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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처음 듣기에 주지약이 고개를 흔드니 동악사는 그러면 그렇지 라는 표정이 되어 설명을 시작했다.
“흠! 십 년 전, 무림에 난리가 난 적이 한 번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멸문했다 전해지는 전진교(全眞敎)의 비공(秘功)이 웬 멍청이의 손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전진교 정도는 너도 알겠지? 현 도가(道家)의 태산(泰山)이라 불리는 무당파(武當派)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정종도학(正宗道學)의 뿌리라 일컬어지던 곳이다. 당시 망해 가는 송나라를 구하기 위해 원(元)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다 결국 멸문당하기는 했지만,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전진교의 도사들은 하늘을 날고 태산을 옮겼다 하더구나. 크큭! 말도 안 되는 개소리지. 하나 그 개소리가 생길 정도로 그들의 무공이 보기 드문 상승의 것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한 전진교의 비공이 발견되었으니 무림이 발칵 뒤집힐 만도 했지. 후훗! 당시 너도나도 눈에 불을 켜고 그 멍청이의 손에 들린 비공을 빼앗자고 달려들었으니 말이다. 하나 그 멍청이도 생각은 있었던지 제 목숨 하나 건지고자 날 찾아온 것이 아니겠느냐? 그놈이 말하기를 자신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가로 전진교의 비공을 필사(筆寫)해 바친다 하기에 냉큼 받아들였지.”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 필사본따윈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기에 비급은 빼앗고 목숨만은 그놈이 원하던 대로 살려 주기 위해 지하뇌옥에 가둬 버렸다. 후훗! 보물의 주인은 본시 하나면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는 그놈을 쫓아왔던 욕심 많은 개들도 사천곡 하인 놈들을 풀어내 쫓아 버렸다. 사실 당시 대문파에선 체면이 있어 움직이지 못하였기에 사천곡까지 찾아온 놈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대부분이었단다. 덕분에 놈들을 쫓아내기도 쉬웠지. 흐! 제 실력도 분간 못하는 놈들이 보물에 눈이 멀어 감히 사천곡까지 쫓아왔다가 내 하인들에게 혼쭐이 나 혼비백산(魂飛魄散) 도망치던 꼴이란……. 크흐흐.”
“…….”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좀처럼 웃음을 그치지 못한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재밌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사악한 웃음을 흘리는 동악사였다.
주지약은 새삼 악선이란 명호를 떠올려야만 했다. 그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결국 자신은 손끝 하나 까딱 않고 제 발로 찾아온 보물을 얻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보물이 바로 동악사가 말한 선유진경이리라.
과연 그녀의 생각이 옳았음인지 동악사가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어찌되었든 내 그 멍청한 놈에게서 전진교의 비공이라 추측되는 선유진경을 얻었으나 솔직히 말해 그게 정말 전진교의 비공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뭔가 이상한 게 적혀 있었나요?”
“이상하냐고? 크큭! 이상하기 이전에 괴이하다는 표현이 옳겠지. 그놈의 선유진경 첫 장에 쓰여 있듯 그것은 선택받은 이가 아니면 결코 익힐 수 없는 괴공이었으니 말이다.”
“……?”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좀처럼 그의 말뜻을 짐작할 수 없기에 주지약이 빤히 동악사를 올려다 보았다.
동악사는 가벼운 코웃음과 더불어 답을 해 준다.
“흥! 내가 그 머저리한테서 얻은 선유진경은 본시 상(上), 중(中), 하(下) 권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그중 우리가 쓸 수 있는 실질적 무공이 기록된 것은 상권과 중권이나 내가 얻은 하권에는 말도 안 되는 괴공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무슨 얼어 죽을 선골(仙骨)을 타고난 이만이 익힐 수 있다는 천사신공(天賜神功)이란 것이 적혀 있기에 내 열 받아 찢어 버렸지.”
“찢어 버렸다구요?”
“그래 찢었다! 아주 시원하게 찢어 버렸지! 너도 생각해 보거라. 보물이라 하기에 잔뜩 기대를 갖고 열어 보았더니 익힐 수도 없는 괴공이 적혀 있다면 열 안 받겠느냐?”
