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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차사 김시박(金嘶搏)


1화
서장


병풍 뒤에서 향냄새 한 번 맡아 볼텨?



1화 저승사자 김시박(1)


달빛이 휘황찬란한 자정(子正)이었다.
야밤에 짖어 대던 황구가 모가지를 처박고 새끼를 품었다.
밤마다 찾아오는 살쾡이 때문이 아니었다. 찢겨진 먹구름 사이로 느껴지는 음산한 적막감에 질려 버린 것이다.
초가집 지붕 위에는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소매가 긴 색동저고리를 입은 댕기 머리 소년.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한 채 청룡언월도를 든 신장.
그리고…….
“염병할 염라대왕 같으니라고.”
남색 바지에 묵빛 두루마기를 걸친 저승차사.
저승차사 김시박은 뒤에 짊어진 상여의 용두머리를 이 도령에게 넘겼다. 그리고 냅다 딱밤을 한 대 쥐어박았다.
“이놈아. 처음부터 개방 방주 취걸개를 잡아 왔으면 나까지 오는 일이 없었을 것 아니냐!”
이 도령은 정수리를 감싸며 아픔에 몸을 떨었다.
사람은 죽기 전에 세 번 저승사자를 만나는데, 첫 번째가 바로 강림차사 이 도령이었다.
그는 마음이 여린 게 흠이었다.
사람의 혓바닥과 눈물에 신명 나게 놀아나니 열에 다섯은 저승으로 데려가지 못했다.
하물며 이번 상대는 강림차사들에게 악명 높기로 소문난 거지였다.
그것도 상거지인 왕초 취걸개다.
상성으로만 따지자면 완전히 최악이었다.
시박은 이승차사 이덕춘을 바라봤다.
이 도령이 데려오지 못하면 나서는 게 그였다. 신장(神將)의 형상답게 끊고 맺음이 확실해 대부분 여기서 속세를 마감하고는 했는데…….
“설마 덕춘이 네놈까지 날 귀찮게 만들 줄이야.”
이승차사 이덕춘은 무안한지 애꿎은 보름달만 쳐다봤다.
“저승차사가 이렇게 바빠야 돼? 꼭 내가 말단 같잖아. 엉?”
시박은 한 식경 전 저승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무려 백 일 만의 수면이었다. 낙양(洛陽)에 전염병이 퍼져 갑작스레 발령을 받아 육천에 달하는 영혼을 인도한 후였다.
말이 육천이지 워낙 허망하게 죽어 일일이 찾기도 힘들었다. 이제 방 안에 향을 피워 놨고 막 잠들려 하는데 동자귀(童子鬼) 하나가 불쑥 임무를 가져온 것이다.

저승차사 김시박은 당장 개방 방주 취걸개를 잡아 와라.

