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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본 남자 1권 1화

1. 맞선


그녀처럼 아름다운 여자에게는 깨끗한 구두가 어울린다.
―중경삼림(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 1994) 中―

“선이라고요?”
응? 이건 또 어디에서 튀어나온 개구리지?
예고도 없이 툭 튀어나온 말에 나는 잠시 멍청해졌다. 가만있자,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으로 쓰는 단어였더라? 선이라. 하도 오랜만에 듣는 말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의외의 장소에서 허를 찔린 탓인지 순간적으로 정신이 하염없이 멍청해져서는 아무리 되뇌어도 무슨 말인지 도대체 접수가 안 되려고 했다.
그저 근저를 알 수 없는 본능적인 거부감과 함께 이대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만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폴폴 피어날 뿐이다. 정신적인 충격이 상당했다.
째깍째깍.
머리가 시리다. 시간이 흐를수록 뇌혈관이 점점 더 창백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얼떨떨한 시선으로 다시 창구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랫집 정애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짜리몽땅하고 주름진 몸을 최대한 바짝 편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늘구멍처럼 쪽 찢어진 눈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아악! 내 눈깔, 내 눈깔!
알 수 없는 기가 할머니에게서 뭉클뭉클 피어나 사방을 점령해 간다. 발레리나처럼 발끝으로 서서 창구 너머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그녀의 눈빛이 먹이를 발견한 대머리 독수리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살벌하다. 갑자기 긴장감이 몰려왔다. 여기서 떨면 지는 거다.
마인드 컨트롤, 마인드 컨트롤.
할머니는 대머리 독수리가 아니고 나는 생쥐가 아니다. 생쥐가 아니다, 생쥐가 아니다. 대답을 재촉하듯 할머니의 얼굴이 점점 더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지, 지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꿀꺽.
“마, 맞선을 보라고요?”
“응, 그려. 할매 친구가 서울서 사는디 그 사람 손자가 참말 잘났디야. 한참 전에 서울 올라간 질에 봤을 적에 ‘우리 동네 과수원집 큰 딸내미가 참말 이쁘더라.’ 소리를 혔더니 기억하고 있었는지 한 번 봤으면 허더라고. 만나 볼래냐?”
“아하하하. 에이, 아니에요. 바쁜 철에 선은 무슨…….”
“그라지 말고 한 번 만나 보는 것이 좋을 것인데. 부모는 없지만 사람이 착실하니 돈도 잘 벌고 엄청 잘생겼디야. 훈남이랴. 너도 내년이면 서른 아녀? 얼른 시집가야지.”
할머니가 입꼬리를 올리고 히죽 웃었다.
아니, 정말 웃고 있는 거 맞나?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더니 그 선한 얼굴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살기가 뻗어 와 명치를 쿡 후려치고 지나갔다. 간은 멀쩡한데 얼굴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아무 이유 없이 당당한 할머니의 시선이 그물처럼 온몸을 옥죄고 있었다. 슬그머니 고개가 돌아갔다.
아나, 그놈의 서른은 윤미숙 혼자만 된다고 소문이 났나.
아직 ‘스물아홉’이라고, 만으로 치면 ‘스물여덟’밖에 안 되었다는 말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다가 힘없이 스르르 내려갔다. 스물여덟이니 아홉이니 하는 건 사실 어른들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터였다.
어쨌거나 윤미숙은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을 못한 노처녀가 분명했고, 어른들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는 내가 결혼을 하는 그날까지 줄기차게 이어질 게 뻔하니까. 그리고 별 이변이 없는 한 이런 갑작스러운 맞선 제안도 심심치 않게 찾아들 것이다. 스무 살 이후 지금까지 줄곧 그래 왔던 것처럼.
생각해 보니 내가 의외로 맘고생을 많이 했다.
스무 살 이후 서른을 향한 카운트다운을 꾸준히 받아 오다가 얼마 전부터 그냥 ‘서른’ 취급을 당하고 있는 심정을 누가 알아줄까나. 스물다섯부터 ‘낼모레 서른’ 소리만 줄기차게 듣다 스물아홉이 된 올해는 온 동네 주민들로부터 아예 본격적인 서른 살 취급을 받게 된 처지가 너무너무 쓸쓸했다. 세상인심이 왜 이따위로 돌아가는 건가. 억울하다. 망할 놈의 서른.
‘내가 왜 탄핵을 당해야 하는 거지? 내가 서른이 되면 이 동네에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지는 거야?’
이 동네에 서른 살 노처녀가 나 하나만은 아닐진대, 모두가 작당해서 얼굴이 마주치는 족족 ‘시집가야지.’라는 소리를 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다들 잊고 있는 모양인데 노처녀에게도 인권은 있다. 뿐만 아니라 취향과 고집도 있다.
