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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끔(Glimpse) 3화
3. 새터(1)


웅성웅성. 시끄럽고 분주하다.
새터에 대한 인상은 그랬다.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서 줄을 맞추고, 누군가를 호명하고, 선배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녔다.
나는 기계과라고 적힌 팻말이 세워진 곳 구석에 앉아 인원 점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기계과는 남자가 많다더니, 정말이었다. 전부 남자밖에 없었다. 여자애들이…… 없나? 설마? 여태 남녀 공학만 다녀봐서 이런 분위기가 좀 낯설었다. 진짜 남학교 온 것 같네.
추운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덕에 엉덩이가 배겨 올 때쯤, 선배 한 명이 소리쳤다. 그 선배도 남자였다. 목소리가 몹시 우렁우렁했다.
“인원수는 맞으니까 이제 학번 가르쳐 주겠습니다. 호명하는 순서대로 이 앞에 서세요. 앞으로 졸업할 때까지 쓸 학번이니까 기억해 두세요.”
그러고는 한 명씩 호명했다. 나는 거의 맨 앞에 이름이 불렸다. 네 번째쯤? 두 명씩 짝지어 앉혔는데, 세 번째 불린 녀석은 성격이 무척 서글서글해 보였다.
“야, 나는 이철호야. 춘천에서 왔어.”
“나는 박건형이고 서울.”
“올, 서울 사람. 그럼 통학하냐?”
“어.”
“넌 통학 몇 시간 정도 걸려? 서울 애들도 재수 없으면 두 시간 지하철 타고 다니던데. 근데 집이 서울이니까 부모님이 통학 안 시켜 주고, 막.”
“버스로 40분쯤 걸려.”
“근데 나도 통학한다? ITX 타고 다닐 건데 그래도 두 시간 전엔 출발해야 돼. 집에서 역까지 가는 버스가 애매해서. 오늘도 완전 해 뜨기 전부터 준비했잖아.”
춘천이면 꽤 멀지 않나? 한두 번밖에 가 본 적 없는 곳이라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교외로 나갈 때 한참 차를 타고 가야 했던 게 기억났다. 거기다 서울이 아닌데 통학이라니. 불편할 것 같은데……. 이해가 안 됐다.
이걸 물어봐도 되나, 물어보면 기분 나쁠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철호가 씨익 웃었다.
“일단 몇 주 다녀 보고 정할라고. 사실 아직 하숙방을 못 구해서. 추추추추추합이거든. 아마 내가 여기 문 닫고 들어왔을걸? 사실 여기 안 된 줄 알고 다른 학교 신입생 환영회까지 다녀왔다?”
이철호는 성격이 엄청 까불까불했다. 나는 녀석의 높은 텐션을 따라가지 못하고 몇 번이나 말문이 막혔다. 날 재미없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도 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걱정은 금방 사라졌다. 그냥 혼자 떠드는 걸 좋아하는 애였다.
공대는 각 과마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학번 체크를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근데 여기 기계는 여자 진짜 없다. 총 인원이 150명쯤 될 텐데 그중에 열 명은 되려나? 나 지난번에 간 데도 기계였거든. 그래도 거긴 이렇게까진 없지 않았는데.”
이철호의 말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줄 세워 앉혀 두자 안 보였던 여자애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여자가 있긴 있었구나. 그래도 엄청 적었다.
그렇다고 내가 중·고등학교 때 여자애들이랑 친하게 지냈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없으니까 기분이 이상해 가지고.
학교 광장에 우글우글 모여 앉은 다른 과 사람들도 구경했다. 우리 주변도 다 공과였는데, 기계과에만 유독 여자가 없어 보였다. 이철호도 그렇게 느꼈는지 투덜거렸다.
“전기전자도 여자 없기로 소문난 관데 저기는 그래도 별로 안 적어 보이는데? 서른 명은 넘을 것 같다. 아씨, 우리 과는 왜 이렇게 여자가 적은 거야? CC 해 보고 싶었는데.”
“그러게.”
이철호의 말에 대강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전자과를 구경했다. 기계과보다는 전자과가 인원이 좀 더 많아 보였다. 그룹을 대여섯 무더기쯤으로 나눴으니까.
‘저기 어디쯤에 강수현이 있으려나?’
부모님 말씀이 맞았다. 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으려니 자연히 강수현이 떠올랐다. 별로 안 친해도 동향은 동향이라고, 좀 더 익숙한 사람을 찾게 된다.
