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0화

五章. 무공입문(武功入門)?


하북성(河北省)과 통하는 관도 위로 향긋한 풀 냄새가 배어 있다.
녹빛 풀잎 위로 감도는 향기를 한 줌 바람이 어루만지니, 솔솔 불어오는 바람의 향기 속에 묻혀 관도 위를 나아가는 사내의 입가론 절로 기분 좋은 미소가 그려진다.
그러나 사내의 입가로 걸린 미소와는 달리 그 옆에서 나란히 어깨를 마주한 채 동행하는 중년 사내의 눈으론 험악한 빛이 떠올랐다.
“아니, 그럼 뭔가? 결국 돈 때문에 과거에 낙방을 했다는 게야? 이런 우라질 놈들을 보았나? 감히 내 동생을 고작 돈 때문에 낙방을 시켜? 그곳이 어딘가? 아니, 그 낙방시켰다는 놈들이 누군가? 내 이놈들을 당장!”
“…….”
마치 제 자신의 일인 양 얼굴 가득 붉은 빛을 띤 채 열을 내는 동악사의 모습이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고맙게 느껴진다. 지금 그가 과거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는 진정으로 화가 나 이리 소리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변덕이 일어 날 의제로 삼겠단 결정이 바뀔지 모른다 걱정했건만, 이제 보니 쓸데없는 기우였구나.’
비록 동악사와 의형제의 연을 맺긴 했으나 연을 맺으면서도 진정을 다 주지 못했던 유원영이다. 그로선 동악사의 변덕스런 마음이 언제 뒤집힐지 몰라 그 점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대하는 동악사의 행동에는 결코 거짓이란 없었으며 오직 진심만이 느껴지니 오히려 그를 진정으로 대하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부끄러움이 인다.
상대는 자신을 동생으로 대하건만 자신은 그를 형으로 대하지 못하였으니 유원영은 미안한 마음에 나아가던 걸음을 멈춘 채 동악사를 향해 허리를 숙여 보였다.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소제, 형님의 이야길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허허, 이 사람 갑자기 왜 이러나? 그깟 몇 마디 말에 이리 허리 숙여 고마워하니 내가 다 당황스럽지 않나?”
동악사답지 않게 쑥스러워하며 멋쩍은 웃음을 흘린다. 그러나 두 눈에는 흐뭇함이 깃든 채 유원영을 바라보았다.
유원영 역시 고개를 들다 그의 눈과 마주치고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었구나. 내가 진심이 아니었음을 형님께선 처음부터 알고 있었구나.’
살아온 세월부터가 다르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에서 그 사람의 거짓과 진실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의 세월을 살아온 동악사는 유원영의 생각대로 처음부터 그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대놓고 탓하기보단 우선 자신의 진정을 보여 주기로 결심한 동악사였다. 그리고 그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 주듯 유원영이 이리 진정이 되어 자신을 대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이럴 게 아니라 어서 그놈들을 찾아가세. 내 그놈들의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아니, 아니지. 동생은 사람들을 해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니, 그래 그놈의 돈을 내가 주겠네. 얼마가 되었든 이 형만 믿게나. 까짓 푼돈쯤이야 내 얼마든지 내줄 수 있으니 동생은 어서 나와 함께 그들을 찾아가세나!”
“아닙니다. 논어에서 이르길 방유도곡(邦有道穀)하되 방무도곡(邦無道穀)이 치야(恥也)라 하였습니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녹을 먹겠으나, 나라에 도가 없음에도 녹을 먹는 것은 수치일지니. 어찌 소제가 지금의 궁에 입관해 녹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자네…….”
실망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스산한 가을바람만큼이나 처연히 흘러나오는 유원영의 대답 속엔 이번 과거를 통해 그가 얼마나 큰 실망감을 맛보았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또한 두 눈엔 더 이상 조정에 출사하고픈 마음이 없음을 확고히 보여 주듯 고집스런 눈빛을 발하니, 그 눈을 바라보는 동악사의 마음마저 아프게 한다.
