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화
#Prologue


꽃잎이 아름답게 흩뿌려지는 화창한 봄날.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한적한 골목에 자리 잡은 허름한 보육원. 앞뜰에 널린 빨래들이 바싹 말라 가며 봄바람에 살랑거렸다. 그 안의 작은 방에선, 옹기종기 낮잠을 자는 아이들 틈에서 작은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어 주는 해사한 여인이 있었다. 그 옆에는 이제 막 잠기운이 몰려든 듯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이는 여자아이가 누워 있었다.
“결국, 모든 오해를 푼 안토니오 왕자님과 셜리 공주님은 서로를 꼭 안아 주었어요. 그리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마지막 장을 넘긴 에리는 조용히 책을 덮으며 옆에 누워 있는 소피아를 바라봤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주자 소피아는 눈을 반쯤 감고 그녀의 손을 꼭 잡는다.
“언니 이제 갈 거야?”
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작게 웅얼거렸다.
“응. 언니 이제 집에 가 봐야 해.”
“그럼…… 언제 또 올 거야?”
“열 밤 자고 올게. 알았지? 그동안 원장님 말씀 잘 들어야 해.”
“응…….”
머지않아 다시 오겠다는 말에 안심한 소피아는, 결국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다. 자신이 잠들면 그녀가 집에 돌아갈 것을 알고 끝까지 졸음을 참다 마지막에 잠든 것이었다. 아이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에리는 조심히 몸을 일으켜 원장실로 향했다. 책상에 앉아 운영회비를 관리하고 있던 미네르바가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아이들이 벌써 잠들었나 보군요. 조용한 걸 보니.”
“네. 오늘은 일찍 잠들었어요. 아침 일찍부터 세차게 뛰어놀더니 많이 피곤했나 봐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한창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을 떠올리는 두 사람의 얼굴에 따뜻함이 어렸다.
부모를 잃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열여섯 명의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호를 해 주는 안식처가 바로 이 보육원이었다. 루휀 왕국의 수도에 위치하였으나 비교적 한적한 곳에 있는 낡은 보육원은, 주변의 지인들과 몇 귀족들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에리는 그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아이들은 보육원에 지속적으로 들르며 자신들과 놀아 주고 청소와 빨래까지 도맡아 봉사하는 에리를 무척이나 잘 따랐다. 이곳에서 자원봉사와 후원을 한 지도 어느새 한 해가 다 되어 갔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바로 소피아 때문이었다.
길거리에 즐비한 상점들을 구경하며 갓 구운 쿠키를 사는 에리를 부러운 듯 바라보던, 그 어리고 작던 소피아에게 그녀가 쿠키를 건네주며 그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도 된 듯이 크게 기뻐하며 골목 어귀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아이가 향했던 곳이 부모를 여읜 아이들의 보금자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루휀 왕국의 하나뿐인 공주이자 왕과 왕비의 사랑을 독차지한 막내딸 에리는, 보육원이라는 시설이 존재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실감한 것은 처음이었다. 궁에 돌아가서도 며칠 동안 그 아이의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공주인 에리에게는 고작 간식거리에 지나지 않는 쿠키였을 뿐인데, 그 아이에겐 세상 모든 것이라도 되는 것 같은 그 기쁨 어린 눈빛을.
단순한 연민인지 동정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신분을 속이고 무작정 그 보육원을 찾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형편은 좋지 못했다. 나라에서 받는 지원금은 한계가 있었고, 후원자는 적었으며,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점점 늘어 갔다.
미네르바 원장과의 첫 만남을 떠올릴 때면 아직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처음부터 무작정 값비싼 보석을 들이밀며 후원하겠다는 에리를 수상하게 바라보던 원장의 눈빛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래서 에리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인들의 후원금을 전해 주는 것뿐이라고. 사실은 그녀의 주머니에서 나온 보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미네르바가 단칼에 거절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옛일을 회상하던 에리는 주머니 속에 준비해 뒀던 후원금을 미네르바에게 건넸다.
“원장님, 이번 달 후원금이에요.”
“에밀리 양.”
에리는 이곳에서 ‘에밀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녀가 공주라는 사실을 사사로이 알릴 수 없기도 했지만, 사실은 이런 정도의 도움밖에 주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부끄러워서인 마음도 컸기 때문이다.
노란 봉투 안에 든 두둑한 후원금을 바라보던 미네르바는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이 어린 여인에게 어떻게 이런 큰돈이 있는 것일까.
그녀가 이 보육원에 처음 찾아왔던 날, 다짜고짜 도움을 주고 싶다며 평생 본 적도 없는 진귀한 보석들을 내밀 때, 미네르바는 그녀를 믿지 않았다. 신분도, 정체도 모르는 어린 여인이 건네는 보석의 출처 역시 알 수 없었고, 그 의미가 미심쩍었기 때문이다.