이래 봬도, 나의 로망은 대놓고 평범하고 아주 많이 착한 남자 만나 하루하루 착실하게 연애해서 결혼하는 거다. 닭살 돋는 애정 행각도 벌여 보고, 사랑에 빠진 여자답게 예쁜 여우 짓도 해 보고, 또 때로는 티격태격하다가 토라지기도 하는 그런 평범한 연애야말로 윤미숙의 장래 소망이었다. 늙었다고 연애 감정까지 포기한다는 건 지나치게 슬픈 일이니까.
아무튼지 간에, 그런 이유로 나 윤미숙은 이 불합리한 압력에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
“휴우, 제 처지에 선은 무슨 선이에요? 관둘래요.”
“니 처지가 워뗘서 그려? 그만하면 이쁘고 착하고 성실하고 다 좋기만 하구먼.”
“좋기는 무슨. 저 없으면 우리 아부지 진지는 누가 차려 드려요? 미주도 고3이라 신경을 더 써 줘야 하는데…….”
“아, 미준이 곧 졸업할 거 아녀? 졸업하면 의사 선상님 되는 거고. 그러면 금방 결혼해서 홀아비 신세인 지 아부지랑 막둥이는 어찌 됐든 보살펴 주겄지.”
“그거야 그렇지만. 당장 마련해 둔 돈도 없고…….”
“야야, 무슨 돈 걱정이여? 결혼하는 데 돈이 왜 필요하간디? 아무 걱정 말어라잉. 축의금도 조금 있을 것이고, 또 큰일은 그짝에서 다 알아서 할 거여.”
말도 안 된다.
결혼식에 돈이 안 들긴 왜 안 드나? 여차하면 멀쩡한 집안 기둥뿌리도 뽑아 먹는 게 결혼이라던데.
결혼하는 데 돈 걱정을 안 하면 그럼 무슨 걱정을 해야 한다는 건가. 내 배에 퇴적층처럼 쌓인 두툼한 지방층이 있는지 없는지 혹은 신랑이 고자인지 아닌지 하는 걱정보다 웨딩드레스 빌리는 값은 얼마고 혼수는 얼마나 해야 시집살이를 덜할지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며 신부 된 도리일 터였다. 상황이 이러하거늘 시대의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할망정 아예 무시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총각이 엄청 잘 번디야. 갑부랴.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직장도 빵빵허고. 부족한 것이 없디야. 그래서 내 친구가, 그러니께 그 집 할매가 그냥 몸만 와도 된다고 그랬단 말여. 그러니 너는 걍 몸만 가도 되는 겨.”
머릿속에서 눈보라가 불었다.
휘이이잉.
긴 터널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툭 떨어진 입안에서부터 힘 빠진 긴 바람이 새어 나왔다. 너무 기가 막혀서 눈이 하얗게 돌아가려고 한다. 흥부네 제비가 박씨 대신 소형 핵폭탄을 물어 왔다고 해도 이보다는 덜 슬프겠다.
우리 집은 문을 열어 놓고 살아도 집어 갈 게 없을 만큼 가난한데 남자의 집안은 땅값 비싼 서울에서도 탁탁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잘산단다. 잘사는 집안으로 시집가면 좋은 것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뽑을 기둥뿌리가 없으면 사람 뿌리를 말려 죽이는 게 또 결혼이란다. 그래서 옛말에도 한쪽이 너무 기우는 결혼은 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이 바쁜 장날, 나의 직장까지 쪼르르 달려와서 뱉어 놓은 남자가 사실은 접근 불가의 위험 취급물이라는 사실을 정애 할머니는 과연 알고 있을까? 몸만 오라는 말이 사실은 사기성이 농후한 립 서비스이며 만에 하나 그 말이 진실일까 봐 더 떨리는 내 심정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이유를 알아도 그걸 모르면 중신이고 뭐고 말짱 소용없는 일이다. 나는 남몰래 할머니를 향해 눈을 흘겼다.
“할머니도 참. 그거야 그냥 해 본 소리겠죠.”
“아니, 그런 게 아니라니께. 너그 살림을 내가 아는디 설마 비싼 밥 처묵고 와서 내가 괜한 소리를 하겄어? 참말로 몸만 오랴. 와 주기만 혀도 고마울 거라고 혔어. 딴거는 몰라도 덕순이 갸가 헛소리는 안 한다니께.”
역시 불길하다.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했다. 낯선 사람이 갑자기 친절하게 다가오는 건 사기를 치고 싶거나 곧 선거에 나갈 예정인 것이고, 직접 탄 커피를 상사에게는 주어도 본인은 절대 마시지 않는 것은 그 커피에 침을 뱉었기 때문인 것처럼, 기브 앤 테이크가 예의범절이 된 이 척박한 세상에서 아무 대가 없이 ‘그저 몸만 오시오.’라고 하는 경우에도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물론, 서로 너무너무너무 사랑해서 죽고 못 사는 사이라면 이 시대에 흔치 않은 미담이라고 여기며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겠지만, 이건 그런 운명적인 사랑 같은 게 아니라 그냥 흔한 맞선이 아닌가 말이다.
아무리 마음에 들었다고 한들, 세상에 어떤 맘 좋은 남자가 빈손으로 오는 여자를 좋다고 할까. ‘그냥 몸만 오라.’는 소리를 당사자가 직접 했다고 해도 내가 먼저 진의를 의심해 볼 판이었다. 몸만 오는 대신 당연히 뭔가 더 바라는 게 있을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혹시 그 사람 무슨 말 못할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 아냐? 고자라거나, 아니면 마르고 닳도록 부려 먹어야 할 만큼 특별한 사정이 있다거나.
시골에서 나고 자랐지만 내가 세상 돌아가는 인심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잘 버는 사람이니 쭉쭉빵빵 잘빠진 미모의 어린 여자나, 마찬가지로 잘 버는 여자를 원하는 게 당연한 욕심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살아오지 않았나. 더구나 나는 지금 한 푼이 아쉬운 처지라 단돈 만 원이 들어가는 일이라고 해도 그냥 물리고픈 마음이 더 컸다. 그럴 돈이 있으면 차라리 꿍쳐 놓았다 우리 미준이 등록금에나 보태고 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