“어. 저기 있다.”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으로 덮인 익숙한 머리통이 보였다. 굉장히 멀리 있어서 바로 옆에 있는 과였는데도 못 찾았나 보다.
강수현은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색함 없이 어울려 웃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무리의 중심이 되어서 대화를 이끄는 게 보였다. 벌써부터 몇 없는 여자애들이 강수현을 힐끔힐끔하면서 속닥거렸다. 색다른 광경도 아니었다.
날이 추워서 그런가, 푸른색 야상을 입고 왔는데 잘 어울렸다. 수능 때랑 졸업식 때 했었던 목도리도 둘렀다. 아침 내내 찬바람을 맞은 탓인지 드러난 귀가 빨갰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계속 손을 쓱쓱 비비고 귀를 문지르길 반복한다. 추위를 좀 타는 편인가 보다.
옆자리 앉은 여자애가 보기에도 추워 보였는지 제 장갑을 줄까, 하고 묻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강수현은 손을 가로저으며 불쑥 내밀어진 장갑을 부드럽게 밀어 냈다. 뭐라는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괜찮다고 거절하는 것 같다. 자기 성의가 거절당했으니 기분 나쁠 법한데도 여자애는 실없이 방싯거리면서 웃었다.
하긴, 강수현은 이런 걸 거절하는 덴 도가 텄을 테니까. 거기다 무슨 말을 해도 기분 나쁘지 않게, 유하게 대화를 풀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강수현은 귀를 쓱쓱 문지르다 결국 털 달린 야상 모자를 뒤집어썼다. 커다란 모자에 머리가 푹 가려져 얼굴 표정이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조금, 아쉬웠다.



30분 정도 더 기다리고 나서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아까 둘씩 짝을 지어 준 대로 앉았다. 이철호는 교외로 나가기 직전까지 신나서 떠들다가 하품을 하더니 이내 잠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춘천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옆에서 푸우푸우, 하고 잠자는 소리를 듣다 보니 나도 졸렸다. 추운 곳에 내리 있다가 몸이 녹으니까 슬슬 졸렸다.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낀 후 휴대폰 재생 목록을 켜고 좋아하는 노래를 틀었다. 노래 한 곡이 끝나기도 전에 잠들었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산 한가운데였다. 여기가 어디라고 했더라……. 강원도 어드메 수련원이라고 했던 것 같다. 사실 별로 가고 싶지 않아서 장소도 자세히 안 살폈다.
이철호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겁을 줬다.
“야, 그거 아냐? 이렇게 산속에서 새터를 하는 이유. 밖에 나가지 말고 술만 겁나게 처먹일 거란 뜻이래.”
거기다가 공대, 기계과 사람들은 지독할 정도의 알코올 중독자들밖에 없다고 수군거렸다. 막 소주를 궤짝째로 두고 먹는다고 과장을 했다. 한 사람당 한 궤짝이라고, 백 명이 오면 2백 궤짝을 시킨다고 과장했다. 새터는 이틀이니까 총 두 궤짝씩 백 명 해서 총 2백 궤짝.
“설마.”
“진짜라니까? 나 지난번에 갔던 데는 복도에 소주 궤짝이 내 키보다 높이 쫙 쌓여 있었어.”
‘거짓말……..’
……이라고 하려는 순간 버스 뒤로 따라온 트럭에서 소주 궤짝이 끝도 없이 내려오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트럭은 한 대도 아니었다.
과장은 조금 섞여 있을지언정 뻥은 아니었구나. 이철호는 “맞지?” 하며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근데 너 술 마셔 봤냐?”
“어…… 아니.”
“헐. 정말? 진짜?”
지인짜? 이철호가 반쯤 뒤집힌 목소리로 물었다.
“지인짜 수능 끝나고 한 번도 안 마셨어? 너도 추추추추추합 걸려서 재수 준비 했어? 재수준비 해도 학원 들어가기 전에 눈물의 술잔은 돌리지 않냐?”
“아니, 그건 아닌데…….”
꼭 술을 마셔야 하나? 아빠는 술 마실 때마다 한 번씩 마셔 보라고 권해 줬는데, 한 모금 입에 대면 역한 향이 올라왔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굳이 맛없는 걸 선생님 눈을 피해서 힘들여 먹을 필요가 있나 싶어 수학여행 때조차 술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나랑 어울리던 애들도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벌일 만한 대담한 녀석이 없었다.