살아온 생 거의 전부를 과거에 출사하겠단 꿈을 안고 학문에만 매진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 학문이 더 이상 쓸모없게 되었으니 마음속의 고통은 또 얼마나 클 것인가?
‘괜한 말을 꺼냈구나. 괜한 말을 꺼내 들었어…….’
괜스레 잊고 있던 마음속 고통을 끄집어낸 듯해 미안함이 인다. 그 미안함이 입을 굳게 다물게 하고 장내로 어색한 기운이 감돌게 만들었다.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동악사를 대신해 그동안 조용히 두 사내를 지켜보던 주지약이 화제를 돌렸다.
“업어 줘요.”
“……?”
“엥? 요 꼬맹이가 갑자기 뭔 소리냐? 네년의 튼튼한 두 다리는 두었다 뭐하고 왜 내 동생이 널 업어야 한단 말이냐?”
갑작스런 주지약의 요청에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유원영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며 두 팔을 활짝 벌린 주지약의 요청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웃으며 그녀의 뜻대로 자신의 등을 내주었다.
그러나 동악사는 아무 망설임 없이 마음 아픈 동생의 등을 타고 올라가는 주지약이 영 못마땅한지 분위기와 상관없이 철없는 행동을 보이는 그녀를 향해 계속해 불만을 토해 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했건만 아홉 살이나 먹은 계집년이 그리 덥석 사내의 등에 옮겨 타다니? 흥! 네년은 부끄러움도 모른단 말이냐? 요 어린것이 아주 그냥 얼굴에 철판을 깔았구나.”
“형님…….”
대놓고 불만을 토하는 동악사의 언행에 오히려 무안해진 유원영이 그를 불러 자신은 괜찮다는 뜻을 넌지시 내비친다.
한편 편한 자세로 유원영의 등에 업힌 주지약은 동악사가 뭐라 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자신을 업은 사내의 귓가로 연분홍빛 입술을 가져간 채 자그마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왜 그러느냐?”
“길은 하나인데 그저 걸어가는 방법만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
향긋한 단향과 함께 흘러든 소녀의 말이 충격으로 다가온다. 비록 단순한 말 같으나 그 말속에 담긴 뜻이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길은 하나인데 그 길을 나아가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옳구나, 옳아. 어찌 길을 나아가는 방법이 하나뿐이겠는가? 이 아이처럼 누군가에게 업혀 갈 수도 또 마차를 이용하거나 말을 타고 갈 수도 있다. 지금 이 아이가 내게 굳이 업혀 하고자 하는 말은 내 인생을 나아가는 방법이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함이로구나. 기특하도다, 기특해. 정말로 영특한 아이가 아닌가? 이 아이의 말대로, 내 비록 과거를 접었으나 그렇다고 그것에 너무 연연해 할 필요도 없다. 조정에 출사하는 길만이 내 인생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거늘……. 내 어찌 스스로 내뱉은 말과는 달리 아직도 과거에 대한 미련이 남아 이리 가슴 아파했단 말인가? 그래, 찾자. 내 인생을 살아갈 다른 방법을 찾자. 더 이상 과거에 미련 말고 이 아이의 말대로 내 인생을 나아갈 다른 방법을 찾는 것만 생각하자. 언젠가 장 의원에게 이야기했듯 내 스스로의 노력으로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하하! 하하하!”
넓고 푸른 하늘을 보며 한바탕 웃고 만다.
주지약을 등에 업은 채 유원영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니 그제야 동악사 역시 무언가를 깨달은 듯 새삼스런 눈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 주지약을 바라보았다.
[요 어린 여우 같은 것. 옛말에 이르기를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중 하나는 반드시 내 스승될 자가 있다 하더니만 이제 보니 어린 여우 네년이 우리들의 스승이로구나!]
“……!”
육성이 아닌 전음(傳音)을 보낸다.
웃고 있는 유원영의 기분을 망치기 싫은 동악사가 전음을 보내 주지약을 칭찬했다.
