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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속에 유독 눈에 띄는 남자 우강현이 서늘한 눈매로 전방을 주시하기만 했다. 강현은 주위 사람들을 감탄케 할 만큼 당당하게 벌어진 골격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크 그레이 톤의 모직 정장을 멋들어지게 입고 한 팔에는 같은 톤의 코트를 들고,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걷고 있는 그는 잡지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시선을 꽂았던 사람들은 금방 그에게로 향한 관심을 거둬 들어야했다. 깎아놓은 듯한 완벽한 이목구비와는 상반되게 그의 검푸른 눈동자는 차가운 얼음 그 자체였던 것이다. 보게 되면 베일 것만 같은 그 섬뜩함에 다들 30초를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전방을 주시하는 그의 시선은 누굴 찾는 건지 지독스럽게 매서웠고 짙은 눈썹 또한 연방 꿈틀거렸다.
“도련님!”
강현은 난데없이 들려온 소리에 잠시 얼음처럼 그 자리에 섰다. 그에겐 낯익은 호칭이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살았기에 잠시 익히듯 머릿속에 되새겼다. 그리고 그런 호칭을 부른 상대를 반가운 마음으로 찾았다. 하지만 그의 뒤에 있는 남자의 시선을 느끼고는 곧 본래의 그로 돌아와 무감하게 앞을 살폈다.
그의 곁에 7년 동안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꼭 붙어 있던 남자 류철민. 그를 지킨다는 허울 좋은 명목 아래 유학생활 내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말이 그의 경호원이지 새어머니가 보낸 감시자였다. 그에게서 일어난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새어머니에게 다 보고한다는 것을 바보가 아니 이상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철창만 없을 뿐이지, 그에게 7년은 감옥살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철저한 감시 속에서 강현은 많은 것들을 배웠다. 타인의 의중을 파악하는 방법이라든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자신이 가진 권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배웠다.
당연히 그의 것이었지만 사용하지 않았던 권리들을 하나씩 받아들이며 빠르게 흡수했다. 버릴 수 없으니 몽땅 끌어안으리라 다짐했다. 그에게 다른 선택이 없기도 했지만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기도 했다.
다 잃어버린 후에야 그를 그 누구도 구해주지 않는다는 것, 스스로가 강해져야 한다는 것, 뭘 얻고 지키려면 그만큼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많은 시간들과 고통으로 배웠다. 다시는 그의 것을 잃는 법은 없을 것이다.
“도련님, 여기입니다.”
그의 눈에 박호승이 들어왔다. 그가 눈 앞에 서자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호승을 보는 강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7년 동안 한 번도 못 봤지만 그가 기억하는 호승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장난기 가득한 녀석이었는데 이젠 웃음기 어린 눈을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어머니의 운전기사였던 호승의 아버지가 살아 돌아온 듯 너무나 닮은 모습에 놀랍기만 했다. 세월의 태풍에 휩쓸린 사람이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오시는데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어떻게 나왔어?”
호승은 어머니가 계실 때부터 그들의 집안일을 해주던 수원아주머니의 아들이었다. 그보다 두 살이 어려 어릴 땐 형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는데, 어느 날부터는 도련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요즘 시대에 무슨 도련님인지 이해는 되지 않지만, 수원아주머니의 고집을 이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나와야죠.”
“그래?”
성격이 좋아 매사 속없이 실실 웃는 녀석이었는데 이젠 완전히 다른 녀석이 되어 있었다. 차분한 마스크에 표정관리까지 진중함마저 갖춘 호승의 성장에 강현은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눈에 잡힐 듯 말 듯한 잔주름들이 강현의 눈가에 자리를 잡았다가 곧 사라졌다.
“류철민 부장님?”
호승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등 뒤에 바짝 서 있던 철민에게로 향했다.
“네.”
“우린 이제 여기서 헤어지죠.”
“네?”
“오늘부로 류 부장님의 역할은 끝났다는 말입니다.”
강현의 말에 철민의 눈이 움찔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한국에 도착하자 그가 이리 나올 줄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철민의 당황스러운 표정에 강현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한국에 들어와서도 그와 함께 지낼 줄 알았단 말인가.
“전 아직…….”
“아직까지 새어머니에게 별다른 지시를 받지 않으셨겠죠. 하지만 이제 제가 류부장님을 해고합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와서도 새어머니의 감시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이젠 새어머니조차 절 막으실 수 없으시다는 걸 류부장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박호승, 가자.”
