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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명쾌한 소리와 함께 거실과 직통으로 연결된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보기만 해도 안구가 정화되는 잘생긴 남자 두 명이 걸어 나왔다.
“뭐야? 집에 있었냐?”
죽기 살기로 벨을 눌러 놓고는 뭐라는 거야. 집주인인 휘가 태연히 집 안으로 들어오는 재영을 보고 인상을 썼다. 재영의 옆에는 현석이 차분한 얼굴로 서 있었다.
선우휘, 강재영, 현석은 연예계 3대 남신이라 불리는 배우들이었다.
영국 귀공자풍 외모에 모델처럼 큰 키와 세련된 스타일까지 갖춘 선우휘. 아이돌처럼 밀가루 바른 듯 뽀얀 얼굴에 커다란 눈을 가진 강재영. 쌍꺼풀 없이 길고 시원하게 뻗은 눈매, 지적인 분위기를 내는 뿔테 안경이 트레이드마크인 현석.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핫한 배우 세 명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우리 집이 니들 아지트냐?”
세 명 중 가장 많은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선우휘는 매끈한 이마를 찌푸렸다. 휘는 블랙 진에 빈티지 스타일의 화이트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워낙 군살 없이 탄탄하고 길쭉한 몸매 때문에 그대로 사진만 찍으면 패션 잡지 화보로 나올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너 집에 있었으면서 왜 전화 안 받아?”
집주인의 통박에도 재영은 자기 집 안방인 양 유유히 거실을 가로질렀다. 재영은 한때 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아이돌 그룹 출신으로 지금은 완전히 연기 쪽으로 전업한 꽃미남 배우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셋 다 스물여덟 살이라는 것을 포함해 사적으로 친하다는 거였다. 이렇게 자택 무단 침입을 서슴없이 저지를 정도로.
“전화? 잠깐……. 그건 뭐냐?”
휘의 날카로운 눈빛이 현석과 함께 막 소파에 앉고 있는 재영의 손에 들린 봉투에 꽂혔다.
“뭐긴. 알면서.”
재영이 휘를 향해 은밀한 눈빛을 빛내며 씨익 웃었다. 그의 손에는 소중한 신줏단지라도 되는 듯 막걸리병이 조심스럽게 들려 있었다.
“훗, 이거 봐라. 널 위해 내가 뭘 구해 왔는지.”
뽀얀 막걸리병에 닿은 휘의 시선이 일순 흔들렸다. 영국 귀족같이 새하얀 피부에 선명한 이목구비를 가진 휘는 막걸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전통주나 막걸리를 좋아하는 본인의 취향과는 상관없이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매번 고상해 보이는 고가의 위스키나 칵테일만 마셨다. 그러다 보니 늘 금단의 막걸리를 향한 욕구불만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저 탐스러운 막걸리병이 눈앞에서 흔들흔들……. 아, 아니지. 지금 저게 중요한 게 아니야.
휘는 얼른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이거 귀한 거다. 지방에서 하루에 정말 소량만 올라오는 건데 내가 어렵게 구해 온 거라고.”
재영이 자랑스러움을 한껏 담은 표정으로 말하며 막걸리병을 보듬었다. 유혹적인 젖빛 자태에 흔들릴 뻔한 휘가 마음을 다지고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안 돼.”
“잔 가져온다.”
집주인의 발언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현석이 몸을 일으키자 휘가 그 앞을 막아섰다.
“야. 내 말 안 듣냐? 오늘은 안 된다니까.”
휘가 현석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완고함을 보여 주려는 듯 힘껏 미간에 힘을 줬다.
“왜 안 되는데?”
현석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현석은 꿀성대라 불리는 매력 보이스를 가진 배우답게 일상 대화도 마치 극 중에서 성우가 말하는 듯했다.
그의 물음에 순간 휘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오늘은…… 어쨌든 안 돼. 다음에 마셔.”
“오호?”
그때 고양이같이 커다란 재영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이런 귀한 막걸리를 구해 왔는데도 튕겨? 아까부터 묘하게 까칠하고……. 이거 수상한데?”
……제길.
휘의 눈썹 사이가 좁혀 들었다. 그 변화를 매의 눈으로 포착한 재영이 먹이를 노리는 얼굴로 다가가자 휘는 자신에게 스멀스멀 다가오는 재영에게 짐짓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수상하긴 뭐가.”
“그러고 보니…….”
재영은 마치 모 고발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그런데 말입니다.’ 멘트를 치듯 진지하게 말했다.
“현관에 웬 여자 사이즈 운동화가 있었어.”
“여자 운동화?”
재영의 말에 가늘고 긴 현석의 눈이 조금 커졌다. 평소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현석으로서는 매우 놀랍다는 뜻이었다.