하나 그녀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전음성에 살짝 놀람의 빛을 두 눈에 띠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무심한 눈빛으로 돌아온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는 유원영의 등에 슬며시 얼굴을 기댄 채 그의 마음만큼이나 편안한 한 줄기 미소를 그려 보였다.

* * *

탄복강정난 장음야망시 坦腹江亭暖 長吟野望時
수류심불경 운재의구지 水流心不競 雲在意具遲
적적춘장만 흔흔물자사 寂寂春將晩 欣欣物自私
고림귀미득 배민강재시 故林歸未得 排悶强裁詩

포근한 강가 정자에 편히 누워, 시를 길게 읊으며 들판 내려다 보니.
물은 흘러도 마음은 초조하지 않고, 하늘의 구름 따라 유연하도다.
봄은 소리 없이 가고자 하나, 만물은 제물에 흥겨워 살거늘.
고향에 아직 돌아갈 수 없는 나, 시름 쫓고자 애써 시를 짓노라.

“…….”
당(唐)의 시인 두보의 강정(江亭)이란 시이다.
시성(詩聖)이라고까지 불렸던 두보의 시가 지금 오랜 세월을 지나 한 사내의 입에서 맑은 목소리와 함께 흘러 퍼지니 듣는 이들의 마음마저 여유롭게 해 준다.
시원스레 흘러가는 강줄기를 정자 난간 위에 앉아 바라보며 마음이 가는 대로 두보의 시를 읊어 보인 유원영은 화답하듯 불어오는 강바람에 한여름의 열기와 더불어 한 줄기 미소를 띄워 보냈다.
‘좋구나…….’
좋았다.
지금 자신이 읊은 시의 뜻대로 이리 강가 정자에 앉아 자연 속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니 이때만큼은 하늘에 뜬 구름과 더불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유연한 심정이 되어 조금의 초조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고향에 못 가는 번민이 일어 이리 시를 지어 수심을 풀고자 했던 두보의 심정과 자신의 마음이 같다는 것이다.
아픔은 사라졌다.
과거에 낙방한 아픔은 저기 저 정자 그늘 아래에 누워 곤한 단잠에 빠져든 소녀의 말 한마디에 의해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마음속 아픔이 사라졌다고 장남인 자신의 성공만을 바라보며 고생해야 했던 가족에 대한 미안함마저 사라질 수 있겠는가? 그 미안함이 이리 두보의 시를 통해 흘러나오니 맑은 강물 속으론 언제나 걱정 말라며 웃어 주던 아비의 얼굴이 절로 떠올라 잠시나마 즐거웠던 유원영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래, 이대로 집에 돌아간들 내 어찌 아버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겠는가? 못난 자식의 성공만을 바라셨던 아버님의 꿈을 이뤄 드리기 위해서라도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순 없는 일. 차라리 지약이를 천음산에 데려다 준 후 집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내 길을 나아갈 방법을 찾자. 그 방법을 찾아 이번에야말로 성공하여 떳떳한 모습이 되어 고향 땅을 찾아가 아버님을 뵙도록 하자.’
하나의 결의를 다지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러나 그 결의를 실행키 위해선 우선 자신이 성공할 일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으니 가벼워지던 마음이 또다시 무거워진다.
생각해 보면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빼고는 달리 재주가 없었던 유원영은 자신이 다짐했던 힘을 얻기 위한 마땅한 일거리를 떠올리지 못한 채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음? 이보게 아우. 어찌 그리 한숨을 내쉬는가?”
“……?”
한 줄기 바람이 인다 싶은 순간 어느새 정자 난간 위에 동악사가 나타났다.
유원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정자 안에는 잠이든 주지약과 자신만이 자리해 있었거늘 동악사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정자 안으로 흘러 들어와 난간 위에 자리한 것이다.
“…….”
“이보게, 아우?”
그러고 보니 양손에는 어디서 잡았는지 모를 토끼 두 마리를 든 채였다.
위태로운 모습으로 난간 위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묻는 동악사의 모습에 유원영은 잠시 대꾸할 말을 잊는다.