“대체 그 괴공이란게 정확히 뭔데 그러나요?”
“훗! 뭐냐고? 말도 안 되는 개소리지. 선유진경에 적혀 있기를 선골이란 날 때부터 신선의 몸을 타고난 인간을 일컫는다 했다. 정수리가 뿔과 같은 형상으로 솟아올라 있으며 또한 백회혈(百會穴)이 열려 그곳을 통해 하늘과 통하고 선계(仙界)의 선기(仙氣)를 받아들이는 천사신공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천사신공을 완벽히 터득하면 신선들과 같은 신묘한 능력을 얻는다 하더구나. 하지만 너도 생각해 보거라. 세상 어느 천지에 도깨비마냥 머리에 뿔난 놈이 있을 것이며, 또 세상 어느 누가 있어 급소인 백회혈이 뻥 뚫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 내 살다 살다 신단으로 신선이 될 수 있단 백가량 그놈의 허무맹랑한 허풍을 능가하는 허풍을 마주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선유진경에 적힌 천사신공을 내 아우에게 익히게 할 순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
그날 맛보았던 실망감이 되살아나는지 동악사가 흥분해 외치며 주먹을 꾸욱 움켜쥔다.
그러나 제 분에 못 이겨 씩씩대는 동악사와 달리 주지약의 두 눈은 유난히 반짝거렸다.
‘선유진경……. 분명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귀에 익숙한 단어였으나 딱히 이렇다 하고 떠오르는 게 없었던 것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포기한 주지약이 다시금 동악사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것은 보통 사람이 익힐 순 없다는 건가요?”
“음……. 굳이 말하자면 익힐 수는 있다. 단지 선유진경의 이야기에 따르면 별다른 성취를 볼 수 없다는 것뿐이다.”
“그럼 그걸 아저씨께 가르쳐 줄 수 있나요? 찢어 버렸다고는 하셨지만 그 내용은 기억하고 계실 게 아니에요?”
“흐흠! 그, 그거야 물론…….”
예리했다.
주지약의 판단대로 동악사는 그것을 시원스럽게 찢기 전 꼼꼼히 살피고 또 살펴 이미 모든 내용을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통 큰 남아(男兒)답지 않은 좀스런 행동을 들켰단 사실 자체만으로도 무안해진 동악사가 헛기침과 함께 답을 회피했다.
하나 주지약은 별반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의 말만을 이어 나갔다.
“비록 성과가 없다 해도 일단 그것을 아저씨가 익힐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아무리 허무맹랑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해도 전진교의 신공이라면 분명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 거예요. 분명히…….”
“그건 틀렸다. 내 아무리 살펴보았으나 그건 흔하디 흔한 토납법보다 못한 것이었느니라. 혹여 아우가 선유진경에 적힌 대로 선골을 타고났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차피 달리 가르쳐 줄 것도 없으시잖아요. 그렇다고 정말 무당파의 진산절기인 태극신공을 훔쳐 도사들의 검에 아저씨를 죽게 만들 셈인가요? 혹 통귀공(通鬼功)을 가르쳐 주신다면 모르지만 그걸 가르쳐 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험!”
당연했다.
아무리 의제라 하지만 어찌 자신만의 독문심법인 통귀공을 유원영에게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이는 곧 동악사 자신이 가진 힘의 근원을 넘겨주는 것과도 같았다. 제자들에게도 가르치지 않았던 통귀공을 유원영에게 가르칠 순 없는 일이었기에 동악사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뭐 씹은 표정이 되었다.
주지약은 한 줄기 미소로 길고 긴 이야기를 끝맺었다.
“결정 났네요.”

* * *

결정 났다.
배시시 웃으며 전해진 소녀의 말대로 동악사는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선유진경 안의 천사신공을 유원영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잠자던 그를 흔들어 깨웠다.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데리고 정자 밖으로 나온 동악사는 우선 주지약이 생각해 두었던 말로 유원영의 관심을 이끌었다. 민간에서 신선으로 잘 알려진 삼풍진인(三豊眞人)을 들먹이며 무병장수(無病長壽)할 수 있는 기 수련법이 있으니 그것을 익히라 권한 것이다.