이 쓸데없이 눈치만 빠른 놈들이……. 휘는 몹시 초조했지만, 두 사람의 의혹에 휩싸인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윤기 나는 갈색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쓸어 넘겼다.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거야? 그딴 게 어디 있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오늘은 안 되니까 다음…… 엇, 야! 강재영!”
휘가 방심한 사이 소파 위에서 발딱 일어난 재영이 잽싸게 식당 쪽으로 달렸다.
젠장! 휘가 허를 찔린 표정으로 빠르게 재영을 뒤따랐다.
“거기 서! 강재영!”
“어어? 찔릴 게 없는데 왜 그리 필사적으로 따라오시나?”
재영이 약 올리듯 소리치며 식당으로 질주했다. 장난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마치 초원을 달리는 치타처럼 재빨랐다. 어릴 때부터 늘 육상은 자신 있었다고 자랑하더니 농담이 아닌 모양이었……. 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야! 거기 안 서?!”
휘가 잡히면 죽이겠다는 표정으로 살벌하게 재영을 뒤쫓아 식당으로 달려갔다.
현석은 두 사람이 추격전을 벌이거나 말거나 아랑곳 않고, 조용히 막걸리의 뚜껑을 땄다.
“흠. 향이 좋군. 과연 섬에서 공수해 온 거라 그런가.”
정갈한 자세로 막걸리의 향을 음미하는 현석의 표정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그때 식당 안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놀라움이 서린 재영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 이거 뭐야?!”
그 소리에 막걸리의 향을 음미하던 현석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와! 딱 걸렸어, 선우휘! 야, 현석아! 여기 여자가 있어! 이거 완전 특종이다! 당장 디스배치에 전화해!”
“…….”
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둔 현석이 점잖게 일어났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달리진 않지만 빠른 보폭으로 식당으로 걸어갔다.
식당 안에선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휘와 재영이 마치 삼자대면하는 남녀처럼 대치 중이었다.
커다란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있는 여자는 학생인 듯 아주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단발머리의 작은 두상을 가진 데다 눈도 동그랗고 얼굴도 동그래서 꽤 귀염상이었다.
“초면에 실례했네요. 아, 전…… 아시죠? 누군지.”
여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어 있었지만, 재영은 개의치 않고 말을 걸고 있었다. 휘는 성마르게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분노를 속으로 삭이는 듯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영은 기분 좋은 듯 떠벌거렸다.
“어쩐지 오늘 촉이 딱 서더라니.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랬던 건가? 선우휘에게 집에서 나란히 밥도 먹는 여자가 있을 줄이야. 응?”
“……그런 거 아니야.”
휘가 신경 쓰이는 듯 시선으로 여자를 힐긋거리며 말했다. 여자는 여전히 그들 사이에서 동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런 게 아니면 뭔데?”
“어쨌든 아니라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휘의 말에도 재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에이, 가사도우미도 집에 들이는 게 싫어서 유별나게 구는 놈이잖아. 그런데 이렇게 한 식탁에서 같이 밥 먹을 정도면 말 다 한 거지.”
“강재영.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휘가 짜증스럽게 말했지만 재영은 눈을 예리하게 뜨며 의심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면 뭔데?”
“어쨌든 아니라고.”
“어떤 사이인지도 말 못 하면서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냐? 자식. 부끄러워할 것 없어. 연애 다들 하는 건데 뭐가 문제라고. 내가 이런 데선 또 쿨하게…….”
“얘는 내 노예야.”
“그래그래, 그러니까 처음부터 노예라고 했으면 내가……. 뭐?”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 떠지는데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세 남자의 시선이 요란한 소리가 난 쪽으로 향하는 것과 동시에 휘가 소리쳤다.
“이결아!”
그곳엔 여자가 밥그릇에 얼굴을 박은 채 쓰러져 있었다.



#01. 당신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엄청난 일


“설마, 그걸 나 입으라고 가져온 거야?”
“……네?”
휘의 서늘한 목소리에 현란한 패치와 번쩍이는 징이 박힌 블랙 가죽 재킷을 내밀던 코디네이터 지영이 움찔거렸다.
“아, 그게…….”
지영이 흔들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생긴 건 영국 황실 귀족 같은 고고함이 흐르는데,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영혼까지 얼려 버릴 시베리아의 한파 같았다.
“네 눈엔 그게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해? 딱 봐도 싸구려 티 팍팍 나는데.”
“저기 이건 이번 시즌 뻬어리 송 컬렉션에도 출품된…….”
“컬렉션에 출품만 되면 다 번듯하고 있어 보이는 줄 아는 코디네이터 참 많아. 그저 명품이라면 다 좋은 줄 알고.”
