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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서지호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름과 서른둘이라는 나이가 내가 아는 전부였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는 법, 몸을 사리는 비겁한 연애를 했다. 그는 클럽에서 만난 데다 가볍게 접근했던 사람치고 몸도 주지 않고 개인적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는 여자를 7개월이나 견뎌 줬다.
부모님은 모두 살아 계시는지, 형제는 몇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남자에게 매이는 순간 여자의 인생은 지옥으로 바뀐다는 걸 평생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야근이 잦은 나를 위해 스튜디오 밑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밥을 먹어 주고 왁자지껄한 소호에서 맥주 한두 잔 마시고 나면 택시를 태워 보내 줬다. 센스 있는 남자였다. 가벼운 대화밖에 없었지만 나를 파악하고 내가 주저하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날 나는 취하지 않았고 그는 처음으로 내 앞에서 흐트러져 있었다.
“……얼마나 더 필요해? 우린 처음 만난 날 침대로 가도 전혀 이상할 나이가 아니야.”
‘오늘은 팬티가 영 아니야.’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죽고 난 뒤의 팬티 걱정을 한 목이 긴 어느 시인만큼 자의식이 강한 탓도 있지만 그날의 팬티는 최악이었다.
거추장스런 처녀성 따위 이왕이면 불쾌감 없는 호남형의 남자에게 줘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무거나 찾아 입은 게 구멍 난 팬티였다.
그가 더 멀리까지 가길 원했던 밤, 나는 이별을 고했다. 자존심이 강한 남자는 다른 건 몰라도 헤어질 때만큼은 깔끔했다. 실수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헤어진 후 취한 밤을 핑계 삼아 전활 걸어 오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헤프게 영원을 말했으면 달라졌을까? 장난처럼 전화가 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나러 나갈 텐데……. 못난 여자들이나 하는 질척질척한 짓을 내가 하게 될까 두려워 그의 번호를 삭제했다.
그로부터 25개월 만이었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한 달 전, 우연히 한 여성의 켈리백을 대신 들고 바Bar로 들어서는 그를 봤다. 이곳, 홍콩에서의 2년은 누구나 호감 가질 매력과 유머를 장착한 그라면 대여섯 번째의 새 여자가 생기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서지호와 내가 깊고 찐한 연애를 한 건 아니지만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머릿속에 명품이나 자신을 꾸미는 것밖에 안 들어 있는 철없는 계집애가 아닌,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자기 또래의 여성이 그의 곁에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그날 그는 나를 못 보고 지나쳤다.
중학생 때부터 틈틈이 써 왔지만 스무 살이 되고부터는 하루도 빼먹지 않았던 시나리오 쓰기는 실연을 하고도 나이트 촬영이 있던 날에도 빠뜨리지 않았다.
서지호와 헤어지고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드러나지 않는 부분까지 투자할 여유는 없었던 내가 속옷 매장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는 점. 특가 행사 매대에서 건진 팬티로 월화수목금토일 아무도 모르는 패션쇼를 했다. 죽을 만큼 사랑했던 것도 아닌데 헤어지고 두 달은 울리지 않는 전화기에 온 신경이 집중된 나날을 보냈다.
힘든 촬영이 있었던 어느 날 저녁 식사를 겸한 회식은 빠지고 싶었지만 너무 건강한 나는 딱히 둘러댈 핑계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튜디오 식구들은 겁쟁이가 수개월을 피해 다녔던 서지호와의 추억이 깃든 펍으로 갔다.
헤어지고 술은 입에도 안 댔는데 그날은 걷잡을 수 없이 취해 버렸고 오랜 친구 토니의 바에서 혼자 2차를 달렸다.
그날 처음 본 남자를 통해 첫 경험을 했다.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매일 죽지 않을 만큼 술을 마셨다. 어른이 되고 처음으로 눈물도 흘렸다. 술에 떡이 돼서 낯선 화장실 바닥에서 잠든 날도 있었다.
