리는 시늉을 했다.
시박의 딱밤은 저승 전역에 모르는 영혼이 없을 정도였다.
“풍기는 분위기가 천사 따위는 아니고, 네놈이 이 몸을 공격한 것이냐?”
시박이 끔찍스런 잇소리를 냈다.
도저히 봐주려 해도 봐줄 수가 없던 것이다.
“……박이다.”
“뭐라고?”
“……김시박.”
“씨빡?”
시박의 손이 자연스레 월영검으로 향했다.
갑작스런 발검 동작에 악마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웃기는 인간이로구나. 감히 악마에게 검을 겨누려 하다니.”
“웃기는 인간?”
시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신출내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뜬금없이 자신에게 인간이라고 하다니. 시박은 악마를 유심히 바라봤다.
복장으로 보아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놈이 분명했다.
“내 오늘 네놈에게 친히 싸가지를 가르쳐 주겠다. 영광인 줄 알거라, 이놈아.”
“바이온 왕국에는 미친놈이 많다더니만, 쯧.”
“하아…….”
시박은 머리가 아파 오는 게 느껴졌다.
바이온 왕국은 또 뭐란 말인가. 더 기가 막힌 것은 자신의 머릿속에도 없는 단어를 들이밀었다는 것이다. 저승 생활을 한 지 1000년이 넘은 시박이다.
자신이 모르는 단어는 미친 소리이거나 염라대왕이 가끔 술에 취해 혓바닥 꼬여 내뱉는 말뿐이었다.
“쯔쯧. 불쌍한 놈이구나. 정신이 나간 저승차사라니. 윗대가리들이 너를 괴롭혔느냐? 아니면 아랫것들이 속을 썩이느냐. 내 휘하에도 이 도령이라는 얼라가 하나 있는…….”
악마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상대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박만이 아니었다.
“내 손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거라!”
악마, 발레포르가 자신의 특기인 죽음의 무도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다크 나이트의 음성처럼 기괴한 소리가 시박의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큭큭. 인간 놈들은 죄다 열을 넘기지 못하고 죽더군.”
발레포르는 득의만만하게 말했다.
죽은 자도 영향을 받는지 그가 데리고 있는 혼백이 귀를 막으며 애처롭게 비명을 질렀다.
반면 시박은…… 난생처음 듣는 마계의 노래에 감탄했다. 어찌 이런 음성이 있단 말인가. 한 사람이 하나 그 이상의 목소리를 가진 것 같은 기교, 구슬픈 음색.
천편일률적인 지옥의 곡소리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훌, 훌륭해. 어떻게 이런 노래가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박수까지 치며 진심으로 좋아하는 시박이었다.
그런 시박의 모습에 발레포르가 적잖게 당황했다.
머릿속에서 죽음의 무도곡이 끝이 났는지 시박이 신나 하며 말했다.
“답례로 여기 있는 색귀가 갈 남옥의 소리를 들려주겠다.”
시박은 목청을 가다듬고 남옥의 고통 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참으로 듣긴 민망한…… 사내들의 애달픈 심정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그 황당함에 괴로워하던 여아의 혼백이 웃어버렸다.
“이익! 이런 변태 같은 놈을 봤나!”
발레포르가 얼굴이 벌게져 소리쳤다.
시박이 신음 소리를 멈추고 눈을 부라렸다.
“뭐, 변태? 이런 염라대왕 똥구멍 같은 놈을 봤나!”
시박은 다짜고짜 발레포르의 머리채, 정확히는 구레나룻을 쥐어 잡았다. 생전 처음 당해 보는 강렬한 고통.
시박은 구레나룻을 잡은 채 한참을 위로 당겼다 잡초 뽑듯 뽑아 버렸다.
발레포르가 아픔을 못 이기고 그대로 무릎 꿇었다.
“흥. 이제야 말하기 좀 편하군. 어쭈, 안구에 힘 안 풀어?”