시박의 잠은 달아났고 인내심은 실 가닥처럼 끊어졌다. 갓도 내팽개친 채 곧장 염라대왕이 있는 궁궐로 쳐들어갔다.
남몰래 술잔을 기울이며 은밀한 취미를 진행 중이던 염라대왕은 기겁했다. 시박 역시 극락주(極樂酒)를 보고는 눈깔이 뒤집혔다.
그러고는 염라대왕에게 대뜸 머리부터 들이댔다.
‘이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염라대왕이 당황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시박은 실수를 가장한 집기 파손이나 바닥에 드러눕는 것 같은 난동은 부리지 않았다.
그저 저승사자 특유의 섬뜩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대왕님 인사가 참으로 늦었습니다.”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지고 그러는가.”
염라대왕의 말에 시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시 폭풍이 오기 전 고요함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지요?”
“그렇네만…….”
“혈색이 아주 좋으십니다? 하마터면 사람인 줄 알고 덮칠 뻔했어요. 숙면을 잘 취하신 건지 아니면 좋은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본인은 잠 한숨 못 잤습니다만.”
시박의 말투에 염라대왕은 황당했다.
이놈이 또 왜 이렇게 나온단 말인가. 염라대왕은 식은땀을 흘렸다. 가뜩이나 낙양에서 돌림병이 돈 이후 저승에서는 한차례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염라대왕은 시박을 바라봤다.
버릇은 없지만 일처리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하는 놈이었다. 이놈이 깽판을 부리는 건 다 노림수가 있는 것이다. 벌을 받아 쉬고 싶은 것이다.
“푸하하하!”
염라대왕은 호탕하게 웃었다.
“시박아.”
“…….”
“내가 아끼는 씨박아.”
“……어째 발음이 강하십니다?”
“어허. 시박아, 말을 그리하면 어이할꼬. 누가 들으면 욕하는 줄 아느니라.”
시박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왕마마, 어찌 거지 하나 때문에 소인을 오라 가라 하십니까. 그런 건 강림차사나 이승차사를 시키면…….”
“시켰느니라.”
시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켰는데도 자신을 부른 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설마 거지가 혈교에 몸담은 자처럼 강력한 술법을 썼다는 것인가.
“네 밑에 있는 강림차사 이 도령은 취걸개가 닭똥 같은 눈물로 애원하니 데려오질 못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놈이니까요. 하지만 이승차사가 있지 않습니까?”
“소용이 없는지고.”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취걸개가 내민 속곳에 무너져 버렸도다.”
“속곳! 흠, 흠. 대체 누구의 것이기에?”
염라대왕이 분하다는 듯 말했다.
“강호삼미(江湖三美) 중 하나인 제갈미아의 것이다.”
“제갈미아!”
시박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시박은 이덕춘을 바라봤다. 정말이지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믿었던 이덕춘이었는데, 그마저 제갈미아의 속곳에 넘어갔다 했다. 울화가 터져 당장에 내놓으라 했지만 그의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대왕님이 빼앗아…… 아니, 가져갔소.”
“그러면 그렇지. 이놈의 영감탱이!”
시박은 능글맞은 염라대왕의 얼굴을 떠올렸다.
“난 왜 이리 대왕이 마음에 안 들까.”
시박은 그 말을 끝으로 둥실 떠올랐다.
허공답보가 아닌 순수한 공중 부양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도 시박을 따라 취걸개가 있는 사천성으로 향했다.