모두들 실수를 하면서 어른이 된다. 처음부터 어른이었던 어른은 없으니……. 이렇게 아픈 게 청춘이라면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할머니가 되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훨훨 날고 싶다.
자기 몸무게만으로 이미 300톤이 넘는 무거운 항공기는 어떻게 날아오르는 걸까?
뉴턴의 제2법칙, 질량 보존의 법칙, 양력의 순환 이론 같은 공기 역학 등 학창 시절에 배웠지만 이미 백지상태가 된 것들과 코안다 효과, 쿠타 조건처럼 낯선 것들을 공부해 봤지만 가슴으로 이해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02. 서울


2014년 가을

― 여러분 이 비행기는 방금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의 현재 시간은 오후 4시 27분입니다. 승객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항공기가 완전히 멈춘 후 안전벨트 사인이 꺼질 때까지 좌석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같은 계절 속에 갇혀야 하는 형벌을 받고 있는 걸까?
기대하지도 않았던 오로라를 만난 유콘에서 첫 번째 가을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아프고 낭만적인 가을을 보내고 서울에서 세 번째 가을을 만났다.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대지진의 연속으로 멸망해 버렸으면, 함께할 수 없을 바엔 차라리 세상의 끝을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고대 마야인이 예견한 종말 같은 건 없었다. 이틀 전 니나는 세인의 부러움과 축복 속에서 제이의 청혼을 수락했다.
충동적으로 날아온 서울. 언제든 올 수 있었지만 니나도 아빠도 아직은 마주하기 힘들어서 한국으로의 가족여행은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잠시 미뤘는데 혼자 이리로 흘러왔다. 두통이 가라앉지 않아 아홉 시간의 비행 동안 깨어 있었다. 공항에서 검색한 기차역에서 가까운 힐튼 호텔을 염두에 두고 택시에 올라 ‘힐튼’이라고 말하고 깜빡 잠이 들었는데 택시는 황량한 언덕배기에 서 있었다.
‘서울을 벗어난 교외일지도 모른다.’ 잠들어 버린 내 탓이라 생각하며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사위는 이미 어두워졌고 조금 오래된 건물엔 ‘그랜드 힐튼 서울’이라고 적힌 창백한 백색의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었다. 서울엔 두 개의 힐튼이 있었다.
로비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아래로 걸었다. 내게 서울은 니나의 고향 말고도 거대한 실리콘밸리 같은 최첨단 도시의 이미지로 존재했는데 이곳은 삭막한 고가 도로만 덩그러니 보이는 저개발 지역이다. 왜 이런 곳에 호텔을 지었을까. 절정인 단풍이 없었다면 더욱 황량했겠지? 늦었으니 그냥 묵기로 하고 들어갔다.
어릴 적 아빠의 출장에 동행하면 아무리 낯선 도시라 해도 하나쯤은 있었던 힐튼 계열 호텔에서 묵곤 했다. 80년대 말에 태어난 내가 떠올리는 옛 정서라는 게 완전하진 않겠지만 70~80년대 힐튼의 분위기는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로비엔 지나다니는 이도 없고 프런트에 있는 두 명의 직원이 모든 업무를 커버할 수 있을 정도로 호텔은 한적했다. 이곳에 들어서면서부터 들렸던 영롱한 피아노 소리를 따라 걸었다.
지하에서 지상 2층까지의 천장을 튼 홀에 작은 파빌리온같이 생긴 구조물이 있었는데 남학생이 그 아래 놓인 하얀 그랜드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실수가 잦았지만 힘이 넘치는 〈라 캄파넬라〉.
니나의 마음을 차지한 제이를 그렇게 미워했으면서 그의 모든 앨범을 모았다. 그가 스물넷에 녹음한 소품집에도 이 곡이 있다. 내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걸 차지하고도 서울은 자신의 영역이라는 걸 상기시켜 주고 싶은 건가. 서툰 피아노 소리를 순수하게 즐길 수는 없었다.
