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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장마철을 맞이한 회색빛 하늘에선 쉴 새 없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다미는 비를 극심하게 싫어했다. 잊지 못할 악몽으로 남아 있는 날들마다 어김없이 비가 내렸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패연히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평소와 다르게 설렘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빗줄기가 잔뜩 들러붙어 있는 창문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정경을 보던 다미가 품에 소중히 끌어안고 있던 쇼핑백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아무리 봐도 디자인이 참 예쁘단 말이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요리조리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부부가 될 두 사람의 웨딩 사진을 넣어 만든 청첩장이었다.
소개팅으로 만나서 연애 1년 만에 결혼을 하게 된 다미가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꽃길을 상상하며 히죽히죽 웃었다.
그때 핸드백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이 짤막하게 울렸다. 오늘 참석하기로 한 동창회 모임의 주최자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마지막 참석 인원 확인! 오는 사람은 답변으로 ‘O’를 꼭 보내 주시오. 시간 및 장소: 저녁 7시. 압구정 ‘il primo amore’ 레스토랑. 식사는 C코스. 와인도 곁들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동창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지방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자취를 하는 바람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까지 오는 게 무모하고 번거롭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2년 동안 백수로 지내느라 눈치가 보여 제대로 놀지도 못했고, 취업을 하니 일에 치여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 가며 불참했던 동창회를 청첩장 때문에 참석한다는 것이 조금 염치가 없긴 했지만 이내 축의금을 떠올리자 조금 뻔뻔해져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정류장은 여의도, 여의도입니다.
청첩장에 한눈이 팔려 있던 다미가 때맞춰 들려오는 안내 방송에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손목에 걸고 있던 장우산에 발이 걸려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악!”
품에 안고 있던 쇼핑백이 떨어지면서 안에 들어 있던 청첩장들이 비를 맞은 꽃잎처럼 바닥으로 흩어졌다.
“안 돼! 내 청첩장!”
흩어진 청첩장들을 급하게 주워 담았지만 사람들의 발자국과 빗물로 얼룩진 바닥에 닿아 엉망이 되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 가득 미소가 만여하게 피어 있던 다미는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처럼 턱을 실룩거렸다.
“아무도 안 내립니까?”
“내, 내려요!”
하지만 주저앉아 울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운전기사의 고함에 다미는 눈에 보이는 청첩장들을 대충 주워 막 문이 닫히려는 버스에서 황급히 뛰어내렸다.
“하여간 이놈의 비가 문제라니까!”
다미는 우산을 필 여유도 없는 제 몸을 인정사정없이 적시는 비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청첩장을 들고 있어 손이 모자란 탓에 결국 우산도 없이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방송국 로비로 들어왔다.
“어머, 꼴이 그게 뭐야?”
비에 몸이 흠뻑 젖은 채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다미를 보며 지민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어? 선배님!”
지민은 이제 막 3년 차에 접어든 다미보다 나이는 세 살 위였지만 경력은 세 배 차이로, 다미가 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였다.
상대방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져 걸레짝이 되든지 말든지 온갖 욕설과 막말이 오고 가는 방송국에서 그녀는 유일하게 국어사전에 나오는 표준어만 고집하는 선배였다.
쏟아지는 언어폭력에 다미는 몇 번이고 사표를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에 휘말리곤 했었다.
예능 작가로 방송국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다미는 방송국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예능, 신뢰감과 더불어 따뜻한 감동을 주는 다큐멘터리, 권선징악이라는 주제가 돋보이는 흥미진진한 드라마까지. 분명 그것들을 만드는 사람들 역시 열린 생각과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출근 첫날 30분 만에 보기 좋게 박살났다.

“대갈통이 안 돌아가냐?”
“눈깔은 둬서 뭐할래? 들어온 지 한 시간이나 됐는데, 이것도 파악 못 해? 이런 새끼랑 어떻게 일을 하라는 거야!”
“멍 때리고 있지 말고 의견을 내라고, 의견을!”


생전 들어 본 적이 없던 폭언과 더불어 잡다한 일까지 정신없이 몰아쳤다.

“막내야, 커피 좀!”
“막내야, 복사 좀!”