휘가 피식거리며 냉소를 흘리자 그녀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아, 아니 전…….”
지영은 뭐라 말대꾸라도 하고 싶었으나 솔직히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요즘 피곤해서 주는 대로 협찬받다 보니 제대로 신경을 못 쓴 게 사실이었으니까. 휘는 뭘 입혀도 모델 같아서 편하게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의 독설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럼 다른 걸로 가져올…….”
“됐어. 또 그런 난잡한 거나 들고 오겠지.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게 네가 골라 오는 것보다 백만 배는 나아 보이지 않아?”
휘가 시원한 애플그린 칼라 스트라이프 셔츠 위에 걸친 댄디한 플라잉 재킷의 깃을 슥 들어 보였다.
“배, 백만 배…….”
지영의 동공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이것 역시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지만,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의 백지장같이 허예진 얼굴에는 상관도 없다는 듯 휘가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쐐기를 박았다.
“그 정도로 네 실력이 형편없다는 거야.”
파르르 떨던 지영이 결국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정말…… 정말 너무하세요! 더는 못 하겠어요! 저, 저 그만둘래요!”
휘가 ‘난잡’하다 칭한 블랙 재킷을 움켜쥐고 흔들던 지영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뒤돌아섰다. 그녀가 그대로 문 쪽으로 냅다 달려가자 휘는 냉소적인 시선으로 그 모습을 응시했다.
“형. 저 왔…… 어이쿠!”
마침 들어오던 매니저 정석이 문밖으로 뛰쳐나가는 지영과 부딪칠 뻔했다.
“어? 어디 가는…….”
정석은 시니컬한 표정의 휘와 달려가는 지영의 뒷모습을 번갈아 봤다. 뭐, 뭐지? 이 몹시 익숙한 상황은……. 엇! 설마 또?!
“지영 씨! 곧 촬영 시작하는데 어디 가요? 지영 씨!”
복도를 향해 황망히 소리치는 정석에게 휘가 말했다.
“놔둬. 그만둔다는 사람 잡아서 뭐 해.”
“네?”
정석의 눈이 커져선 대기실 소파 위에 긴 다리를 과시하듯 발을 꼬고 느른하게 누운 휘에게 성마르게 다가갔다.
“지영 씨 그만둔대요?”
“어.”
역시나인가! 이렇게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 나가는 여자를 한두 번 본 게 아님에도 설마설마하는 심정으로 물었지만……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혹시 형이 또 뭐라 했어요?”
“뭐라 하긴. 있는 그대로, 명백한 사실만을 말했을 뿐인데.”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말하는 것은 휘의 특기였다. 문제는 그 특기로 인해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코디와 스태프가 갈렸다는 거라고요! 으윽.
뒷말을 하지 못한 정석은 위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비타민처럼 먹는 위장약을 꺼내며 휘를 보니 자신의 심정은 알 바 아니라는 듯 태연히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게임하는 모습도 무슨 광고의 한 장면처럼 모델 포스를 뽐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형. 지영 씨도 힘들게 겨우 뽑았는데 저렇게 가게 놔두면 어떡해요?”
삐콩. 삐콩. 삐콩.
“어떡하긴. 새로 뽑으면 되지.”
삐콩. 삐콩. 짜라라라라라라랑.
“새로 코디를 뽑아도 매번 일주일을 못 버티잖아요. 이미 이 바닥에 소문 다 돌아서 아무도 안 오려고 한다구요!”
삐콩. 삐콩. 삐콩. 삐콩.
“그럼 안 뽑으면 되고.”
“혀엉!”
[짠자잔― 금화 열 닢을 획득하셨습니다.]
무심한 얼굴로 게임만 하고 있는 휘를 보고 있으려니 정석은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다잡으며 정석이 말했다.
“그래도 오늘 당장 촬영인데 지영 씨한테 전화 한 통만 해 주시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휘가 얼음같이 살벌한 시선으로 정석을 바라봤다.
힉. 저 눈! 정석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휘는 한번 수틀리면 촬영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가 버리는 매우 무서운 특기도 가지고 있었다. 이럴 땐 납작 기는 게 최선이라 판단한 정석이 잽싸게 태도를 바꿨다.
“제, 제가 알아볼게요! 어떻게든 섭외해 올 테니까 형은 저 올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잠깐 기다리세요. 알았죠?”
어차피 울며 뛰쳐나간 코디네이터를 다시 붙잡을 순 없겠지만, 급한 대로 누구라도 데려와야 한다. 정석은 역사적 사명을 띤 표정으로 위장약과 휴대폰을 들고 잽싸게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