“우와, 진짜 대단. 친구들이랑 수능 끝나곤 뭐 했어?”
“그냥 애들이랑 피시방 가고 영화 보고 그랬는데.”
“그럼 술 한번 안 먹어 보고 새터 온 거야? 너 주량도 모르겠네?”
그깟 술 좀 마셔 본 게 무슨 대수라고 이철호는 어른 흉내를 냈다. 그러면서 술은 첫 잔은 원샷을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좀 꼰대 같은 선배들한테 찍히니까 처음엔 안 빼는 척해야 한단다. 그리고 물을 많이 마시는 게 좋다, 좀 덜 취하고 화장실도 자주 가고 싶으니까 술도 덜 마실 수 있다, 등등의 말을 해 줬다.
……별로 안 궁금했지만, 꽤 그럴싸해서 나도 모르게 귀담아듣게 됐다. 얘는 새터 유경험자니까 믿을 만하겠지.

과대 선배가 학번순으로 방을 나눠 주고 짐을 풀게 시켰다. 점심을 먹고는 오리엔테이션 시간을 가졌다. 오후 시간은 학교에서 주관했다. 우리 학교가 어떤 학굔지, 어떤 과가 있는지 프레젠테이션도 하고 간단한 게임도 했다.
단과대에 있는 소모임 홍보도 했다. 밴드부도 있었고, 댄스부도, 문선패도, 풍물부도, 천체관측 동아리, 사진부, 무슨 무슨 수많은 학회 등등. 무지하게 많았다.
멍하니 바닥에 앉아 설명을 듣고, 그 뒤엔 따로 60명씩 모아 조를 짠 후 그중 반 대표를 뽑고 이것저것을 정했다. 공과대 중에서 기계나 전기과는 유독 정원이 많아서 A반, B반 이렇게 같은 과 안에서도 반을 가른다고 했다. 나는 기계 A반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학생회가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학생회 선배들이 나와 자기소개를 하고, 새로 뽑힌 신입생 대표들도 얼떨떨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강수현도 있을까 궁금해서 구경했는데, 기계와 전기전자는 인원이 많아서인지 따로 갈라서 OT를 하는 것 같았다.
강수현은 전교 부회장도 해 봤는데, 반 대표 같은 것도 됐으려나? 괜히 궁금했다.

지루한 일정이 모두 끝난 후엔 뒤풀이가 있었다.
“야, 지금부터가 진국이야. 긴장해라. 크크.”
이철호는 엄청 신난 표정으로 몸을 들썩거렸다. 긴장하라면서 흥분을 주체하질 못했다. 내가 보기에 이철호는 노는 걸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았다.
뒤풀이 장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고학번 선배들이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새터를 주관하는 선배의 얼굴에 잠깐 골치 아픈 듯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 형들. 오셨어요.”
“이번 새터 담당 너냐? 고생이 많네. 우리는 얌전히 술만 마시다 갈게.”
“술 좀 아껴 먹어요. 이번엔 술 먹고 사고 치지 말라고 해서 조금밖에 못 샀단 말이에요.”
……복도에 만리장성처럼 쌓여 있는 술 박스가 적은 거라고?
“부족하면 우리가 돈 모아서 사다 줄게. 학기 초에 재력 뽐내려고 방학 내내 고액 과외 좀 뛰었다.”
“아! 선배님, 그런 건 진작 말씀을 하시지. 근데 양주도 있어요?”
새터 진행하는 선배가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사람이 한순간에 이렇게 바뀌는 건 처음 봐서 신기했다. 저런 게 사회생활인가.
감탄하는 사이 나이 많은 불청객 앞에서 순진하게 웃던 선배는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돈했다.
“저기부터 벽에 등 대고 둥글게 앉아. 그럼 아마 거의 다 앉을 수 있을 거다. 여기 방 신입생 인원 서른 명 맞지?”
우리는 우물쭈물 커다란 방에 몸을 구겨 넣었다. 죄다 덩치 큰 녀석들뿐이라 갑갑했다. 우리 방에는 여자애들이 두 명 있었는데 굉장히 불편한 낌새였다. 둘이 같이 손을 꼭 붙들어 잡고 속닥이고 있었다. 함께 지낸 지 하루도 안 됐는데 벌써 전우애라도 생긴 것처럼.