‘이 보석은 받지 않겠습니다. 진심으로 이곳을 돕고 싶다면 마음으로 다가와 주세요.’

미네르바는 일부러 단호하게 거절하며 막연한 요구를 했다. 귀족 아가씨의 변덕에 놀아나는 건 아닐까, 걱정되어서였다. 비록 간편한 차림을 하긴 했지만, 매끈한 피부와 머릿결, 그리고 고생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보드라운 손이 그녀가 결코 낮은 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미네르바가 혼자 하던 빨래를 도와주었다. 뛰노는 아이들이 입던 옷이라 그 양은 어마어마했다. 어설픈 동작이었지만 끝까지 해낸 그녀는 다음에 또 오겠노라며 다짐했고, 한 해가 지난 지금까지 발걸음을 끊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 지인들이 보육원의 사정을 알고 후원을 하겠다며 매번 건네는 후원금은 점점 늘어 갔다. 후원자들의 신분은 철저히 비밀이었다. 그들이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아 한다며 난색 어린 웃음을 짓던 에밀리의 말을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미네르바는 깊이 고민했다. 에밀리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렇게 많은 지원을 지속적으로 해 주는 후원자들에게 정식으로 찾아뵙고 인사라도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이 많은 후원금을 받아도 되는 건지…… 알려 줄 수 없겠어요?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요. 너무 감사한 일인데 그분들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걱정 마세요. 원장님께서 고마워하시는 것도 다 알고 계세요. 그분들은 오히려 신분이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세요.”
“그렇군요……. 이번에도 정말 감사히 받아서 잘 쓰겠다고 전해 주세요. 덕분에 아이들이 배불리 먹고, 좋은 옷을 입고, 학비를 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고.”
“네. 꼭 전해 드릴게요.”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이제 곧 저녁거리를 사러 나간 글로이 선생님이 돌아올 시간인데, 식사하고 가요.”
“아니에요. 이제 가 봐야 해요. 왠지 비도 올 것 같고.”
“그래요?”
미네르바는 힐긋 창밖을 바라봤다. 봄비라도 내리려는지, 갑자기 먹구름이 낀 하늘에 어둑한 기운이 서렸다. 미네르바가 우산을 건네며 에리를 배웅해 주었다. 에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보육원과 거리를 두고 한적한 골목 어귀에 세워진 마차를 발견한 에리는,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한 채 서 있는 유모를 향해 크게 외쳤다.
“샤샤! 나 왔어!”
“에구머니! 공주님! 왜 이리 늦으셨어요? 안 그래도 지금 막 모시러 가야 하나 걱정하던 차인데.”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그게…… 조금 전에 갑자기 궁에 손님이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하는데 어떡합니까, 공주님?”
에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분위기가 안 좋을 때 몰래 궁 밖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아바마마께 들키면 큰일이었다. 에리는 허겁지겁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에리 공주가 보육원을 찾은 마지막 날이었다.

