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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최 감독의 말에 동찬은 미소를 띠며 입을 뗐다.
“기획안은 물론이고 대본도 모두 봤습니다. 박 작가님의 명성에 걸맞은 작품이어서 고민할 건 없었습니다.”
“그래요?”
동찬의 말에 최 감독은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그에 반해 재영은 의구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입을 뗐다.
“대본이 좋아서 고민할 게 없었다는 건 매니저님 생각인가요, 아니면 이강현 씨 생각인가요?”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그녀의 물음에 매니저는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제 생각이 곧 강현이 생각입니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라 불리는 이강현의 필모그래피는 화려했다. 그 화려함 속에서 드라마는 시청률로, 영화는 관객 수로 보증했다. 광고주들도 줄을 섰고, 차기작은 물론 차차기작까지 시나리오가 그에게만 몰려 다른 배우들이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그런 강현이 지난 2년간 어느 곳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이번 캐스팅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이강현 씨는 이번 작품을 하고 싶어 하나요?”
또다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눈에 비친 이강현의 매니저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인 호두 같았다. 그 속을 숨긴 채 입에 발린 소리나 하는 속물처럼 보여 더 믿을 수 없었다.
“해야죠. 박 작가님 작품인데.”
그 대답은 이강현 스스로가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소속사에선 원하지만 배우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작업. 아주 최악의 조합이었다. 소속사와 배우 사이에 트러블이 생기면 온전히 집중할 수 없어 작품을 망치기 십상이었다.
“배우가 원하지 않으면 진행할 의미가 없습니다. 제 작품이 산으로 가는 거, 저는 용납할 수 없거든요.”
“작가님이 오해하신 듯한데 강현이도 하고 싶어 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을 맞춰 주셔야 함께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럼 그렇지. 원하는 바가 있었어.
재영은 최 감독과 시선을 마주치며 실소를 뱉었다. 이 바닥에 오래 있지 않았지만 이런 일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톱스타를 데리고 작품을 할 땐 으레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강현은 오죽할까. 먼저 미팅을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말씀해 보세요. 맞출 수 있는 부분은 조율해 봐야죠.”
최 감독이 대답하자 동찬은 기다렸다는 듯 준비해 온 서류를 작가에게 건넸다.
“촬영은 주 5회로 진행하고 밤샘 촬영은 할 수 없습니다. 또한 키스신도 찍지 않고, 액션신은 무조건 대역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서류를 보기도 전에 재영과 최 감독은 말을 잊지 못했다. 그가 말한 조건은 불가능한 사항이었다. 재영은 손에서 서류를 떨어트리다시피 내려놓고 말문을 열었다.
“지,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드라마 제작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배우가 연기를 하기엔 최악의 시스템이죠. 배우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들어 좋은 연기를 끌어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키스신을 찍지 않는다뇨! 장르가 판타지 사극이지만 로맨스인 거는 알고 말씀하시는 거죠?”
“키스신을 찍지 않는다고 해서 로맨스가 안 되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작가님 정도면 해내실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웃는 얼굴이 침 못 뱉는다고 딱 그 짝이었다. 재영은 어이가 없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강현 캐스팅하려다가 코 꿴 듯했다.
“촬영 스케줄에 맞추다 보면 밤샘 촬영이 불가피할 수 있습니다. 대역은 박 작가도 그렇고 저도 쓰지 않습니다.”
재영과 최 감독은 액션신은 물론이고 다른 장면에서도 대역 없이 진행하기로 유명했다. 무엇보다 디테일과 퀄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대역을 받아들이기는 무리였다.
“요즘 촬영 기법이 좋아서 그 정도 대역은 티도 안 날 겁니다.”
“이보세요!”
재영이 참다못해 소리를 내지르며 박차고 일어났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 배우가 원하는 조건은 전부 드라마 제작 환경과 맞지 않는 무리한 요구였다.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하세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건들 들이밀면서 요구하는 거, 너무 몰상식한 거 아닌가요?”
“이 정도로 몰상식하다고 하시면, 작가님. 제가 드린 서류 보시면 기절하시겠습니다.”
“네?”
“강현이 회당 출연료는 2억 원으로 책정했습니다.”
결국 감독까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사태가 발발했다. 최 감독까지 언성을 높이며 삿대질을 해 댔다.
“앞에 요구 조건도 터무니없는데 출연료가 뭐요?”
“이강현 정도면 회당 출연료로 2억, 부족하지 않나요?”
“하.”
“영화 한 편에 이강현이 받는 개런티가 얼만지 아시죠? 러닝 개런티도 받습니다. 드라마 한 편에 파급력을 계산해 보면 그렇게 무리한 요구도 아닐 텐데요. 거기에 최 감독님과 박 작가님 작품인데.”
어처구니가 없다는 건 바로 이런 상황에서 쓰는 말일 것이다. 재영과 최 감독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 재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찬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쯤 되면 남자 주인공을 다른 배우로 돌려야 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재영과 최 감독은 동찬에게 때려치우자는 소리를 선뜻 할 수 없었다.