유원영이 아무 답이 없자 동악사는 걱정됐던지 식사 거리로 잡아 왔던 토끼를 내던지며 얼른 유원영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흠……. 열은 없는 것으로 보니 아픈 것 같지도 않고……. 허, 답답해 죽겠네그려. 말 좀 해 보게나. 대체 왜 한숨을 쉬었느냔 말일세? 혹, 뭔가 걱정거리라도 있는 겐가?”
“…….”
동악사의 두 눈엔 말 없는 그에 대한 걱정이 묻어 있다.
그러나 동악사에게 자신의 걱정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던 유원영은 담담한 웃음과 더불어 화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형님께서 이 부족한 아우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허허, 고생이라 할 게 뭐 있겠나? 자네가 나를 위해 저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준다는 것을 내 극구 사양하고 내가 자네에게 맛 좋은 토끼 구이를 먹여 주겠다 자청해서 나갔던 일이 아닌가? 그러니 너무 고마워할 것 없네. 까짓 토끼 한 마리쯤 잡는 것은 일도……. 아니, 아니지. 이게 아니지! 이보게 아우. 어찌 내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리는 겐가? 자네 정말 이러긴가? 분명 뭔가 고민이 있어 한숨을 내쉬었음이 확실하거늘 이 형을 믿지 못한 채 그것을 말해 주지 않고 화제를 돌리다니? 흥! 자네는 여전히 날 형으로 생각지 않는 것이로군.”
“……!”
유원영이 고마워하자 동악사는 너무도 자연스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줄 뻔했다. 그러나 뒤늦게 유원영이 화제를 돌리고자 했음을 안 동악사는 이내 뿔난 눈이 되어 홱하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뜻과는 달리 동악사가 오해하자 당황한 유원영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제는 단지 제 걱정거리 때문에 형님께서 마음 쓰실까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던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제 행동이 형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듯하니 아무래도 소제가 잘못 생각한 듯합니다. 실은…….”
“으음…….”
사과와 더불어 흘러나오는 유원영의 고민이 동악사를 귀 기울이게 만든다.
얼마 후 그의 고민을 모두 듣고 난 동악사는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입과 함께 두 눈마저 닫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들 뿐이다.
그런 그를 방해치 않기 위해 유원영마저 입을 굳게 잠그니 붉은 저녁노을이 비쳐 들기 시작한 정자 위로는 고즈넉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렇게 흐르는 강물과 같이 시간이 지나고…….
“그렇지! 하하! 내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꼬? 답은 가까이 있거늘 멀리 돌아가려 했으니 나도 참으로 멍청하구나. 껄껄!”
“……?”
문득 감은 두 눈을 번쩍 뜬 동악사가 느닷없이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잠들어 있던 주지약마저 눈뜨게 했다.
동악사는 어리둥절해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원영의 양어깨를 힘껏 부여잡았다.
“이보게 아우. 자네가 원하는 성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제 스스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 힘이 무엇이 되었든 갖추어진다면 자연 부와 명예는 따라올 것이며 또한 그 힘을 바탕으로 제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서 결코 손해 또한 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소제는 그 힘을 얻기 위한 방법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껄껄! 걱정 말게나. 이 형이 찾아냈으니 말일세!”
“……!”
한껏 웃으며 던져진 동악사의 말에 유원영의 두 눈으로 한 가닥 기대의 빛이 어린다.
그 기대에 대해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듯 동악사는 힘주어 그가 기다리는 답을 전해 주었다.
“무공(武功)을 익히게. 무사(武士)가 되어 붓이 아닌 자네 허리에 찬 검(劍)을 쥐게나.”
“……!”
붓이 아닌 검을 쥐라 말하고 있다.
무사가 되어 검을 잡으라는 동악사의 말에 유원영의 몸은 일순 굳어 들고, 주지약은 흥미로운 눈이 되어 두 사내를 지켜보았다.
‘붓이 아닌 검이라…….’
어째서일까?
동악사의 말에서 그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얄궂구나.’
여전히 웃고만 있다.