□ ◆ □

번쩍―
거친 장대비가 쏟아지던 칠흑 같은 하늘에서 서슬 퍼런 빛이 번쩍였다. 평온하던 봄 날씨에 뜬금없이 몰아친 폭우였다. 궁 주변에서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이 울렸다. 그러나 궁 내부의 누구도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 하나 없이, 그저 통곡할 뿐이었다.
날이 밝으면 떠나게 될 하나뿐인 공주 에리가 안타까워서.
“흐흑…… 공주님…… 에리 공주님.”
“샤샤, 그만 울어.”
“제가 어떻게 공주님을 보냅니까? 어떻게 공주님을 그런…… 흐흑.”
주저앉아 서로를 부여잡고 울어도 시원찮을 상황에, 침착하기 이를 데 없는 에리는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유모를 다독였다. 침착함 뒤에 감춰진 체념 섞인 한숨이 그녀의 붉은 입술을 타고 가냘프게 새어 나왔다.
날이 밝으면, 그녀가 지금껏 사랑해 왔고 앞으로도 사랑할 자신의 나라 루휀을 떠날 예정이었다. 강제나 다름없는 통보를 받고 촉박한 일정에 그녀는 슬퍼할 여유조차 없었다.
갑작스러운 국혼.
매우 정열적이며 화려한 예술품으로 유명한 바렌치아 제국. 그리고 그곳을 다스리는 젊은 황제, 칼리온 덴 반도네르. 피도 눈물도 없이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젊은 황제라고 했다. 자신의 아버지인 선황은 물론이고 선황의 수많은 후궁과 그들의 자식까지 모조리 죽인 살인자였으며, 미치광이 전쟁귀라는 수식어가 늘 따르는 자였다.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면 어김없이 찾아가 살생을 하고, 그의 그림자조차 피처럼 붉다 하여 ‘적왕(赤王)’이라 불리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발견한 여인들을 모조리 잡아간다는 추문까지. 그런 칼리온 황제의 명령을 거스를 수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에리를 원했다. 아니, 루휀과 국혼을 함으로써 얻어 낼 국익을 원했으리라. 광활한 바렌치아 제국과 비교하는 건 꿈도 못 꿀 정도로 작은 나라, 루휀 왕국. 그러나 삼면이 바다로 되어 있는 비옥한 땅과 기후 덕에 농작물은 늘 풍년이었으며, 몸을 보해 주는 수백 가지의 약초가 너른 들판만 나가도 쉽게 얻을 수 있을 만큼 풍족했다. 비록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마음만은 따사로운 나라, 루휀.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부족한 것 없이 두려움 없이, 늘 사랑만 받고 자란 하나뿐인 공주 에리가 적왕에게 시집을 간다는 소식에 성 안은 며칠 동안 울음바다였다.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스물여덟 살의 적왕은 비슷한 수준의 강대국이 아닌, 하필 루휀과의 국혼을 원했다. 그리고 그에 반할 시, 루휀을 손에 쥐겠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왕과 왕비는 한동안 침실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앓으셨고, 하나뿐인 오라버니는 자신만 보면 눈을 붉혔다. 그리고 그녀의 정혼자로 거론되었던 하워드 공작 역시.
자신 때문에 그들을 잃을 순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결과가 뻔히 보이는 싸움을 해 봤자 많은 희생만 뒤따를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직접 결단을 내렸다. 그에게 시집을 가겠노라고. 그녀의 나라와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기꺼이 떠나겠다고…….
그 이후로,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보며 오열하는 이들 앞에서 서글픈 마음을 애써 감추며 다짐했다. 지극히 강제적으로 그녀를 손에 쥐려는 칼리온 황제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 ◆ □