하긴, 내가 여자였어도 남자만 우글거리는 곳에 있는 게 되게 불편했을 거다.
“여자애들 옆에 앉고 싶었는데.”
……이런 애들이 널리고 널렸으니까. 이철호가 옆에 붙어서 꿍얼거렸다.
이철호 또한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나와 지내 놓고 한 10년은 안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굴었다. 신기한 녀석이다. 벌써 선배 몇 명이랑도 친해졌다. 계속 같이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대체 언제 이름을 튼 거지?
“야야. 건형아, 아까 선배들한테 들었는데.”
“선배들이랑은 언제 친해졌어?”
“어. 아까 화장실에서 오줌 싸다가.”
“…….”
정말 대단하다. 강수현보다 더 사교성이 좋은 것 같다.
“아무튼 아까 선배들이 그랬는데 처음에 시작할 때 막 에프엠? 이런 걸 시킨대. 그런데 안경 쓰고 마른 선배가 방에 와 있으면 완전 죽는 거래. 술 엄청 먹이고 나가리도 엄청 준다던데.”
그러면서 우리 대각선 반대 방향에 아주 편하게 앉아 있는 사람 한 명을 눈짓했다. 성마른 인상의 선배였다. 아까 양주를 가져왔다고 얘기하던 걸 본 기억이 났다. 옆에 소주가 이미 몇 병 비워져 있는 걸 보니 보통 술고래가 아닌 듯했다.
갑자기 긴장이 됐다.
“철호야. 그거, 구호 어떻게 하더라? 기억이 안 나는데.”
“박건형이, 너.”
갑자기 이철호가 근엄한 표정을 하고 예언하듯 말했다.
“왜?”
“너 어쩐지 감이 안 좋다. 오늘 죽었다.”
난 이철호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 건! 혀엉! 인사드리겠습니다아악!”
에프엠인지 뭔지 때문에 목이 쉬었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내 본 건 난생처음이다. 거기다 제일 민망한 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엄청나게 오버해야 한단 거였다.
하필 내 바로 앞에 했던 이철호가 춤까지 추면서 가히 엽기적일 정도의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던 탓에 선배들의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였다. 평균치도 안 되는 밍밍한 자기소개 따위가 눈에 찰 리가 없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악명 높은 심사위원도 이렇게 냉정한 눈으로 쳐다보진 않을 것이다. 선배들은 내가 ‘안녕하십니까!’ 하는 FM 첫 구절을 전부 외치기도 전에 나가리를 외쳤다.
한 다섯 번 넘게 나가리를 먹었을 때 제일 나이 많은 선배, 그러니까 그 마르고 안경 낀 선배가 술을 마셔야 긴장이 풀릴 거라며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 부어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민망해서 숨이 찼는데, 쓴 소주를 한 컵 먹고 나니 얼굴이 완전히 벌게졌다.
입 안에 남은 미지근한 알코올 향이 역했다. 얼굴을 찌푸리니까 집행부 선배들이 좀 당황한 얼굴로 과자를 뜯어서 입에 넣어 줬다. 옆에서 새내기 벌써 술 먹이면 안 되는데, 하고 작게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걱정이 됐다. 여기서 또 나가리 나면 한 잔 더 먹일 것 같은 눈치였다. 그래서 헛구역질을 참고 소리 질렀다. 살면서 이렇게 오버한 건 처음이었다. 그 뒤로 이어진 장기자랑은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노래를 불렀는데, 다들 배를 잡고 웃었다. 목소리가 반쯤 나가서 되게 웃기게 들렸나 보다.
그제야 그 선배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넘겨 주었다. 너무 힘들어서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철호는 또 이게 재밌다고 나를 자리까지 질질 끌고 들어왔다. 그 장면에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나도 같이 웃고 싶었는데, 전혀 안 웃겼다. 쪽팔려서 웃을 수가 없었다.
불공평한 건 내 뒤로 나보다 얌전하게 한 녀석들이 모두 통과되었다는 거다. 처음 시작한 사람일수록 통과 기준이 더 빡빡한가 보다. 뒤로 갈수록 보는 사람도 지쳐서 대충대충 지나가고.
운이 나빴다. 왁자지껄한 와중에 한숨이 나왔다. 심지어 술이 오르는지 조금 졸리기까지 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마지막 순서까지 죄다 구호를 외쳤을 땐 거의 한 시간쯤 지난 것 같았다. 설마 다 시킬 줄은 몰랐다. 벌써부터 피곤하고 집에 가고 싶었다. 내일 저녁도 이런 걸 한다고 생각하니까 끔찍했다.
