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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 세계에선 강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원칙이었다. 아무리 오너의 아들이라 해도 임원들이나 직원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아야만 뒤탈이 없었다. 예전처럼 아들이 무조건 이어받는 건 의미적으로도 명목으로서도 약한 변명일 뿐이었다. 그는 직원들에게 그의 능력을 인정받을 자신이 있었고 그의 자리를 그 스스로 되찾아 올 것이다.
“박 호승, 우강수 대리와 함께 나가있어.”
“네, 알겠습니다.”
완전한 축객(逐客)이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렸지만 강현은 신경 쓰지 않고 아버지 옆에 가서 섰다. 아버지의 시선을 얼굴에 느낀 강현은 얼굴을 내려 그와 똑 닮은 눈을 마주했다. 한때는 아버지와 똑같은 이 눈을 뽑고 싶은 만큼 증오심으로 가득 찼던 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증오심마저도 그의 힘으로 승화시켰다. 그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갈기갈기 찢어져 난도질당한 가슴이 다 아물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저 처량 맞은 시선이 닿자 욱신거리다 못해 신경에 거슬렸다.
우강수가 받았던 부정(父情)의 정을 받지 못해서 아픈 것인지, 버림받은 기억이 더 진해져서인지 모르지만 이런 감정은 결코 달갑지 않았다. 어떠한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든지 그는 아버지라는 사람을 이미 버렸다. 어머니의 죽음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아버지를 봤을 때부터 그에게는 이미 돌아가신 분이었다.
“돌아왔으면 집으로 들어오지 그랬어?”
“제게 집이 어디 있습니까?”
“그 집이 네 어머니 집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
“그 집이 어머니 집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니 다행이군요. 하지만 그 집은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한 제게 그저 건물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어머니 얘기는 그만하시죠, 회장님과 어머니 얘기 불편합니다.”
어머니 얘기를 서슴없이 하는 아버지를 향한 그의 눈에 불길이 일렁거렸다.
그 집이 어머니 집인지 아시는 분이 그 여자를 그 집으로 불러들여단 말인가. 그것도 어머니 무덤이 채 식기도 전에. 그가 조금 더 힘이 있었다면 그런 꼴은 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수연이 말한 힘이, 능력이 없어서 새어머니란 여자에게 그리 당한 것이다.
“그래, 그럴 테지. 내가 미처 생각을 못했구나.”
“앞으로도 그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만 하십시오.”
“그래도 돌아왔으니 집에서 밥은 한 번 먹어야지?”
“언제부터 그리 다정하게 식사를 했는지 모르지만 오늘 저녁에 집으로 가겠습니다. 돌아온 기념으로 새어머니에게 인사도 드려야 하겠지만, 어차피 그 집은 제 집이 될 터이니 한 번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그 집은 어머니가 태어나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던 집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여자가 들어온 이후로 더 이상 어머니가 살았던 집이 아니게 되었다. 그 여자가 아주 조금씩 고치긴 했지만 거의 다 뜯어고친 탓에 어머니가 남긴 흔적은 고스란히 사라지고 없었다. 어머니를 추억할 만한 것들을 싹 지워버린 것이다.
어머니가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하시던 정원도, 가끔 햇살 좋은 날 노래를 불러주곤 하시던 뒷마당의 그네도, 그리 아끼시던 그림들도, 결혼할 때 새로 장만하신 가구들도, 어느 것 하나 남은 것이 없었다.
그때는 그저 외롭고 힘들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벗어나려고만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다. 원래의 주인에게로, 원래 있던 자리로.
“그래, 알았다. 집에는 내가 연락해 놓으마.”
“네.”
강현은 더 이상 아버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분명 예전과는 다른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든 일에는 다 시기가 있는 것이다. 늦은 시작도 있겠지만 그러기에 그와 아버지는 너무 많은 강을 건너버린 후였다. 돌이키기에는 아버지가 남긴 상처의 흔적들이 너무 많았고, 그 흔적들은 그가 평생을 가지고 가야할 짐들로 남아 있었다.
“존경하는 임원, 직원 여러분, 정식으로 우강현 이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여기 있는 우강현 이사에 대해 아시는 분은 이미 소문으로 들어 아시겠지만, 스탠포드에서 MBA 과정을 이수하고 미국 지사에서 그랜트사와의 합작을 성공리에 마친 장본인입니다. 오늘부터 우리 계열사를 통틀어 총괄 관리할 예정이니 많은 협조하시기 바랍니다.”
강현은 아버지의 소개에 중앙 단상으로 나가서 직원들을 바라보며 냉기를 흘려보냈다. 어떠한 존재도 처음부터 받아들이는 집단은 없다. 특히 그처럼 회장의 아들일 경우에는 더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지 그는 이 자리에 섰고, 그가 이 자리에 선 이상 최고가 될 것이다.