시박은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발레포르의 눈동자에 친절히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연이은 충격에 발레포르가 땅바닥을 뒹굴었다.
“크윽. 어, 어찌 인간 따위한테 이런 굴욕을…….”
“그놈 참 아직도 헛소리를 해 대네.”
시박은 몸을 추스르지 못한 발레포르에게 다가갔다.
발레포르는 일어설 생각도 못한 채 시박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뭔가 평범한 대륙의 인간과는 생김새가 달랐다.
검은 머리털에 검은 눈동자, 겹이 없는 눈꺼풀. 얼굴의 선은 곱상한 게 여자처럼 호리호리하기까지 하니 남자보다 미인(美人)의 인상을 주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이 괴짜는?’
그렇다고 풍기는 분위기는 여자라 할 수 없이 거칠었다.
더군다나 눈 밑의 거무스름한 그늘은 또 뭔가.
‘혹, 혹시 드래곤?’
발레포르의 항문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일개 심부름꾼인 자신이 어찌해 볼 상대가 아닌 것이다. 하물며 시박을 성질 더러운 블랙 드래곤이라 생각하니 절로 낯빛이 노래졌다.
“우선 박아라.”
“대, 대가리요?”
시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포르의 얼굴에 순간 갈등이 일었다. 악마의 자존심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목숨을 버릴 것이냐. 생각은 길지 않았다.
퍽.
나무 심는 소리가 들렸다.
시박은 뒷짐을 지며 발레포르의 주위를 왔다 갔다 했다.
“내 이름은 김시박이다. 씨빡이 아니고.”
“죄, 죄송합니다! 시빡, 아니 시바…… 우웩!”
발레포르는 몇 차례 발길질을 당한 후 겨우 시박이란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우선 한 가지 묻겠다. 대답 여하에 따라 네놈의 대우가 달라질 거다. 혹 몇 대 맞았다고 거짓을 고하면 꽤나 재미없을 줄 알아라.”
“알, 알겠습니다!”
발레포르의 군기 잡힌 대답에 시박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지역 관리가 허술하다지만 알고 보면 같은 동업자 아닌가.
원하는 대답만 나오면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혹 청룡을 보았더냐?”
“청, 청룡이요?”
“그렇다.”
발레포르는 재빨리 청룡이란 단어를 머릿속에서 찾아봤다.
청룡, 청룡. 존재하지 않았다. 발레포르는 악마라 하기에는 아직 부끄러운 지능이었다. 또 중원이 아니고서야 청룡이란 단어를 알 리 없었다.
시박과 발레포르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발레포르는 은근슬쩍 머리를 들며 순진무구하게 물었다.
“저어…….”
“그래, 빨리 말하거라.”
“청룡이 무엇입니까?”
시박은 멍하니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피식 웃어 버렸다.
이놈이 뭔가 믿는 배경이 있다 생각한 것이다. 저승차사가 청룡을 모르다니, 지나가던 개가 여의주 물고 승천할 일이다.
“청룡 말이더냐?”
“예.”
“퍼런 용대가리를 말하는 것이다.”
“퍼런 용대가리라면…… 설, 설마 블루 드래곤?!”
발레포르의 머릿속에서 발칙한 상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우선은 욕설이었다. 젠장, 빌어먹을, 이런 염병할 일이 있다니. 설마 이놈이 정말 드래곤일 줄이야.
난데없이 블루 드래곤을 찾는 것을 보면 드래곤끼리의 싸움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힘에서 밀린 블루 드래곤이 줄행랑을 쳤고 이놈은 그 뒤를 쫓다 재수 없게 나와 맞닥뜨린 것이구나. 생각을 마친 발레포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못…… 봤는데요.”
“그렇군, 못 봤다라. 근데 왜 목소리를 떨어? 아무튼 청룡이 이 주위에 떨어지진 않았다는 말이지.”
시박은 자신이 내뱉은 말과 달리 발레포르를 신뢰하지 않았다. 녀석의 대답이 자신이 없는 게 몇 대 맞았다고 거짓말한다 생각한 것이다.