특히 타 방송사에서 최윤과 수아를 캐스팅해 의학 드라마를 10월 중으로 편성한다는 소식이 제일 문제였다. 대세 중에 대세인 최윤이 캐스팅됐다는 기사 하나만으로 드라마에 붙으려는 광고주들이 줄을 섰다는 후문이 들렸다. 웬만큼 잘나간다는 배우를 가져다 놔도 시원치 않을 판이었다. 거기다 이강현부터 캐스팅한 뒤에 여자 주인공을 물색하려고 차일피일 미뤄 두고 있었기에 그가 꼭 필요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필력이 좋고 대본이 좋은 작가라고 해도 스타성이 있는 배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단 제작사와 상의한 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출연료는 저희 두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거 아시죠.”
“그럼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이 상황에서 매니저와 더 나눌 말이 없었다. 그들의 입장은 확고하니 문제는 제작사에게 떠넘겨졌다.
동찬이 나가자마자 최 감독과 재영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한숨을 내뱉었고 그 순간 제작사인 데이드림 픽처스 김지훈 대표가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
지훈은 강현의 매니저가 있었던 자리에 앉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그 물음의 대답은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서류를 건네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게 뭐야?”
“이강현 요구 조건. 충족시켜 줘야 작품 하겠대.”
최 감독의 말에 지훈은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았다. 큰 맥락은 매니저가 쏟아 내고 간 말도 안 되는 조건들이었지만 세부 사항까지 적힌 서류는 대한민국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조건들이었다.
두 시간이 넘는 장거리 이동은 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무더운 여름에 야외 촬영할 시 에어컨이 있는 대기실을 따로 설치해 달라는 개떡 같은 소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지훈이 입을 떠억 벌렸다.
“지금 이걸 말이라고 가져온 거야?”
“그래, 박 작가. 이 정도면 병이야. 이런 조건으로 촬영 들어가면 다른 배우들만 말 많아지고, 선생님들은 어쩔 거야. 그분들 연세가 몇인 줄 알아? 이강현한테 할 대우를 선생님들한테 해 드려도 모자라.”
“다시 생각해 보자. 제작사도 먹고 살아야지. 박 작가 회당 원고료 주기도 우리 빠듯하다.”
지훈과 최 감독이 애걸복걸하듯 안 되는 이유를 줄줄이 읊었다. 말도 안 된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다. 주인공이 주 5회 촬영이라니. 촬영 스케줄을 어떻게 짜야 주 5회 촬영, 그것도 밤샘 촬영을 안 할 수 있단 말인가. 회사원도 아니고 칼퇴근을 왜 하려고 하는 거야, 왜!
“이강현만 한다고 하면 붙을 투자자 많잖아요. 광고주도 줄을 설 텐데 그 요구 조건 못 맞춰요?”
그녀는 욕심이 많았다. 제 작품이 그 어떤 드라마보다 뛰어나기 위해선 배우의 연기력이 가장 중요했다. 주·조연은 말할 것도 없고 단역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강현은 작가가 요구하지 않아도 맡은 캐릭터를 스스로 잘 살려 냈다. 그가 맡았던 배역 중 흥행하지 않은 캐릭터는 없었다.
이건 작가로서 커리어에 중요한 문제였다. 비록 허무맹랑한 요구 사항들을 들어줘야 할지라도.
“일단 수용할 수 있는 것만 추려 보죠. 안 되는 건 어떻게든 설득해 보고요.”
“그쪽에서 우리 말을 듣겠어?”
“감독님도 이강현이랑 작품 하는 거 소원이라면서요. 소원을 이렇게 쉽게 놓칠 수 있어요?”
“그건 이강현이 싸가지가 있는 줄 알았을 때 얘기고!”
“감독님, 연기하는 애들 중에 싸가지 있는 애 본 적 있어요? 저는 없네요.”
“크흠…….”
“뒤에서 호박씨 까는 것보다 지금 까는 게 나아요. 촬영 들어가고 나서 못 찍겠다고 나오는 것보다 대놓고 해 달라고 하는 게 백번 나으니까 접어줄 건 접어주자고요.”
그녀의 말이 백번 옳았기에 최 감독과 지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작가의 의도가 확실하니 어떻게 해서든 이강현을 데려다 눈앞에 앉혀 놔야 했다. 이강현만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 해외 수출로도 문제없을 테고, 한국에서의 파급력은 말할 것도 없을 테니 당장은 적자를 보더라도 최대한 맞출 수밖에.
“전 5회 대본 써야 하니까 가 볼게요. 이강현 쪽 정리되는 대로 연락 주세요.”
이강현 문제를 그들에게 떠넘긴 재영은 조금이나마 홀가분한 마음으로 제작사를 나섰다.

한편 데이드림 픽처스를 나와 더블에이치 엔터테인먼트 사옥으로 돌아온 윤동찬 실장은 소속사 대표가 있는 사무실로 올라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검은 가죽 소파엔 소속사 대표인 유인후와 이강현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뭐래?”
동찬을 보자마자 인후가 물어왔다. 썩 좋은 표정도, 영 아닌 표정도 아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말도 안 된다고 길길이 날뛰는데, 뭐 별수 있겠어요. 그쪽에서 강현이만 원하니까.”