체크인을 위해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나의 움직임을 좇던 수습 직원이 여권을 확인한 순간부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교육생 명찰을 단 초짜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한국에서 유명한 것 두 가지와 꼭 봐야 하는 장소 두 군데만 추천해 달라고 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입에서 제이 한과 피겨 스케이팅의 여제 유나킴이 나왔다.
확인 사살.
장소는 목록을 만들어서 조간신문과 함께 방으로 배달해 드려도 될는지 묻는다. 리스트는 됐다고 하고 방으로 올라왔다.
2010년 벤쿠버 동계 올림픽, 유나킴의 경기를 뉴욕 집에서 다 같이 봤다. 아빤 니나의 간식을 핑계로 긴장감 도는 경기를 피해 주방에 있었고 니나는 그녀가 실수라도 할까 봐 내 곁에 바짝 붙어 앉아 눈을 감은 채 귀만 열어 놓고 있었다.
놀려 주려고 아쉬운 듯 감탄사를 연발하면 실눈으로 TV를 보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내가 얼음판 위에 있는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자려고 누우니 기억은 더 선명해진다. 너를 낳은 도시로 도망 온 자체가 모순이었다. 켜켜이 쌓인 추억은 언제쯤 닳아 사라질까. 한참 뒤척이다 잠이 들었지만 유행에 뒤떨어진 촌스런 인테리어가 주는 의외의 편안함에 보스턴을 떠나온 후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다.
맛은 훨씬 나중 문제고 배고픔만 해결하면 만족하고 감사하는 니나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외할머니집 근처의 돈가스 가게’로 가기 위해 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에게 식당을 문의했다.
얘길 꺼내자마자 범위는 남산과 성북동의 몇 군데 돈가스집으로 좁혀졌고 버스 종점에 비슷한 가게가 여럿 있지만 혜원과 늘 먹던 곳 근처엔 무슨 교회가 있다고 했던 게 기억나 힘들이지 않고 가게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를 받았다. 호텔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했다.
“성북동 ○○돈가스로 가 주세요.”
“미국인이 혼자 거길 왜 가? 내 또래 같으면 추억이라도 있지…….”
스웨덴인과 영국인 그리고 아일랜드인의 피가 흐르는 나는 길지 않은 생의 대부분을 미국 동북부에서 보냈다. 미국 내에서도 소위 인종의 멜팅팟이라 불리는 곳에서 눈에 띈다는 이유로, 귀족 따위 거슬린다는 이유로 덩치 좋은 상급생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았다.
백인 미국인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과 나의 경계는 모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국이란 나라에 어떤 연대감도 갖지 못했다. 못 섞일 바에는 철저하게 영국인으로 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를 미국인이라…….
니나를 이해하기 위해 기숙학교 시절 라틴어보다 더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했다. 외국인 특유의 어눌함을 없애기 위해 발음에 공을 들였기에 한국어만큼은 자부하고 있었는데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려운 그들만의 정서가 있었다.
낮은 산길을 달려온 택시는 호텔이 있던 곳보다 정돈되고 고즈넉한 동네에 멈춰 섰다. 식당 구석에 앉아 니나가 먹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저렴한 메뉴인 등심 돈가스를 주문하고 음식을 기다리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얼굴만 봐선 음식에 만족하고 있는지 아닌지 읽을 수 없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친하게 지냈던 한국인 친구들 역시 표정이 풍부하진 않았다. 그러고 보면 니나는 표정이 참 풍부한 한국인이구나.
커다란 타원형 플라스틱 접시에 담겨 나온 음식을 보고 밀라노풍의 커틀릿, 코톨레타 알라 밀라네제가 떠올랐다. 이탈리아에선 원칙적으로 부드러운 송아지 고기를 사용하고 별다른 소스가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오스트리아의 슈니첼과 비교되는 코톨레타 알라 밀라네제를 먹으면서 니나는 이 집의 돈가스 이야길 했었다.