처음 동악사의 권유에 유원영은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단순한 우스갯소리로 넘겨들었다.
그러나 진지한 표정이 되어 계속 익힐 것을 권하는 동악사의 요구에 어제의 일도 있고 하여 유원영은 더 이상 거절치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한 미안함이 남아 동악사의 청을 수락하게 만든 것이다.
“암, 암, 동생이라면 당연히 이 형의 말을 들어야지. 하하, 잘 생각했네. 자아, 그럼 우선 자세부터 잡아 볼까.”
“……?”
웃으며 던진 말을 뒤로 한 채 요상한 자세를 취해 보인다.
아직은 차갑게만 느껴지는 아침 강바람을 맞으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취한 동악사의 시범에 유원영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모호한 표정이 되어 난감한 눈빛을 드러냈다.
“꼭 그 자세를 취해야만 합니까?”
“꼭 이 자세를 취해야만 하네. 이게 바로 무병장수할 수 있는 선유진경에 그려진 첫 번째 자세이니 말일세.”
“…….”
난처하다.
지금 보이는 동악사의 동작은 괴상하기 짝이 없어 유원영으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신발은 벗어던진 채 발바닥을 서로 마주 보게 해 붙인 것은 둘째 치고 왜 그 발끝을 향해 허리를 숙여 코를 갖다 대야 한단 말인가? 굳이 발 냄새를 맡아야만 무병장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늘…….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라처럼 목을 쭉 빼 머리는 하늘을 향한 덕에 발에 입맞춤하는 신세만은 면했다는 것이다.
보기에도 힘든 자세를 겨우 양손을 이용해 땅을 짚은 덕에 간신히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괴이쩍은 동작을 지켜보면서 유원영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형님께서 절 놀리시는군요.”
“놀리다니? 놀리다니! 정녕 이러긴가? 어제도 아우를 위하는 형의 마음을 몰라주더니 오늘마저 아우가 장수하길 바라는 형의 마음을 이리 무시할 텐가!”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본인도 확신할 수 없는 괴공을 유원영에게 가르치던 동악사는 그의 말에 뜨끔해진 마음을 숨기고자 급흥분해 외치며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관두게 관둬! 배우기 싫으면 그만이지 동생을 위하는 형의 마음을 이리 무시하다니?”
“아닙니다. 무시하다니요?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동작이 너무 괴이쩍어 제가 잠시 잘못 생각한 듯합니다. 형님의 말씀대로 해 보겠습니다.”
토라진 동악사의 마음을 돌리고자 유원영이 어쩔 수 없이 털썩 주저앉아 신발을 벗었다.
승리감에 찬 미소로 바라보던 동악사는 불현듯 생각이 나 급히 입을 열었다.
“이보게, 아우. 단순히 동작만을 취해서는 안 된다네. 동작을 취하며 항시 호흡을 세 번으로 나누어 코로 가슴 깊이 들이키고, 입을 이용해 길게 한 번 내뱉되, 머리 끝 정수리로 호흡한다 생각하게. 또한 이 자세를 유지한 채 호흡하며 머릿속으론 항시 지상기목(地上己目) 심중지기(心中知己)면 언무천자기인(言無天自己認)이란 말을 되뇌어 그 말의 참뜻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네.”
“…….”
‘땅 위의 나를 보고, 내 마음속의 나를 알면, 말이 없어도 하늘이 스스로 나를 알아줄 것이다라……. 알 듯하면서도 모르겠구나.’
알 리가 없다. 가르치는 동악사 역시 천사신공의 첫 번째 단계인 도도통천(道導通天)의 구결(口訣)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기에 더 이상 가르칠 수도 없었던 동악사는 단순한 설명으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선유진경 안에 기재된 천사신공의 교육을 끝냈다.
“그 말의 뜻을 깨닫는다면 자네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걸세.”
“다음이라뇨? 그럼 이 자세 말고 또 있단 말씀이십니까?”
“허허, 내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나. 지금 자네가 취하고 있는 게 첫 번째 자세라고. 헐, 설마 무병장수하는 길이 그리 쉬울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
그저 웃음으로 무마하고 만다.