칼리온 황제의 청혼서를 받고 정확히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에리 공주가 바렌치아 제국으로 떠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항구에 정박한 바렌치아의 함선은 이국적인 분위기와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며 드높게 솟아 있었다. 바렌치아의 함선은 에리 공주를 태울 거라 통보한 일주일이 지난 현재까지도, 거대한 몸체를 움직이지 않은 채 항구를 떠나지 않았다. 자신들의 요구를 절대 거스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그 오만함을 내뿜으며.
바렌치아 제국의 국기가 하늘 높이 바람에 휘날렸다. 검은색 천의 중심에 새겨진 황금빛 사자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제국의 위대한 국력은 함선의 규모만으로도 그녀의 기를 눌렀다.
눈앞에서 새삼 실감하게 된 바렌치아의 국력에 등허리가 서늘했다.
실제로 바렌치아에서는 에리 공주를 신붓감으로 데려가는 대신 많은 것들을 하사했다. 마차로 몇십 번은 운반해야 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금괴와 각종 향신료, 바렌치아 특산품인 값비싼 보석과 고품질의 비단, 그리고 절대 변치 않을 동맹까지. 신부를 데려가는 지참금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제공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조건으로 제국에서 원한 것은 단 하나, 루휀 왕국의 하나뿐인 공주 에리 뮤 스칼롯이었다.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항구까지 발걸음한 가족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레이나 왕비와 메튜 국왕, 그리고 오라버니인 안젤로 왕자까지. 결국 마음 약한 레이나가 가장 먼저 눈물을 터뜨렸다.
“에리…… 사랑하는 내 딸. 미안하다…….”
“어마마마……. 눈물 거두세요.”
어머니의 우는 모습에 그녀까지 눈물이 차올랐다.
“에리. 부디…… 건강하거라. 이 아비가 늘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아바마마…….”
세상 누구보다 그녀를 아끼면서도 겉으로는 근엄하던 아버지마저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부모님의 약해진 모습을 보자, 참았던 에리마저 눈물을 터뜨렸다.
“두 분께서 그리 슬퍼하시면 떠나는 에리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울고 있는 세 사람을 보며 안젤로가 위로했다. 마음 같아선 불쌍한 동생을 끌어안고 같이 울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안젤로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마음 약한 동생의 어깨를 다독였다.
“씩씩하게 잘 지낼 것이라 믿는다. 분명 그곳에서도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너무 걱정 마라. 힘들면 언제든 기별 보내고. 알았지?”
“……예, 오라버니.”
에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눈물을 훔쳤다. 오라버니의 위로에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네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싼 기사들과 그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들 역시 안타까움에 숨을 죽였다.
마침내 에리는 그녀를 배웅해 주는 국민들과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내며 힘겨운 발걸음으로 함선에 올라탔다. 수많은 인파 속에 억눌린 흐느낌은 에리의 귓가에까지 들려왔다. 그녀는 이제 막 어린 티를 벗고 성인식을 치른 스무 살의 순진무구한 공주일 뿐이었다. 왜 하필 그녀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한탄해 봤자 이미 소용없는 짓이었다.
항구를 떠난 함선은 드넓은 대해를 건너 대제국 바렌치아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뿐이었다.



#1장


바렌치아 제국.
동북쪽에 위치한 바렌치아 제국은 북쪽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광활했다. 다른 국가에 비해 큰 신장과 높은 건축물이 많기로 유명했고, 기술이 뛰어난 장인들이 각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배를 만드는 조선 기술과 화려하면서도 견고함을 잃지 않는 건축 기술이었다. 전통을 중요시하면서도 타국의 문물을 존중할 줄 아는 국민성답게 무역업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예술과 무예에도 능했다.
가난이 없고, 많은 일자리로 배곯는 이가 없는 나라. 바렌치아 제국은 그야말로 이 땅에 현존하는 최고의 선진 국가였다.
그런 바렌치아 제국을 지배하는 군주이자, 역대 최고의 황제라 불리는 제78대 황제 칼리온 덴 반도네르. 그는 황태자 시절, 많은 전쟁에 참전해 조국을 늘 승리로 이끌었으며 바렌치아 국민들에게는 존경과 희망을, 타국의 국민들에게는 적왕이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칼리온은 뛰어난 통찰력과 진취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각종 무예 실력까지 겸비한 통치자였다. 그가 황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은, 여인에게도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과 각종 전문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과히 파격적이며 충격적이기까지 한 제도였다. 머나먼 대륙 어딘가에서, 아직까지도 여인을 노예처럼 부리며 사고파는 것이 현실인 판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칼리온 황제가 새로 도입한 제도는 실로 놀라운 업적 중 하나였다.
그런 칼리온 황제가 바로 오늘, 루휀 왕국 출신의 에리 공주와 국혼을 치른다.
국민들은 황제의 국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타국에서 건너온 황후를 기쁘게 맞이했다. 길거리엔 오색찬란한 꽃 장식이 화려하게 매달려 있었고 축하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바렌치아에서는 붉은색이 길운을 상징하고 있어, 두 사람의 행복과 황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붉은 종이로 만든 수백, 수천 개의 연들이 이른 아침부터 하늘 위를 두둥실 떠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