이 자리에 서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하늘에 계신 어머니는 알고 계실 것이다. 참 길고도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다. 꾸역꾸역 차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그의 심장을 쪼개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욕심을 내보지 않았던 자리였지만 지금 이 순간 강현은 이 자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외할아버지의 기분이 이랬을까? 저들의 위에 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겨우 미국지사에서 실적 하나 올린 제가 이 자리에 올라선 것을 불만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6개월 이내에 이 회사를 이끌어 나갈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미련 없이 이 자리를 떠나겠습니다. 제가 창업주이신 외할아버지의 손자라 해도,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산을 제가 전부 상속받았다 해도 예외는 없다고 봅니다. 이 자리에 선 이상 회사를 키우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들의 많은 협조가 있어야 할 겁니다.”
강현의 말에 직원들이 술렁거리며 아버지를 힐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일부러 외할아버지와 어머니 얘기를 꺼내 실질적인 회사가 누구의 것인지 직원들이 알아듣도록 넌지시 얘기를 한 것이다.
새어머니가 아버지를 통해 집어넣은 인간들에게 보란 듯이 경고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없는 동안 얼마나 해먹었는지 모르지만 이젠 그것도 끝장이 났음을 알리고 싶었다.
외할아버지는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사위인 아버지에게 단 1퍼센트의 주식도 물려주지 않으셨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가 외동딸인 어머니에게 고스란히 다 물려주시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마저도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변호사를 통해 그에게 회사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속하고 떠나셨다.
이미 성인이 된 그가 집에 대한 권리나 회사에 대한 권리를 아버지나 새어머니에게 요구한다고 해도 아무런 무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회사를 완전히 장악하고 새어머니의 무리들을 다 정리한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단박에 그들을 어떻게 하지 않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목을 조이고 싶었다.
상대가 방심했을 때 공격하는 것이 최상의 공격이라고 했던가? 그는 어머니가 당한 만큼 그들에게 조금씩 강하게 느낄 만큼 돌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 급한 건 회사에서의 그의 위치이니 일단은 일에 주력할 것이다.
“전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직급과 무관하게 말단사원일지라도 좋은 의견이 있을 경우 적극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하기를 원합니다. 제게 제출하는 보고서는 바로 위의 상사를 거치지 않고 제게 바로 제출하도록 부하 직원들에게 지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내로 각 부서의 올해의 업무현황과 직원들의 평가서를 종합해 퇴근 전까지 제게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브리핑은 부하 직원이 아닌 부장님들께 직접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강현은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똑똑히 내뱉으며 많은 사람들의 눈을 마주했다. 조금 전보다 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는 것으로 봐선 그의 요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스르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듯이 차가운 냉기를 품어내던 강현은 직원들이 그의 시선을 피하자 그제야 겨우 단상에서 내려왔다.
미국 지사에서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부장의 대부분이 아래 부하 직원에게 보고서를 만들도록 지시해서 통째로 강탈해 가는 수준이었다. 윗선에서 잘 했다 하면 부장의 공이요, 안 되면 부하 직원을 닦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그가 부장들을 지목해 지시했으니 놀랄 만도 할 것이다. 아마 사무실에 내려가 불이 나게 일을 할 걸이 불 보듯 뻔했다.
미국 지사에서 근무할 때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밝히지 않고 말단사원으로 일을 했었다. 그런데 그의 상사는 개인적인 심부름부터 보고서까지 그에게 거의 맡겼었다. 회사에 출근해서 나와 인터넷을 뒤지거나 개인 볼일을 보거나 하고는 막상 회사의 업무는 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미국 지사장에게 보고해 그 상사를 해고시켜 버렸다.
그가 생각하기에 조직사회의 흐름은 위로 올라갈수록 불투명해졌다. 아래 부하 직원들 보다 더 노력해야함에도 어느 정도 올라가면 나태해지는 사람이 허다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월급이 올라가는데 하는 일은 작다? 그가 있는 이상 그건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그들의 월급을 줄이든 그들의 일을 늘리든, 공짜로 월급이 나가는 일은 없게 할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 사람도 변해가야만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대충 시간에 맞춰 출근을 해서 어떻게든 시간을 때우다가 퇴근을 하는 그런 직원들을 그는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월급이 새어나가느니 차라리 실적이 높은 직원에게 보너스를 주는 것이 더 나은 경영방법이었다.
“그럼 각 부서의 부장님들, 제 사무실에서의 브리핑 기대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회의실 문 끝에 선 강현은 뒤돌아서서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는 문을 닫았다. 뭐에 그리 놀랄 일이라고 저리들 어안이 벙벙해 얼어있는 것인지, 일을 하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 그것도 하지 않고 월급을 받으려 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