특별히 무병장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유원영은 단지 자신을 위해 애쓰는 동악사의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
순간 발끝으로 얼굴을 가져가던 유원영의 행동이 그 자신도 모르게 멈추고 만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밀려드는 향기에 불현듯 동작을 멈춘 유원영은 의아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선 동악사를 향해 계면쩍은 미소를 보였다.
“저어……. 발부터 씻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六章. 내가 바로 공갈(恐喝)일세


사기(詐欺)하면 나 공갈(恐喝), 공갈하면 사기라네.
세상만사(世上萬事) 그리 어렵게 살 필요 뭐 있겠는가?
나처럼 설렁설렁 살다 사기 한 번 치는 게지.
바른 말 고운 말, 아 다르고 어 다르니, 행여나 속지 말게.
좋은 얼굴 좋은 말로 사기 치는 여우에게 속느니 대놓고 사기 치는 곰 같은 나 공갈에게 속게나.
마음도 즐겁고 얻는 것도 있으니 차라리 나 공갈에게 속게나.

창천(蒼天) 위로 퍼져 흐르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천해(天海) 속을 떠다니는 한 조각 구름마냥 여유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 여유로운 음색과는 달리 평화롭기만 하던 초원 위로 때아닌 먼지구름이 피어나니, 느긋한 걸음 놀려 목적 없이 떠돌던 사내의 걸음이 절로 멈춘다. 푸른 도포 자락을 한 줄기 바람에 날려 보내며 초원 위로 우뚝 선 젊은 도사(道士)는 게으른 천성을 보여 주듯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기성이 일고 있는 뒤를 돌아보았다.
“허허, 무량수불……. 독하도다. 어찌 저리도 독하고 우둔할 수 있단 말인가?”
지축을 울리며 다가오는 급박한 말발굽 소리와는 달리 그저 느긋하기만 하다.
하나같이 한 손은 말고삐를, 다른 한 손엔 보기에도 섬뜩한 귀두도(鬼頭刀)를 든 흉악한 사내들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젊은 도사는 전혀 위축됨 없이 오히려 그들이 다가오기만을 여유로운 눈빛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젊은 도사의 느긋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를 쫓는 사내들의 눈엔 행여나 도망칠까 싶은 초조함만이 묻어났다. 이윽고 그를 사정거리 안에 포착한 사내들의 입에선 목청이 찢어져라 악에 받친 고성만이 터져 나왔다.
“죽여 버리겠다아아!”

* * *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얼어 죽을 그래서요? 보고 있는 그대로이지!”
“허…….”
타고 왔다는 말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그나마 걸치고 있는 옷마저도 날카로운 검에 베여 곳곳에 살점이 드러나니 민망스런 그들의 모습에 어린 소녀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를 대신해 망연자실하게 초원 위로 주저앉은 스무 명의 사내와 마주한 백의 서생과 차가운 눈빛의 중년 사내는 서로 다른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쯧! 그래 젊은 놈들이 그깟 한 놈에게 묵사발이 나도록 깨졌단 말이냐? 게다가 타고 온 말까지 모두 도둑을 맞아? 끌끌!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형님…….”
생전 처음 보는 이들이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초원 위에 주저앉은 것이 궁금해 말을 걸었던 동악사였으나 그들의 사정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혀를 차고 만다.
그의 말이 좀 과하다 싶었는지 유원영이 얼른 동악사의 말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주저앉은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장한의 입에선 살기 어린 고성이 터져 나온 것이다.
“뭐, 한심? 아니, 근데 이 빌어먹을 놈이 오냐오냐 해 줬더니 어따 대고 계속 반말질이야! 얘들아, 이 겁 없는 놈들한테 우리가 누군지 알려 주어라!”
“예, 형님!”
하나같이 시퍼렇게 날이 선 귀두도를 든 채 일어선다.
장한의 명에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동악사를 포위한 그들이었으나 정작 분란을 조성한 동악사의 입가엔 차디찬 냉소만이 떠올랐다.