허리춤에 찬 검을 매만지는 유원영의 머릿속으론 여전히 활짝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선 한 소년의 얼굴이 떠올라 그의 두 눈 속으로 쓸쓸한 빛이 머물게 만든다.
그것은 슬픔이리라.
잊고 싶었던 과거에 대한…….
“어째서입니까?”
“…….”
잠시 생각하던 유원영이 진중한 얼굴이 되어 동악사를 바라보았다.
굳어 든 그의 눈빛에서 뭔가 알지 못할 묘한 느낌을 전해 받은 동악사였으나 별생각 없이 입을 열어 답을 주었다.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힘을 필요로 한다고. 그렇다면 무공만 한 것이 없네. 물론 무공을 익힘에 자질이 중요하나 그렇다고 익히는 자의 노력을 자질이 앞지를 순 없다네. 지금 동생의 나이가 열여덟이나 되어 몸은 이미 굳어 무공을 익힘에 무리가 있음을 알지만 굳은 몸이야 내가 풀어 주면 되고, 또 자네가 익힐 무공 역시 상승의 것으로 내가 가르쳐 주면 되지. 자네는 그저 내가 가르쳐 주는 걸 배우기만 하면 된다네. 배움에 있어 자네가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냐에 따라 길게는 십 년 후, 짧게는 십 년 안에 크나 큰 성취를 맛볼 수 있을 걸세.”
“…….”
부족한 것은 채워 주면 된다.
자신이 누구이던가? 세외무림의 정점에 선 이가 바로 동악사 자신이었던 것이다.
굳은 뼈마디야 한 번 만져 주면 되는 것이고, 부족한 내력이야 소림 비전의 대환단(大還丹)을 훔쳐서라도 채워 주면 그만이다. 그리고 무공을 익힐 수 있는 모든 것이 준비된 연후에 그 자신이 알고 있는 상승의 무공을 가르친다면 유원영은 틀림없이 크나 큰 성취를 볼 터였다.
“자네가 하나의 경지에 오른 후 그 힘으로 무관(武館)을 차려 문도(門徒)를 받아들이든 아니면 호위무사(護衛武士)로서 일하든 내 관여치 않겠네. 내가 관여치 않더라도 그때가 되면 자네가 무사로서 무슨 일을 하던 성공할 게 틀림없으니 말일세. 뭐 그때 가서 내게 술 한 잔 산다면야, 후훗!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지만 말일세.”
“…….”
벌써부터 먼 미래에 자신과 더불어 무림 정상에 우뚝 설 동생의 모습이 기대되는지 즐거움에 찬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즐거운 동악사의 마음과 달리 유원영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지더니 끝내 고개를 꺾어 사과의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형님의 말씀은 고마우나 그 뜻을 받아들일 순 없습니다.”
“엥? 그 무슨 말인가? 받아들일 수 없다니……. 물론 무공을 익힘에 있어 지금껏 책상머리에 앉아 글공부만 하던 자네의 육신이 힘들 거라는 건 아네. 하나 육체가 힘든 건 고작 몇 년일 뿐이고, 일단 익숙해지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육신이 힘들까 도망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전……. 죄송합니다.”
“……?”
무언가 말을 할 듯하다 결국 죄송하단 말 한마디만을 남긴 채 몸을 돌린다. 무겁게 가라앉은 어깨 만큼이나 힘겨운 발걸음을 떼어 정자 밖 강변 위로 사라지려는 유원영의 모습에 동악사가 무어라 소리치려 하나 어느새 다가온 주지약이 그의 행동을 급히 막아 세웠다.
“……!”
“잠시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이건 또 뭔 소린가?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라니.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며 던진 주지약의 말을 곱씹던 동악사는 불현듯 무언가 느껴지는 바가 있어 자신도 모르게 저만치 붉은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사내의 등을 바라보았다.
‘허허…….’
슬퍼 보인다.
허리 부근까지 자란 억새풀 사이로 사라지는 사내의 등은 한없이 외롭고, 한없이 슬퍼 보여 동악사의 마음마저 애달프게 했다.

