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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10장 부하 N, I(4)


조금 뒤, 이번에는 7층까지 똑똑히 들릴 정도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꺄악! 난 더 이상 못 해! 미칠 것 같단 말이야!”
“이, 이봐! 정 대리! 참게, 참아!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잖아!”
“으윽! 또 야근이라니! 어쩐지 던전제작과가 야근한다더니! 젠장! 세면 도구를 안 챙겼다!”
“여보세요? 아, 여보. 나 오늘 야근이야. 응, 한 사흘 정도……. 그래, 커피 좀 보내 줘.”
“전 오늘 사표 내겠어요! 더 이상은 못 참아요!”
“정 대리, 그만 해! 내일이 봉급날이란 말이야!”
봉급이라는 말과 동시에 소란이 언제 있었나는 듯이 조용해졌다.
“후훗! 봉급에 사로잡혀서 노예가 된 나의 귀여운 개들. 아니, 강아지들. 아니지, 사원들. 한 달 봉급 제일 적게 받는 일반 사원이 800만 원인데, 안 참고 배겨? 어라? 오 부장, 어디 갔나?”
부들부들.
무너진 서류와 책 더미에서 오 부장의 손 하나가 떨면서 튀어나왔다.
“에휴! 그깟 서류를 못 피하나?”
쑤욱!
사장이 한숨을 쉬면서 오 부장을 서류 더미에서 꺼내 주었다.
“헥헥. 죽는 줄 알았네.”
“마저 보고하게.”
“아, 예. 아무튼 그 던전 퀘스트가 끝난 후에 데네브는 세르피아 산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드래곤 슬레이어 길드에서 자행하던 엘프족 노예 사냥을 목격하고는 그들을 물리치고 엘프들을 구해 주었습니다.”
“음, 완전 판타지 영화 틱한 이야기인데? 그래서? 그것 때문에 그 유저가 엘프가 된 건가? 난 유저들이 이종족으로 만들어지거나, 이종족으로 게임 플레이하는 걸 하기로 한 적이 없는데?”
“예, 조사해 본 결과…… 그게…… 저…….”
“야근하고 싶나?”
카오스 사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잘리고 싶나?’가 아니라 ‘야근하고 싶나?’였다.
오 부장의 얼굴이 금세 창백해지더니 급구 부인하듯이 두 손을 흔들어 댔다.
“아뇨!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또 게임제작부의 퀘스트제작과에서 노총각이라는 이유로 재미있는 퀘스트를 멋대로 만들었는데, 처녀인 여자 엘프가 남자 유저에게 구해지면 그 유저를 사랑하게 돼서 그 유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도록……. 거기 그 유저처럼 있지도 않던 엘프가 되는 약이 생기도록 슈퍼컴퓨터에 설정……. 아앗! 사장님!”
“아, 게임제작부의 정 부장인가? 오늘따라 왜 이러냐? 퀘스트제작과도 같이 야근시켜.”
딸깍!
오 부장은 다시 파묻히고 싶지 않았는지, 얼른 사장의 뒤쪽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떠한 비명이나 절규 소리도 나지 않고 조용했다.
쨍그랑!
갑자기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벨레레레레레.
딸깍!
“그래, 무슨 일이지? 게임제작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사장님, 퀘스트제작과의 직원들이 한 명 빼고 전부 실신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창문 밖으로 또 뛰어내렸어요!
오 부장의 귀에도 수화기에서 들리는 동료 정 부장의 절규가 들려왔다.
“어차피 거기는 2층이잖아! 지하에 있는 다른 과 녀석들은 벽에다가 피날 때까지 머리 박기도 했는데, 뭐. 2층에서 뛰어내린다고 죽냐! 실신한 것들은 냉수 한 사발 부어! 그러면 일어날 테니까. 그 뛰어내린 사람, 박맹수라는 사원 맞지? 왜 또 그래? 박 사원이 한두 번 뛰어내린 것도 아니잖아! 박 사원이 이 회사에 들어와서 4개월 만에 몸무게가 60kg이 빠진 건 나랑 상관이 없다고! 누가 밥 먹지 말래? 맨 처음에 살이 빠진다고 좋아할 땐 언제고! 나도 나흘 동안 야근했다고! 사장인 나도 일하는데, 사원이라는 것들이……. 봉급을 줬으면 일해야 될 것 아닌가? 너희는 지금 귀족 노동자인 항공기 조종사들보다 봉급을 많이 받고 있다고!”