“흥! 알려 주긴 뭘 알려 줘. 보나마나 어디 산 하나 잡고 산적질이나 해 대던 놈들이겠지. 쯧쯧! 아우는 잠시 물러나 있게.”
“형님.”
불안하기만 했다.
여유로운 동악사의 태도와는 달리 유원영으로선 건장한 사내들의 손에 들린 칼날을 보면서 불안한 마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걱정 말라는 듯 싱긋 웃어 보인 동악사가 풀밭에서 한 움큼의 풀잎을 뜯어 손에 쥔다.
너무도 자연스런 그의 동작에 사내들이 뭔 짓을 하는가 바라보니 그들의 시선에 화답하듯 동악사가 뽑아 든 풀잎을 허공으로 흩뿌렸다.
촤아악!
순간 모두가 어이없는 눈이 되어 허공 위로 휘날리는 풀잎을 보는 사이 수중의 섭선을 활짝 펼쳐 든 동악사의 오른손이 부채질을 시작한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풀잎을 향해 시작된 동악사의 부채질은 기괴한 움직임을 보이며 일순 강풍(强風)을 일으켰고, 쏟아지는 바람을 이겨 내지 못한 풀잎들이 순간 사방팔방 비산하며 우악스런 사내들의 손에 들린 도신을 향했다.
쩌저저정!
“헉!?”
“……!”
연약한 풀잎들이 향한다 싶은 순간 어느새 다가와 정확히 도(刀) 중심에 부딪치며 기음이 터져 나온다. 연속된 기음(奇音) 속에 너무도 쉽게 도신이 부러져 땅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사내들은 자신들의 손에 들린 도와 단 한 번의 부채질로 그 스무 개의 도를 동시에 부러뜨린 동악사를 경악 어린 눈이 되어 바라봐야만 했다.
“처, 청풍비사(淸風秘死)!”
“……!”
불현듯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한 사내가 냉소 어린 시선을 한 동악사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는다. 그 짧은 울부짖음에 곧 장내에는 두려움에 찬 사내들의 비명만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설마하니 그 유명하신 악선 동대협이신지도 모르고 제가 그만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이 한목숨 불쌍히 여기시어 살려만 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동 대협의 개가 되어서라도 은혜를 갚겠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허…….”
아까부터 계속 똑같은 말뿐이다.
어느새 무릎 꿇고 앉은 우두머리 놈이 이마를 조아린 채 살려 달라 통곡하면 그 뒤에 놈들도 마치 앵무새라도 된 듯 살려 달라는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강호에 처음 자신을 소개한 용운풍룡선(龍雲風龍扇)상의 청풍비사를 알아본 사내들의 반복된 구호에 짜증이 인 동악사는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진한 살기가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확 죽여 버려? 아니지, 아니야. 그럼 동생 때문에 애써 도신만 부러뜨린 내 행동이 무의미해지지 않는가? 제길! 그냥 지나갈 것을 괜스레 말은 걸어서, 쯧!’
후회가 밀려든다. 분명 호기심을 참지 못한 채 먼저 말을 건 것은 자신이었으나 그 행동 자체가 이리 후회가 될 줄은 몰랐던 동악사는 밀려드는 짜증에 두 눈을 부릅떴다.
“이 빌어먹을 놈아! 누가 네놈의 살려 달란 소리를 듣자 했더냐? 대체 왜 그 도사 놈을 쫓았냐는 말이다!”
“그, 그건…….”
무서웠다.
단순한 윽박지름 하나만으로도 동악사에 대한 흉명과 어울려 오금이 저리게 하니 사내는 쉬이 답을 하지 못한 채 더듬더듬 입을 연다.
그 모습이 보기 안타까웠던지 유원영이 두 사내 사이에 끼어들었다.
“형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해할 생각이 없으십니다. 단지 형님께선 여러분들이 이야기하신 도사를 쫓는 이유가 궁금해 묻는 것뿐이니 마음 놓고 얘기하셔도 됩니다.”
“……!”
편안했다.
부드럽게 흘러드는 사내의 말이 마음을 편안케 해 주니 의왕채(義王寨)의 채주 장거이는 한결 안정된 모습이 되어 답을 해 주었다.