“야, 건형아. 박건형. 이제 진짜 뒤풀이 시작한다. 아, 재밌겠다. 야야, 술 받아.”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이게 재미있었다고?
이철호는 생기가 넘쳤다. 달리지도 않은 꼬리가 팽팽 돌아가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선배들이랑 친해질 기회라고 아주 입맛을 다신다. 이런 애는 만화 속에서나 있을 줄 알았는데…….
녀석이 좋아하는 걸 보니 내겐 아주 죽을 맛일 시간이겠구나.
정말, 안 지 하루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이철호가 어떤 놈인지 완전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했다. 어쩌면 강수현보다 더 대단했다. 이렇게 노는 걸 좋아하는데 공부는 좀이 쑤셔서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짠! 한 잔 더!”
진짜, 미쳤나 보다. 다들 미쳤다.
물을 이렇게 마셔도 울렁거릴 게 뻔했다. 느물느물하게 웃으며 다가온 선배는 쉴 새 없이 잔을 채웠다. 어느새 커다랗게 둘러앉았던 원은 작은 원으로 나뉘어 있었다. 신입생 네댓 명에 선배 두셋 정도가 끼어 앉아서 분위기를 주도했다.
몇 번 자리가 로테이션 되고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바뀌었다. 지금 우리 앞에 앉은 선배는 그 안경 낀 술고래 선배였다. 왜 왔냐면 내 생각에…….
“전공 하면서 필요한 거 다 나한테 물어봐. 애들 족보는 다 나한테서 나온 거니까!”
“고맙습니다, 선배님!”
“고맙긴. 불편하게 선배라고 하지 말고 오빠라고 해도 돼. 아차, 너희도 형이라고 불러, 형이라고.”
몇 번 자리가 섞이면서 우리 자리에 여자애가 동석했기 때문이 아닐까?
“알았어요, 형!”
거기에 이철호만 신나서 대답했다.
같은 방에 두 명 있던 여학생 중 한 명은 어지럽다며 먼저 자러 들어갔고, 이제 한 명만 남았다. 물론 신입생 여자애가 한 명이란 얘기지, 선배 중에는 여자 선배들도 몇 명 있어서 완전히 홍일점은 아니었다.
그래도 백몇 명 중에서 열 명도 안 되는, 그것도 한 다섯 명 간신히 넘을 법한 여학생 중에 하나라 그런지 관심이 지대했다.
나도 좀 관심이 갔다. 이성적인 감정이 싹트고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여자애의 이름이 수현이라서 괜히 친근했다. 물론 성은 달랐다. 한수현이다.
우스운 일이다. 강수현이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게 얼마 전인데, 이젠 옆자리 앉은 여자애 이름이 수현이라 친근함을 느끼다니.
“미안한데 너 이름이 뭐였지? 아까 시끄러워서 제대로 못 들었어.”
한수현이 물을 들이켜고 있는 내게 물었다. 왠지 모르게 목소리에서 박력이 넘치는지라 급하게 물을 삼키고 대답했다.
“어, 내 이름은 박, 박건형.”
“그래? 난 부산서 왔어.”
“부산?”
말투에서 전혀 경상도 억양이 안 느껴졌다. 그러자 한수현은 능청맞게 말했다.
“내가 서울 말씨를 얼마나 연습했는지 아니? 애매한 사투리도 서울말도 아닌 이런 식의 말을 쓰지 않으려고 무던히 많이 연습했단다.”
“대단하네.”
“뭘, 대단할 것까지야. 말이야 그렇지, 우리 외가는 서울이라서 난 서울말, 부산 말 다 쓴다.”
그렇구나. 사실 난 부산에서 올라온 사람은 처음 만나 봤다. 여태 다 서울 사람, 그것도 우리 지역구 사람들이랑만 만나 봐서 신기했다.
과자를 집어 먹고 있는데 한수현이 턱짓으로 물었다.
“저기 있는 철수? 철뭐시기……”
“이철호.”
“그래, 이철호랑은 원래 알던 사이야?”
“아니. 그냥 오늘 처음 만났어.”
“그래? 되게 친하게 붙어 지내길래. 동향 사람인 줄.”
“원래 저런 애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