딸깍!
사장이 악을 쓴 후 다시 수화기를 내렸다. 사장은 피곤한지 눈에 손을 대고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에휴, 졸려.”
“저기…….”
“말하게.”
“박맹수 사원이 나와서 말하는 건데, 그의 모습을 보십시오. 맨 처음 사진은 회사에 입사하기 전 모습입니다.”
오 부장이 서류 산에서 한 개의 파일을 꺼내더니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그 사진 속의 인물은 매우 통통하고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며, 배가 임신한 여자처럼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하지만 사진 속의 표정은 복스럽고 만족한 듯 행복했다.
“그리고 이게 최근 박맹수 사원의 사진입니다.”
오 부장이 자신의 휴대폰에서 박 사원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팔뚝에 넘치던 지방들이 사라져 쇠꼬챙이처럼 가늘어졌고, 포동포동한 얼굴은 완전히 해골로 변해 눈이 쏙 들어가 버렸다. 이제는 기름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임신한 것 같던 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쏙 들어가서 등가죽과 만나는 것 같았다. 인간의 살과 가죽만 남은 것 같았다. 얼굴은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는 표정이었고, 눈빛은 희망을 잃고 이제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참고로 박 사원의 몸무게는 입사 전에는 135kg이었는데, 입사 후에는 몸무게가 45kg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오 부장, 이 자식!”
“예?”
“어디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태인을 찍어서 가지고 오래? 엉?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그리고 보고는 안 할 건가?”
“이 사진은 아우슈비츠가…….”
“방금 내가 본 것은 아우슈비츠의 유태인이었네.”
사장이 오 부장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야근하겠는가?’라는 눈빛을 보내면서.
“아, 실례했습니다. 이종족을 사냥하는 그 드래곤 슬레이어 길드는 어떻게 할까요? 가만히 둘 수는 없는데.”
오 부장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엘프 마을과 수인족의 마을을 발견했나? 드워프 마을은? 마녀의 마을은? 바닷속의 인어 마을은? 거인들의 마을은?”
“드워프 마을을 발견했습니다.”
“어차피 에르메키아 월드는 초현실감을 둔 게임이야. 시대가 계급제이니 노예가 있는 거 아냐? 냅 둬.”
“그렇다면 그 유저는…….”
“그냥 그도 냅 둬. 지가 알아서 잘 지내고 있는데, 우리가 뭐 할 일이 있나?”
“그리고…….”
“아, 또 뭐?”
사장이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오 부장은 무서워서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그게…… 그러니까 그 유저의 한 가지 문제점이라기보다는…… 또 뭐가 있는데…….”
“뭔가?”
“현재 시르벤 왕국의 왕자인 알비레오 왕자가 그에게 찾아와서는 그를 등용하려고 했습니다.”
“뭐? 그 유저 명성이 얼마인데? 명성이 한 오천 정도 되어야 왕국에서, 그것도 국왕이나 왕자가 직접 오는 건데 그 유저의 명성이 얼마이길래?”
“이제 막 육천을 넘었더군요.”
“하아…….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예, 나중에 영주나 감사원장으로 등용해 주겠다고 한 후 증표를 나누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오 부장이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그건…….”
“예, 던전에서 만들었나 본데, 신라의 금관을 만들었습니다. 현재 이 금관은 알비레오 왕자가 차후 왕으로 등극할 때, 왕관으로 채택되었습니다.”
“호오, 그의 솜씨가 좋은가 보군.”
사장이 면도를 하지 않은 덥수룩한 턱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장님! 어떻게 게임이 나온 지 겨우 몇 개월 만에 영주가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이건 밸런스가 맞지 않습니다.”
“흠…… 대단하군.”
“뭐가 말입니까?”
“오 부장, 원래 히든 클래스로 전직하려면 퀘스트나 기타 특수한 상황에 빠져야 한다네. 예를 들어 늑대 인간에게 물린다든가, 어디 옹달샘의 물을 마신다든가, 누구의 저주에 걸린다든가. 이런 식으로 말이지.”