엄연히 부모님께서 지어 주신 ‘다미’라는 어여쁜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내라고 불리며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막내에서 벗어나 3년 차가 되었다고 해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첨예한 화살처럼 쏟아지는 폭언에 심장이 난도질당하곤 했다. 그나마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덤덤한 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뒤에 가서 눈물을 훔치는 법을 배웠다. 앞에서 울어 봤자 더 심한 욕을 듣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혼자 우는 법을 터득하기까지 3년이나 걸린 것이다.
“우산 안 가지고 온 거야?”
“아니요, 가지고 왔는데 들 손이 없었어요.”
그러면서 품에 들고 있는 쇼핑백의 존재를 알아 달라는 듯 일부러 읏샤, 소리까지 내며 들춰 안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꼴이 이게 뭐야. 다 젖었네! 그런데 품에 든 건 뭐야?”
지민이 손수건을 꺼내 다미의 얼굴에 묻어 있는 빗물을 닦아 주며 쇼핑백을 향해 눈짓했다.
“아, 이거 청첩장이요.”
“어머! 드디어 청첩장 나왔구나? 나도 한 장 줘!”
다미가 냉큼 쇼핑백에서 청첩장을 꺼내 건넸다. 그때 두 사람의 곁으로 담당 PD가 걸어왔다. 막내 시절의 다미에게 험한 말을 가장 많이 했던 상사였다. 지랄 맞은 성격의 소유자로 3년 째 같이 일하면서도 기본적인 말을 제외하고 사적으론 절대 단 한마디의 말도 걸어 본 적 없는 임 PD였지만, 이번만큼은 살갑게 해야 했다. 축의금만 생각하자, 공다미!
“안녕하세요, PD님!”
3년 내내 그랬듯이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다미는 이럴 때마다 그의 턱을 후려갈기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들었다.
기다리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세 사람은 나란히 안으로 올라탔다. 예능국이 있는 12층을 누른 다미는 청첩장을 펼쳐 보는 지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청첩장 디자인이 참 독특하고 예쁘다.”
“그렇죠? 제 아이디어예요!”
“아이디어 좋네. 먼 친척 어르신들 같은 경우에는 왕래가 없다 보니까 얼굴을 잘 모르실 수도 있는데 이 청첩장은 받자마자 누가 결혼을 하는지, 내가 누구의 결혼식장을 가고 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 같아. 임 PD님도 이거 한 번 보세요. 너무 예쁘죠?”
임 PD가 슬쩍 곁눈질로 지민이 내민 청첩장을 보았다. 다미가 자신도 모르게 그의 평가를 기다리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뭐, 괜찮네. 심플하면서도.”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대갈빡이 그렇게 안 돌아가서 어디다가 써먹을 거냐며 침이 마르도록 독설을 퍼붓던 임 PD의 예기치 못한 칭찬에 다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 넘겼다.
“와, 평생 막내일 줄 알았던 다미가 결혼을 하다니. 정말 축하해, 다미야.”
청첩장을 핸드백에 소중히 넣은 지민이 기특하다는 듯 다미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그 옆에서 임 PD가 미세한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미는 비 오는 날의 징크스 따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놈의 비는 언제까지 온대?”
막 회의실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임 PD의 짜증 섞인 말에 지민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온다던데요?”
“지겹다, 지겨워.”
다미는 너랑 함께 일을 하는 것이 더 지겹다고 소리 내어 외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쇼핑백의 청첩장들을 꺼내 예능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장씩 돌리기 시작했다.
“저 결혼합니다.”
“그래. 축하하고, 거기 놓고 가.”
“저 결혼해요.”
“어, 축하해. 근데 난 바빠서 못 가니까 계좌 번호나 알려 줘. 돈 보내 줄게. 많이는 안 보낼 거니까 너무 기대하진 말고.”
사람들의 성의 없는 대답에도 다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직원들에게 청첩장을 돌렸다.
방송국 일이 워낙 바쁘기에 저런 반응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바였다. 게다가 결혼을 한다는 설렘이 긍정이라는 세포와 손을 맞잡고 다미에게 깊게 스며들었다.
마지막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예능국장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자 안경을 코끝에 두고 모니터링을 하고 있던 예능국장이 다미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국장님.”
“톡톡 말해요의 공다미 작가 아니야?”
다미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손에 쥐고 있던 청첩장을 내밀었다.
“저 곧 결혼해요.”
“오! 소식 들었어. 청첩장이 아주 예쁘구만?”
“제 아이디어입니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칭, 칭찬이겠지? 어딘가 모르게 떨떠름한 국장의 반응에 다미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웬만하면 결혼식에 꼭 가겠다는 국장의 말을 듣고 자리로 돌아오던 다미의 시야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임 PD와 곽석현 CP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회의실에서 서로를 맹렬하게 쏘아보며 점점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래요?”
다미가 바짝 말라 버린 입술을 축이며 옆에 앉은 선배에게 속삭였다.
“시청률 엉망으로 나왔다고 저 난리 치는 거지. 곽 CP는 시청률 잘 나오면 지 덕분이고, 잘 안 나오면 항상 우리 팀 탓을 하잖아. 저런 거 한두 번 봐?”
선배의 말마따나 한두 번 본 광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두 사람의 분위기가 더욱 심각해 보였다. 그것이 비가 오는 탓이요, 자신의 기분 탓이라고 여긴 다미가 큐 시트를 인쇄하기 위해 막 노트북을 켰을 때였다.
탁!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안에 있던 임 PD가 팀 전체를 호출했다. 목에 핏대까지 세우고 흡사 도시에 출몰한 멧돼지를 내쫓듯이 윽박을 지르면서.
담당 프로그램의 작가들과 PD, FD들이 허겁지겁 회의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큐 시트 인쇄 때문에 마지막으로 회의실로 들어간 다미는 뿔이 있는 대로 난 듯한 곽 CP의 매서운 눈과 덜컥 마주쳤다.
“너 결혼한다면서?”
다미가 유일하게 청첩장을 주지 않은 사람은 곽 CP뿐이었다. 47세의 노총각인 그에게 함부로 청첩장을 내밀었다가 그 자리에서 갈갈이 찢겨지고 쓰레기통에 버려져 눈물을 터트리는 이들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곽 CP는 노총각 히스테리를 넘어서 그냥 싸이코였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싸이코.
임 PD의 열 배 정도 되는, 지랄 맞은 것 중에서도 최고봉으로 지랄 맞은 인간. 그런 인간의 레이더에 걸린 다미는 긴장한 탓에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네? 네…….”
“그래서 지금 청첩장 돌리고 있다며.”
모두의 이목이 한순간에 다미에게로 쏟아졌다. 하나같이 다미를 걱정하는 동정의 눈빛이었다. 곧 날아올 폭격에 덜컥 겁을 먹은 다미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시청률도 거지같이 나온 주제에, 작가라는 게 우리 프로그램이 어떻게 하면 보다 나은 프로그램이 될 수 있을까 고민은커녕 청첩장이나 돌리고 자빠져 있으니 시청률이 그따위로 나올 수밖에!”
다미가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서는 재빠르게 빈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은 수민이 조용히 괜찮으냐고 물으며 다미의 손등을 다독여 주었다.
“더 이상 프로그램에 붙는 광고들도 없어! 적자라고, 적자!”
방송국 천장을 날릴 기세로 고함을 질러대는 곽 CP에게 반항이라도 하듯 임 PD가 조심성도 없이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똑똑히 알아 둬. 만약 이번에도 시청률이 밑바닥 쳐서 개떡 같이 나오면 최후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걸!”
곽 CP는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진 사람마냥 마지막까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빈 의자를 발로 차며 나갔다.
그가 나간 회의실에선 한동안 누구도 쉽게 깨트릴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 곽 CP가 말한 최후의 조치가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회의 시작하자.”
임 PD의 말에 그제야 사람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다들 이미 어깨에 힘이 축 빠져 버린 상태였다.
온종일 지루할 정도로 진전 없는 회의 끝에 퇴근을 한 다미는 서둘러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달려갔다.
약속 시간인 7시가 막 넘어가고 있어, 급히 주선자에게 문자를 넣었다.