“미친다, 진짜. 이게 무슨 개쪽이야.”
“박재영 작가가 시놉 쓸 때부터 강현이 염두에 두고 쓴 거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 없어요. 박 작가 성격은 대표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한다면 하는 거.”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박 작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 자식 때문에 미운털 박히겠어.”
인후는 강현에게 삿대질까지 해 가며 혈압을 높였다. 하필 강현의 사정이 말이 아닐 때 그를 원한다니.
2년 전부터 강현이 골질을 해 대는 바람에 눈앞이 깜깜하던 차였다. 그때 박재영 작가의 기획안이 방송국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2년 동안 숱한 루머에 쌓여 복귀하지 못한 강현에게 이처럼 완벽한 복귀작은 두 번 다시 찾기 힘들었다. 반드시 박재영 작가의 드라마로 복귀해야 했다. 더 흉흉한 소문에 휩싸이기 전에.
하지만 강현이 문제였다. 복귀는 하겠으나 그가 내민 조건들이 너무 터무니없는 것들이라 생각할수록 속이 뒤집혔다.
“그 말도 안 되는 계약서를 어떤 제작사가 받아들이겠어. 안 그러냐, 이 무식한 놈아!”
언성을 높이던 인후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강현을 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를 손에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던져 버리고 싶지만 화를 억누르며 꾹꾹 참았다.
“내가 안 한다고 했잖아.”
이윽고 들려오는 묵직한 강현의 음성이 또 한 차례 속을 뒤집어 놓았다.
“2년 동안 말도 안 되는 개소리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광고까지 안 하니까 너 죽은 줄 아는 사람도 있어!”
“뭐 어때. 나 살아 있잖아.”
“이 자식이 진짜!”
“재떨이는 내려놓고 말해. 그거 나한테 던지면 바로 죽겠어. 나 죽으면 안 되는 거 형이 더 잘 알지?”
“미친놈. 이 자식 내 눈앞에서 치워 버려!”
혈압이 쭉쭉 올라가는 듯해 인후는 동찬에게 강현을 내보내라며 손짓했다. 동찬이 나서지 않아도 강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사무실을 유유히 걸어 나갔다. 그런 그를 뒤따라 나가는 건 로드 매니저인 세훈이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온 강현은 혹여 기자들이 소속사 앞에 기다리고 있을까 싶어 서둘러 차에 올랐다. 스케줄이 있을 때 타는 밴은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2년 전 개인적으로 차를 새로 뽑았고, 기자들이 모르는 강현 소유의 차는 스케줄이 없을 때도 세훈이 운전했다.
“형, 집으로 가면 되죠?”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힐끔거리던 세훈은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동을 걸고 소속사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창밖을 바라보던 강현은 동찬이 읽어 보라며 준 대본을 힐끔거렸다.

<불멸의 사랑>
감독 최우식
작가 박재영


제목부터 아주 촌스러웠다.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일단 지금 제가 드라마를 찍을 환경이 아니라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는 요구 조건들을 들어준다는 조건 하에 드라마를 찍겠다고 한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가는 길에 길 베이커리 들려.”
“꼬맹이 마카롱 사려고요?”
“어. 꼬맹이 거기 마카롱 좋아하잖아.”
먹고 살기 위해. 정확히 말하면 잘살기 위해. 그 이유뿐이었다.
그는 불멸의 사랑 1회 대본을 펼쳐 들었다. 자신을 염두에 두고 초고를 썼다던 박재영 작가의 대본은 이미 예전에 받았지만 출연할 마음이 없었기에 당연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첫 지문부터 읽어 가는 그의 시선이 글을 따라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2화. 새로운 국면





불이 꺼진 어두운 방 안에 있던 재영은 오로지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에 의존하고 있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녀의 손길이 빨라지며 막혔던 5회 대본이 도착점을 향해 순항 중이었다. 이강현의 캐스팅 건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다고 생각해서일까. 대본이 술술 풀렸고 막혔던 체증도 내려가 속이 한결 편안했다.
쿵쿵, 쿵쿵쿵─ 쿵쿵.
남자 주인공인 무현과 여자 주인공인 단아의 감정이 절정에 다다른 중요한 신을 쓰던 중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이 들려왔다.
재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위층에서 나는 소리였다. 간만에 술술 풀리던 참인데 소음이 들려와 짜증이 일었다. 이사 오고 나서 처음 들어보는 층간 소음이었다.
집필 중엔 신경이 예민해 층간 소음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웃끼리 얼굴 붉히고 칼부림까지 나는 요즘 세상에 그녀에겐 특히나 중요했다.
그래서 제일 상층인 30층에 입주하고 싶었지만 그곳은 펜트하우스로 한 가구만 사는 곳이라고 했다. 매매가도 재영이 생각한 예산과 전혀 맞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29층으로 들어왔다. 고작 한 층 차이인데도 가격의 차이가 상당했다. 30층엔 금을 발라 놨나. 왜 그렇게 비싼지는 몰라도 그 가격에 방음은 포함되지 않은 게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