“그렇지요.”
“그래. 그 전직 방법들은 영구히 보존된단 말이야. 아니면 그 직업을 가진 유저에게 퀘스트를 받아서 전직하는 방법이 있지. 그런데 그 데네브라는 유저의 연금술사라는 직업은 단 한 번밖에 안 되는 전직 퀘스트야. 맞지?”
“그렇습니다.”
오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데네브는 자신의 직업을 공유하지 않았어. 이제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아뇨.”
“크흐흐. 에르메키아 월드에서 유일한 연금술사란 말이야, 늑대 인간이든 마녀든 마족이든 그런 자들이 수십, 수백, 수천 명이면? 흔하디흔해 지나가다 매번 만날 텐데 그게 신기할까? 지금 NPC들은 오직 단 한 명뿐인 신기한 데네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니까 데네브의 명성이 높을 수밖에. 다른 히든 클래스를 가진 자들은 눈앞의 금전적 이익 때문에 더 큰 이익을 버리고 있어. 바보들.”
“오…… 그렇군요.”
오 부장이 자신의 손바닥에 주먹을 딱 쳤다.
“그렇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야, 쯧쯧쯧.”
“죄…… 죄송합니다.”
“그만 나가 봐.”
“예.”
오 부장은 사장에게 고개를 숙인 후 사장실을 나섰다.
“어이!”
“음, 정 부장? 왜 여기 있나?”
“역시 네놈이었어어어…… 끄윽!”
정 부장이라는 사람은 마치 좀비처럼 오 부장의 목을 조이려고 들었다.
“왜, 왜 이래?”
“네놈 짓이지? 사장에게 우리 부 직원들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한 거어어어…….”
정 부장의 눈이 거의 뒤집어지려고 했다.
“아니, 나는 사장이 보고하라고 해서…… 흐힉!”
순식간에 주위 복도가 사람들로 꽉 채워졌다.
“다 게임제작부 직원들이다아! 네놈 때문에 우리 부서 애들의 절반이 야근해야 되에에…….”
정 부장이 완전히 좀비로 변신하였다.
“우워어어어어…….”
정 부장의 부하 직원들도 양팔을 들어 올리며 좀비로 변신해 오 부장에게 다가갔다.
“히익! 자네들! 왜 이러는 거야? 이러지 마! 헉! 자네는!”
“나 다시 살찌고 싶어어어어어…….”
유난히 마른 해골 같은 사원 한 명이 오 부장의 목덜미를 잡아 물려고 했다.
“야! 야! 박맹수! 아니, 박 사원! 이러지 마! 이러지 마! 으아…….”
“자…… 전부 이 민중의 적에게 지옥 같은 고통을!”
정 부장의 명령에 그의 충실한 좀비들이 오 부장의 몸에 손을 댔다.
간질간질간질.
“으하하하하하하하! 그만! 그만! 으힉힉힉힉힉힉! 으헥, 으헥, 살려…… 살려! 크아아아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제발! 잘못했어! 한 번만 봐줘! 으큭!”
박 사원이 오 부장의 턱을 손으로 눌러서 입을 닫게 한 후 목을 간지럽혔다.
“으…… 풉풉풉풉풉풉! 으아! 사장님! 살려 주세요!”
오 부장의 절규 속에 사장은 서류가 가득한 사장실에서 서류를 찾으려고 하였다.
“으…… 어디 갔지? 미국과 게임 계약하기로 한 계약서가…… 어디 갔지? 아까 오 부장 때문에 멋있게 보이려고 휙 던진 게 화근이었어. 제길! 어? 이거 무슨 소리냐? 오 부장 목소리 같은데? 아니겠지, 뭐. 잠을 나흘 동안 못 잤으니 헛것이 들릴 만도 하지, 엇엇엇엇!”
와르르르르르르.
높이 쌓여 있던 서류 더미가 무너지면서 사장을 덮쳐 버렸다.
“으아……. 이게 뭐냐? 젠장, 정리 좀 할 걸. 어? 계약서가 여기 있구나! 운이 좋아! 그럼 마저 해 볼까?”
사장은 서류 더미에 파묻힌 채 일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