* * *

스스슥…….
흔들리는 갈대 위로 몸을 눕혀 본다.
귓가로 전해지는 강물의 흐름을 뒤로한 채 드러누운 유원영은 가만히 허리춤의 검을 풀어 붉은 핏빛 속에 잠긴 하늘을 향해 들어 보았다.
처음 병든 부인의 손에서 검을 받아들 때만 해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부인이 전한 말대로 뽑히지 않는 검은 단지 무용지물(無用之物)인 장식용일 뿐이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받아들였을 뿐이다. 처음부터 뽑을 생각이 없었기에 부인이 전해 준 서책 역시 단지 가슴속에 품은 채 이제껏 단 한 번도 펼쳐 본 적이 없다.
검과 그 검을 쓰는 법이 적혀 있을 것이 확실한 고서(古書).
그 두 가지를 아마 평생 펼쳐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절대!’
검과 함께 어우러진 붉은 노을 속에서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을 동악사의 말로 인해 떠올린 유원영은 가슴 깊은 곳에 감추어 두었던 슬픔을 애써 참아 내며 두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손에 쥔 검도 핏빛 하늘도 보기 싫었던 그가 눈을 감자 자연 들어 올려졌던 팔은 대지 위로 내려앉고 귓속으론 찾아든 어둠과 함께 정적만이 감돌았다.

타닥.
뜨거운 불길 속에 모든 것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지옥(地獄)의 겁화(劫火)마냥 사그라질 줄 모르는 불길 속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날아오는 검날을 피해 정신없이 도망치며 겁먹은 비명을 내지른다. 살려 달라 외치는 그들의 비명 소리에도 불구하고 다가온 검은 차디찬 검광을 내뿜으며 붉은 피를 뜨거운 불길 속으로 내던질 뿐이다.
촤아아!
그렇게 하나가 죽고 또다시 하나가 죽는다.
죽어 가는 이들 사이에선 수많은 검들이 그저 웃으며 춤을 출 뿐.
그 춤을 더러운 오물 속에 몸을 숨긴 채 숨죽여 지켜보는 아이의 얼굴엔 더 이상 웃음꽃이 피어나지 않고 있다.
언제나 밝은 웃음을 보이던 아이다. 또한 언제나 자신감에 찬 행동으로 동네 아이들을 이끌어 주던 아이다.
그런 그를 이기고 싶었다. 그를 이기고 싶어 그가 붓을 쥔다 했을 때 자신 역시 손에 붓을 쥐었다. 그리고 그가 장차 과거에 합격해 관리가 되는 것이 꿈이라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자신 역시 그 꿈을 가졌다.
그러나…….
그 아이는 더 이상 웃지도 더 이상 자신감에 찬 눈빛도 내보이지 않고 있다.
값비싼 비단옷이 더러운 오물에 더럽혀지는 것도 모른 채 그저 두려움에 몸을 떨며 울고 있을 뿐이다. 철컥철컥 소리 내며 움직이는 은빛 갑주 속에 광기(狂氣)를 담은 이들의 검이 식솔들을 죽여 나가는 것을 숨죽여 바라보며…….

“……!”
짧은 악몽(惡夢) 속에서 깨어나 두 눈을 뜬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갈대밭에 누워 무거워진 두 눈을 감았을 뿐이다.
그러나 악몽 속에서 깨어나 눈을 뜨니 어느새 하늘은 시커멓게 변해 있고, 구름 사이로 수줍은 듯 빠끔히 고개를 내민 달만이 빛을 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달빛을 의지해 몸을 일으켜 세운 유원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을 옷소매로 훔친 후 아직 손에 쥐어진 검을 쓸쓸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넌 단지 사람을 죽이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무공은 단지 사람을 죽이는 너를 좀 더 잘 움직이는 법을 가르쳐 줄 뿐.’
정의(定義).
그것이 검에 대한 유원영의 정의였다.
그 정의가 바뀌지 않는 한 검집에 꽂힌 검을 스스로 뽑아 들 날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