강현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철민을 차갑게 응시하며 상황을 정리하고는 미련이 없는 것처럼 등을 돌렸다. 보폭 큰 걸음으로 과거에 벗어나듯 힘차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를 옭아매고 있는 줄을 하나 자른 셈이었다.
새어머니가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자 처음부터 거리를 뒀으니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한 공간에 머물다 보니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지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어 불편한 점은 없었다.
어떨 땐 덜 외롭기도 했고. 덜 힘들기도 했다. 그리고 철민이란 존재가 있었기에 그의 목적을 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외부와 어떤 연락도 취할 수 없었던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공부 밖에 없었을 때조차 철민이란 존재 때문에 나태해질 수가 없었다.
그의 인생을 스스로 조정할 힘을 얻고 싶어 잠을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공부를 했고 남들보다 빨리 졸업도 했다. 그리고 바로 아버지 회사의 미국지사에 말단으로 들어가 맨 밑바닥부터 일을 배웠다.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해 그는 목숨을 걸었고 결국엔 살아남았다.
하루를 한 시간처럼 살았을 만큼 그에게 7년이란 시간은 길고도 아주 짧았다. 그 시간 동안 그에겐 목표가 있었기에 지루할 틈이나 약해질 시간이 없었다. 모든 준비가 끝난 그를 막는 자(者)는 가차 없이 밀어버릴 것이다.
“새어머니가 보내서 온 거야?”
강현은 궁금한 점을 호승에게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물었다. 이제 새어머니와 닿아 있는 연결고리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자를 생각이었다.
“아닙니다.”
“그래?”
“네, 오늘부터 제가 도련님을 모실 겁니다. 도련님이 미국에서 공부하시는 동안 전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미래기업으로 들어가 실무경험을 쌓았습니다.”
“왜?”
강현은 호승이 이 정도까지 준비를 하고 있는 줄 몰랐었다. 누가? 왜? 이유가 궁금했지만 강현은 호승이 스스로 대답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다그치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건 사업의 기본 원칙이었다.
“도련님이 회사로 돌아오시면 도움이 되어야 하니까요.”
“넌 네 부모님이 우리 집안에 종속(從屬)되어 있는 걸 싫어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네.”
“그런데?”
강현은 어릴 때 그에게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호승의 반항의 눈동자를 기억했다. 호승의 부모가 그에게 도련님이라고 하면서 존대를 하는 것이 불만인 듯 노려보기도 했었다. 만약 그의 입장이었더라도 그랬을 거라 생각해 문제 삼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렇듯 온순한 박호승이라니, 참 의외였다.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혜? 아……, 네 외가의 일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만 둬도 돼.”
예전 호승의 외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아주 유명한 노름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노름은 집안 재산으로 그치지 않고 자식들을 팔아치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걸 강현의 외할아버지가 호승의 어머니 형제 여덟 명을 찾아내 빚을 갚아주고 거둬주었다는 소리는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외할아버지가 한 일이지 그가 도와준 일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요, 이미 제 결정은 끝났습니다.”
“그래?”
“네.”
“네 인생이니 네 마음대로 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현은 호승의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고는 피식거렸다. 예전의 얼굴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했더니, 남아있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입술을 불퉁이 내밀고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라니, 어릴 때와 똑같았다.
“박호승.”
“네.”
“한국대학교 동양학과 98학번의 민수연이 어디 있는지 찾아.”
“네.”
차의 뒷좌석에 오른 강현은 호승에게 간단하게 명령하고 시트에 몸을 묻었다.
민수연, 가슴속에 묻어두었다가 입 밖으로 꺼냈을 뿐인데 가슴이 알싸하니 아렸다. 차디차게 얼려버렸던 과거가 해동이 되니 심장이 파르르 떨려왔다. 묻어두었던 상념들이 하나하나 떠오르자 참기 힘든 분노가 치솟은 강현은 손등에 파란 심줄이 불거질 만큼 힘을 주고 이를 물었다.
‘민수연.’
오래 못 봐서 보고 싶은 기대감일까, 그가 없이도 잘 살았는지 확인하고 싶은 분노일까, 무조건 봐야만 할 것 같은 가슴에서 나는 소리일까. 그의 심장은 곧 터지려는 전깃줄처럼 파열을 일으키듯 진동을 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