<나, 공다미. 회사가 조금 늦게 끝나서 지금 가고 있어!>
<응. 네 음식은 네가 도착한 후에 주문 넣도록 할게.>


문자를 확인하고 휴대폰을 가방에 넣으려던 다미가 문득 떠오르는 이름에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오늘 모임에 선도 부장 오니?>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다리를 떨 정도로 무언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부르르 하고 울렸다.
제발 오지 마라! 제발!
다미는 휴대폰을 꽉 쥐고 간절하게 바랐다.

<응.>

하지만 그 간절한 바람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 버렸다.
그가 온다는 충격에서 차마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다미의 시야로 연이은 문자가 도착했다.

<오늘 주최하는 장소가 선도 부장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이야. 그럼 조심히 와.>

시온이 하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다미는 벌써부터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와 부딪히는 것이 껄끄러워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찰나, 어제 입금한 회비가 떠올랐다.
“내 피 같은 돈…….”
동창회에 몇 번 참여한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한 번 입금한 돈을 되돌려 받는 건 힘든 일이라고 했다.
주최자가 보내 준다고 말만 해 놓고 은근히 좀생이로 몰아가는 바람에 나중에는 달라고 하는 것조차 민망해지는 상황이 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집에서부터 들고 온 청첩장도 있고, 5만 원을 내고 18만 원짜리 음식을 먹을 기회도 생긴 셈이다. 비록 송시온의 손을 거쳐 나오는 음식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결론을 낼 수 없어 머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일 때, 다음 역은 압구정이라는 상냥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그리고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이야. 막상 만나면 의외로 괜찮을 수도 있겠지, 뭐.”
얼굴 가득 걱정스러움이 깔린 다미는 청첩장이 든 쇼핑백을 품에 끌어안으며 서둘러 지하철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