‘짜식이 몇 대 맞았다고 치사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네놈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다 생각이 있다.’
오해의 갈등은 그렇게 깊어져 갔다.
시박은 대뜸 발레포르 앞에 금동아줄을 던졌다.
그러고는 죄인을 심문하는 사또처럼 한껏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죄, 죄요?”
“이놈이 그래도!”
“으힉!”
하늘로 올라갔던 시박의 손이 멈췄다.
그러고는 끙끙거리는 노움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지역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이런 잡귀가 돌아다니는 거냐? 이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이야!”
“잡, 잡귀?”
발레포르는 금동아줄에 묶여 있는 정령들을 바라봤다.
물의 하급 정령 운디네와 땅의 하급 정령 노움이었다.
“정령이 중간계에 있는 건 당연한 게…… 으헉!”
기어코 뒤통수를 한 번 더 맞은 발레포르였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놈이군. 네놈의 소속을 말해라.”
“소, 소속은 위대하신 마왕 위리놈 님의 10대 군단장인 하우레스 님의 집사 살롬 님의 직속 심부름꾼입니다!”
시박의 얼굴이 기괴하게 변했다.
“뭐? 위리놈? 하우레스? 이거 완전 반동분자 아냐?”
시박은 슬그머니 머리를 드는 발레포르에게 딱밤을 먹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불현듯 그가 데리고 있는 혼백이 신경 쓰였다. 아까부터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머리에 피 마른 어린 혼백.
“혼백은 명부에 적힌 날 데려가는 게 맞겠지? 아무래도 이놈 이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게 영 불안한데?”
발레포르가 데리고 있는 혼백이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시박은 행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혼백에게 이름을 물었다.
“꼬마. 네 이름이 뭐냐?”
혼백은 시박의 물음에 멀뚱히 눈을 맞췄다.
당돌한 인상을 주는 여자아이였다. 저승차사인 시박을 앞에 두고도 전혀 두려운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얼굴 가득 웃음을 짓고 말했다.
“왈미! 사람들이 나한테 왈미, 왈미라고 불렀어! 원래 이름은 아미인데 워낙 천방지축이라고 왈미라고 그래!”
시박은 한숨을 푸욱 쉬었다.
이름이 왈미라는 것인가 아미라는 것인가. 애초에 나이 어린 혼백은 주로 이 도령 담당이었다. 유독 아이들과는 상성이 맞지 않는 시박이었다.
“왈미냐, 아미냐?”
“아미! 왈미라고 불러도 돼!”
시박은 품속에서 명부를 꺼내 들었다.
아미는 널브러져 있는 발레포르를 피해 시박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시박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가며 명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시박이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눈에 노안이 들었나? 뭔 놈의 글자가 보이질 않냐.”
시박은 얼굴을 명부에 바짝 가져 댔다.
흐릿했다. 빼곡하게 적혀 있는 글자들은 색 바랜 비단 무늬처럼 알아보기 힘들었다. 만 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명부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순간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서풍이 불어왔다.
두루마기가 펄럭이고 명부에 적힌 빛바랜 이름들이 흩날렸다. 달빛에 몸을 얹어 막 지기 시작하는 매화처럼, 바람에 너울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명부는 만물상에서 막 내놓은 화선지마냥 티끌 하나 먹이 묻어 있지 않았다.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은 상황에 아미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시박 역시 땅에 떨어져 흔적도 없어진 글씨를 보고 말했다.
“염, 염병. 이건 또 왜 이래!”
청룡과의 싸움 이후 이상한 일만 일어났다.
달이 두 개인 것도, 저승길이 열리지 않은 것도. 이제는 명부까지 발정 난 개새끼마냥 말썽이다.
불현듯 염라대왕의 당부가 생각났다.
“명부가 발정 났다. 저승길이 열리지 않는다…….”
평소와 다른 현실에 시박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주문 외우듯 몇 차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