“소생은 본시 이 근처 의왕산(義王山)에서 여기 아우들과 더불어 작은 산채를 운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군복을 입은 병사 한 놈이 땀을 뻘뻘 흘리며 우리 산채에 찾아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와서 한다는 말이 평소 존경하던 의왕채의 의적분들을 구해 드리고자 찾아왔으니 어서 빨리 피하라 하더군요. 그자의 말인즉슨 자신이 속한 부대가 이번에 나라의 명을 받고 우리 의왕채를 소탕하기 위해 산 아래 진을 치는 중이니 이 산 전체가 포위되기 전 지금 빨리 몸을 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놈이 입고 있는 옷이 군복인데다 정찰을 보낸 아우 하나가 하는 말이, 아 글쎄 산 아래로 가기도 전에 곳곳에 펄럭이는 군기를 보았다 하니 소인은 정말 군에서 우릴 잡으러 온 줄 알고 산채를 비워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도 갑작스런 일이라 미처 산채에 숨겨 둔 재화(財貨)도 챙기지 못한 채 정신없이 옆 산으로 도망친 것입니다. 아, 한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나라에서 겨우 스무 명밖에 되지 않는 우리를 잡고자 군대를 보낼 리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기에 다시 산채로 돌아가 보니, 아, 글쎄 이 빌어먹을 놈이 그동안 모아 두었던 재화를 어느새 탁탁 털어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도 열 받아서 산 아래로 그놈을 쫓아 내려가니, 아, 글쎄 우리가 자주 이용하는 길목에 군기 세 개만 달랑 꽂혀 나부끼지 뭡니까?”
“크큭! 영악한 놈이로군. 영악할 뿐만 아니라 아주 대담해. 달랑 군기 세 개로 네놈들을 속여 재화를 가로챘단 말이지? 크하하하! 재밌어, 아주 재밌어!”
밀려들던 짜증은 어느새 사라진 채 유쾌한 기분만이 남아 즐거움에 찬 대소를 터뜨린다. 영 언짢아 하는 사내들의 시선 속에서도 큰 목소리로 웃어 젖히던 동악사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다시 한 번 장거이를 바라보았다.
“그놈이 도사라 했느냐?”
“예? 아, 예. 도사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저희가 그놈을 쫓은 지 열흘 만에 잡고 보니 도사행색을 하고 있었습니다.”
“혹, 그놈이 너희들에게 뭔가 남긴 말은 없더냐? 너희가 그놈을 잡기 전에 말이다.”
“이, 있었습니다. 나부끼는 군기에 버젓이 글을 적었습니다. 비록 내게 사기당해 재화는 빼앗겼으나 쉽게 얻은 재물은 쉽게 사라지는 법이니 오늘의 일을 교훈 삼아 앞으로 다신 산적질을 하지 말라 했습니다. 쳇! 그게 말이 됩니까?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욕하는 것도 아니고, 산적을 상대로 사기 친 놈이 그따위 말을 적다니? 내 참 더러워서!”
“더러워할 것 없다. 그놈은 충분히 그런 말할 자격이 있는 놈이니 말이다.”
“……!”
마치 그 젊은 도사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의 말에 산적들은 물론이요, 유원영과 주지약마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나 동악사는 굳이 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 짧은 말과 함께 휙하니 몸을 돌려세웠다.
“쯔쯧! 상대를 알고 덤벼야지, 멍청한 놈들. 그놈 말대로 앞으로 산적질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또다시 그놈에게 사기당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크크크.”
웃으며 몸을 돌린다.
몸을 돌린 채 휘적휘적 앞서 걷기 시작한 동악사의 갑작스런 행동에 유원영과 주지약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를 쫓아야만 했다.
우연한 만남을 뒤로한 채 사라지는 세 남녀의 모습에 초원 위로 남겨진 사내들은 황당한 눈빛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냐?”
“그, 글쎄요.”
힘 빠진 물음에 허무한 답만이 장내를 떠돈다.
폭풍 같은 여파가 지난 후, 또다시 찾아온 한차례 폭풍이 끝나고 남겨진 고요 속에서 사내들은 그저 허무한 눈빛이 되어 힘없이 부러진 도신만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