***

“저놈인가.”
저승차사 김시박은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취걸개를 바라봤다. 그는 배가 고팠던지 모닥불에 황구 한 마리를 심도 있게 굽고 있었다.
시박은 명부를 꺼내 들었다.
“묘시에 태어난 자로 올해 나이 세 살. 이름은 누렁이, 별호로는 똥개……. 흠흠, 이건 황구의 명부였군.”
황구의 영혼이 꼬리를 흔들며 시박을 반겼다.
이 도령이 황급히 황구를 안아 올렸다.
“이름 취걸개. 무공 수위는 삼 갑자에 미치지 못하는 놈이군. 현 개방 방주로서 예순아홉에 황구를 구워 먹다 급체해 죽을 운명이라.”
시박은 황구 뒷다리를 뜯는 취걸개를 보고 혀를 찼다.
이제껏 수많은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했건만 취걸개처럼 누렁이의 원한이 깊은 자는 처음이었다.
그에게 달라붙은 견공의 혼만 해도 언뜻 이천이다.
하나하나가 원한귀(怨恨鬼)인 걸로 보아 육질을 부드럽게 한다 치고 신명 나게 패 대었을 게 분명했다.
“어서 데려가기나 해야겠군.”
시박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모닥불을 향해 손바닥을 휘둘렀다. 주위를 밝히던 불길이 거짓말처럼 꺼졌다.
“으잉? 이게 갑자기 왜 꺼졌누.”
취걸개는 황구의 육질이 식을까 황급히 부싯돌을 꺼냈다.
시박이 입을 열었다.
“걸개야.”
탁, 탁.
시박의 부름은 부싯돌 부딪치는 소리에 사뿐히 묻혔다. 전례가 있던지라 이 도령이 취걸개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도령을 본 취걸개가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뻔뻔하게 말했다.
“어허, 어르신 식사 중이시다.”
이 도령이 당황하며 슬쩍 시박을 쳐다봤다.
시박은 표정 없이 가만히 일관했다. 이 도령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취걸개에게 말리면 자신은 맞아 죽는다.
그가 누군가. 염라대왕마저 기피하기 바쁜 놈 아니던가.
이 도령이 다시 취걸개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고얀지고! 자고로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 법!”
그 말에 이 도령의 품에 안겨 있던 황구가 발끈해 취걸개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졌다.
“목이 뻐근하구나. 가만있지 말고 어깨나 주물러 보거라.”
이 도령이 딱했던지 이승차사 이덕춘이 나섰다.
그는 청룡언월도로 취걸개가 들고 있던 황구의 뒷다리를 반토막 내버렸다. 일전의 실수를 만회라도 하려는지 제법 신장다운 등장이었다.
“고, 고기가! 으음, 이승차사 덕춘 공도 오셨소.”
청룡언월도가 취걸개의 목덜미로 향했다.
몸을 일으키라는 눈치였다. 취걸개는 후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분명 강호삼미 중 하나인 제갈미아의 속곳을 주었을 터, 일 년 후에나 온다고 하지 않았소?”
시박의 이마에 힘줄이 하나 돋았다.
감히 이승차사 주제에 권력을 남용하다니. 속곳에 이어 연이은 배신에 실망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걸개야.”
마치 자기 집 똥개 부르듯 애정 어린 목소리였다.
취걸개는 뒤를 돌아봤다. 감히 누가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으헉!”
이것이 정녕 저승사자던가. 그는 하마터면 입속에 있던 고기를 토해 낼 뻔했다. 앞서 왔던 두 사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기백이다.
숨구멍이 오그라드는 저승의 기운에 취걸개의 불알은 몸속 깊숙이 줄행랑쳤다. 취걸개는 황급히 이덕춘을 바라봤다.
“약속하지 않았나! 일 년 후에 오기로!”
“……글쎄다.”
이덕춘은 시치미 떼듯 애꿎은 보름달만 봤다.
취걸개는 황당했다. 설마 저승사자란 것들이 거짓말을 하다니. 이제껏 듣도 보도 못했던 일이었다.
“으득! 애꿎은 속곳만 날렸구나! 하지만 후회는 없다. 이미 내가 애용할 만큼 실컷 애용했으니!”
시박은 순간 염라대왕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박이 취걸개에게 다가갔다. 걸음걸이가 사람과 달리 땅을 스쳐 미끄러지는 듯했다. 취걸개가 반항하려는 듯 토막 난 황구 뒷다리를 치켜 올렸다.
시박은 이 도령과 이덕춘을 뒤로 물렸다.
저승차사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했다.
그 모습에 취걸개는 순간 갈등했다. 저승사자를 상대로 싸울 것이냐, 아니면 앞서 덜떨어진 저것들처럼 회유를 할 것인가.
거지 생활 60년의 감은 후자로 가닥을 잡으라 했다.
취걸개가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아이고, 저승사자님. 저는 아직 죽을 수 없습니다!”
시박은 피식 웃었다. 저승차사 생활이 어언 500년이 넘었다.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시박은 다 이해한다는 듯 으레 상투적인 대답을 해 주었다.
“네놈은 어인 일로 이승에 미련이 남은 것이냐.”
취걸개는 눈물, 콧물 범벅을 해 가며 답했다.
“소인은 아직 대업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대업?”
“그렇습니다!”
시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 10년간 무림에 이렇다 할 문제는 없었다. 마교는 잠잠했고 정파와 사파 간의 분쟁은 소규모로 일어날 뿐 딱히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소인은 아직 서역의 황구를 먹지 못했사옵니다!”
시박의 머리가 아파 왔다. 이런 자가 정말 개방의 방주였던가.
살려 달라 비는 순간에도 뒷다리를 놓지 않고 있었다. 이 정도 집착은 필시 전생과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시박은 명부를 꺼내 취걸개의 전생을 살펴봤다.

개방 방주 취걸개(醉傑愾).
전생에 거지였다. 약관의 나이로 낙양에 상경하던 해.
광견병에 걸린 황구에 물려 첫눈이 내리던 날 객사했다.

과연…… 황구에 집착할 만했다. 오죽하면 물려도 광견병에 걸린 황구에게 물렸을까. 더욱 눈길을 끈 것은 전생에도 그가 거지였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