‘된장에 찍어 먹는 풋고추가 같이 나와. 깍두기랑 같이 먹어서 느끼할 틈이 없어. 두 개도 먹을 수 있는데 엄만 꼭 하나만 시켜서 속상했어.’

1인분은 성인 남성이 먹기에도 결코 적지 않았지만 하나만 시켜서 나눠 먹었기에 더 맛있었겠지. 소년의 몸으론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 안타까웠던 감정이 살아났다. 8달러도 안 하는 걸 하나만 시켜서 나눠 먹어야 했던 어린 엄마의 마음도 만져져서 결국 절반을 남기고 나왔다.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부모의 이혼으로 서둘러 철이 들어야 했고 열한 살에 니나를 만났다. 내가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아빠는 니나의 엄마, 혜원과 재혼했지만 그녀는 2주 후 불의의 사고로 죽어 버렸다.
고작 2주밖에 못 살 걸 내가 그렇게 반대하는 결혼을 했어야 했냐고 질타할 순 없었다. 혜원이 죽고 아빠는 너무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불안정했던 니나와의 만남을 계기로 나는 단단해져야 했다. 그저 하루빨리 어른이, 남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니나와 가족이 된 그해 겨울에 세운 계획표대로 옆도 돌아보지 않고 살았다.
사계절 햇살이 좋은 이탈리아는 런던 못지않게 날씨가 들쑥날쑥한 아일랜드 출신의 할머니, 애나가 가장 사랑했던 나라. 할아버지 제임스는 할머니에게 알프스를 품은 피에몬테, 아름다운 코모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바렌나, 고요한 중세 도시 베르가모 등 풍광이 수려한 이탈리아 곳곳의 별장을 아름다운 신부에게 결혼 선물로 바쳤다.
현재 쓸데없이 규모가 큰 옛 저택의 대부분은 할머니의 이름을 딴 암센터의 운영비를 충당하도록 소규모 부티크 호텔로 전환시켰고 앞서 언급한 세 곳은 아직도 가족의 여름 별장으로 사랑받고 있다.
남보다 일찍 인생의 목표가 생겨서 한 번도 가족여행에 따라나서지 못하다 니나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기념한 여행에 처음으로 함께했다.
이탈리아 남부의 해안 도로를 달릴 때였다. 절벽에 빼곡히 들어선 집들에 하나둘 조명이 켜지자 니나는 혜원과 서울에 살던 시절이 떠오른 듯 돈가스를 먹고 나면 먼 거리를 걸어가 엄마와 오르곤 했던 어느 공원 이야기를 했다.
저녁마다 같은 자리에서 노을 진 하늘을 배경 삼아 트럼펫을 부는 아저씨 때문에 쓸쓸했다는 말을 씩씩하게 하는 그녀와 대조적으로 열심히 화제를 바꿔 보려는 아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우리는 피자를 파는 가게가 대부분인 소렌토에서 제대로 된 ‘코톨레타 알라 밀라네제’를 먹기 위해 식당가를 배회했다. 아빠는 자기 건 안 시키고 니나 앞으로 나온 요리를 나눠 먹겠다고 하더니 결국 몇 입 못 먹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나 역시 절반 이상을 남기고 일어섰다.

계산을 마치고 가을 햇살 아래 서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날 계속 쳐다보던 부부가 어설픈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와이 아 유 히어?”
인류에게 던지는 생의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건 아닐 테고 왜 한국에 왔느냐고 묻고 싶은 거겠지. 간단하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 대답을 보류하고 있는데 남성이 머릿속으로 열심히 질문할 영어 문장의 구조를 세우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잠시 후 그는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새로운 질문을 했다.
“유 히어 포 메이크 머니?”
“한국어 합니다.”
“잘됐군. 우린 옛날 사람이라 영어가 딸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이 근처에 차를 마시기 좋은 장소가 있다며 내게 디저트를 사고 싶다고 했다. 나답지 않게 낯선 사람이 베푸는 호의에 아무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돈가스집 이후로는 별다른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