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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포르테
3화



현재는 이미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사라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가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집에 들어온 사라는 룸메이트인 지호가 깨지 않게 조심해서 씻고 살금살금 침대에 누웠다. 자리에 누워서도 한참 동안 가슴이 두근거리다가, 뒤이어 장미를 보던 현재의 눈빛이며,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라는 서둘러 머릿속에 있는 그 남자를 지우고 잠을 청했다.
보통 때 같으면 새벽 두 시에 일이 끝나면 집에 오자마자 기절한 것처럼 잤을 텐데. 오늘따라 아직 다 가시지 않은 두려움과 양현재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 * *


“3선 정치인의 외손녀야. 결혼만 성사되면 너에게도 든든할 거다.”
이미 결정된 일이라는 듯이 말하는 아버지의 말에 현재가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무릎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저 아직 연애 생각 없습니다.”
“누가 연애하라고 했냐? 결혼을 하랬지.”
“다릅니까?”
“다르지. 결혼을 먼저 해라. 연애는 그 후에도 실컷 할 수 있어.”
거침없는 아버지의 말에 현재가 도와 달라는 듯이 새어머니 쪽을 보자 안 그래도 살짝 짜증이 나 있던 그녀가 남편의 발을 콱 밟았다.
“아주 좋은 거 가르치십니다?”
강시연의 고상한 목소리에 남편, 양호철이 아픔을 꾹 참고 대꾸했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랑 결혼해서 아닌데. 쟤는 사랑하는 여자도 없잖아요. 일단 결혼부터 하자고. 저렇게 평생 혼자 사는 거 보고 싶어요?”
“저 이제 서른입니다, 아버지.”
“어차피 따로 좋아하는 여자도 없는데 선은 봐도 되잖아. 혹시 아냐, 진짜 네 이상형일지.”
이번엔 어쩐지 좀 간절하다 싶더니, 호철이 실토했다.
“아버지가 직접 주선하셨어.”
“……그럼 더 싫습니다.”
현재는 창업주인 그의 할아버지와 그다지 관계가 좋지 않았다. 예고 진학을 준비하던 현재의 미래를 멋대로 바꿔 버리기도 했고, 기본적으로 ‘장남의 장남’인 선일을 눈에 띄게 편애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호철이 말을 이었다.
“네 녀석이 결혼 안 하겠다고 했다며. 할아버지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걱정이 아니라 참견입니다.”
현재가 평소에 그리 순한 아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여간해선 이길 수 없다는 걸 호철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러나 그런 현재의 성격을 물려준 것이 호철의 아버지인 양원녕이었다. 현재는 어리니까 대충 큰소리쳐 꺾어 놓는다고 해도 원녕은 그럴 수도 없었다. 중간에 낀 호철만 난감하게 되었다, 싶은 찰나. 현재가 그 고충을 헤아렸는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 여자 친구 있습니다.”
“……있어?”
“네. 있어요.”
귀찮아서 적당히 둘러댄 말에 시연이 반가워하며 물었다.
“누군데? 어느 집 딸?”
“그냥 보통 가정 여자예요.”
“연예인이구나? 예뻐?”
“연예인은 아닌데 예뻐요. 이제 됐습니까? 저 가도 되죠?”
현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호철이 혀를 찼다.
“오로지 얼굴만 봤구나, 너.”
“예. 아버지 닮아서.”
이게 칭찬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 시연이 데굴데굴 눈을 굴리자 현재가 말했다.
“물론 어머니는 예쁜 것 말고도 장점이 많지만, 아버지는 일단 얼굴부터 보셨을 거란 뜻이었어요.”
그러자 시연이 조금 수줍어하며 웃었다.
“어머, 얘도.”
호철은 자신이 불효자식들만 낳았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조만간 얼굴이나 보자. 그 아이.”
“길게 사귀면요.”
현재가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도 쭉, 결혼할 생각이 없지만 당장 그 말을 했다간 부모님이 난리가 날 것 같아 대충 둘러대기는 했다만. 저분들 성격에 아무래도 사람을 붙여서라도 누구와 만나는지 알아내려 들 것 같았다. 곱게 자라 회사를 물려받을 줄 알았던 장남이 빠르게 탈주한 이후, 그들은 현재에게 관심을 쏟고 있었다.
어쩌나. 누구에게 부탁이라도 해서 여자 친구인 척해 달라고 할까, 생각하던 그의 머릿속에 적당한 사람이 하나 떠올랐다. 선일의 바에서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라였다. 원래 그는 남이 하는 일에 참견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은 내내 그의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여자 친구인 척해 달라고 부탁해 볼까.
현재는 이것이 그녀에게 나쁘지 않은 제안일 거라고 생각했다.

* * *


화요일 아침 출근길, 버스에서 사라가 휴대폰으로 전날 본 드라마의 클립을 또 보고 있자 지호가 핀잔했다.
“현실 연애에도 관심 좀 가져 줘, 강사라.”
그녀가 사라의 한쪽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그러자 사라가 지호를 슬쩍 본다. 얼마 전 연애를 시작해서인지 단발머리의 지호는 눈빛에 생기가 넘쳤다.
‘현실 연애’라는 말을 듣는 바로 그 순간, 지난주에 본 그 남자가 생각났다. 그날 밤에도, 다음 날도. 눈을 감으면 자꾸 그 남자가 보였다. 다음 날에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혹시 안 왔을까 기다려 봤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사라가 괜히 딴소리를 했다.
“연애하더니 더 예뻐졌네. 재수 없게.”
사라가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하자 지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예뻤거든?”
“어우, 저게 진짜.”
티격태격하며 오케스트라에 도착하자 지호는 관악기 파트로, 사라는 현악기 파트로 향했다. 그녀가 들어서니 장미가 사라를 잠깐 보았다. 사라도 무심코 그녀를 보았다.
저 늘씬하고 예쁜 부잣집 아가씨. 카리스마도 있고, 스펙도 빵빵하고, 얼굴도 예쁘니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장미는 대학원을 졸업해 사라와 같은 시기에 오케스트라에 들어왔다. 입단 시기는 같아도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쭉 2년 위 선배였다. 성격이야 좀 까칠한 편이지만 실력도 좋았다. 장미가 사라를 살짝 흘겼다.
“강사라.”
“저 지각 안 했습니다!”
“일 좀 줄이라니까. 걱정되잖아.”
장미가 뽀로통해서 말하자 사라가 어색하게 웃다가 살금살금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자신이 그녀를 질투한다는 걸 알면 장미는 아마 어이가 없어 비웃을 것이라고, 사라는 생각했다.

점심시간, 식사를 샌드위치로 때우는데 예민한 사라의 귀에 전화 중인 장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현재 오빠. 나 오늘만 집에 데려다주면 안 될까? 그날 정말 감기에 걸렸나 봐. 운전할 힘이 안 나……. 선일 오빠는 일해야 하니까.”
남자 친구 놔두고 왜? 사라가 황당해서 자기도 모르게 장미의 말을 엿들었다.
“정말? 고마워, 오빠! 이따가 일곱 시. 응. 이따가 봐.”
장미는 살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장미가 사라 쪽을 보자 그녀가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장미는 현재가 사라를 집에 데려다주던 날 밤,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현재는 극도로 연애하는 것을 꺼려 해서 아무와도 만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사실 그가 누구를 만나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작 현재의 관심이 다른 여자에게로 향하니 장미의 기분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이런 기분이 들 거라고는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다.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현재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날 밤 현재는 루바토로 돌아온 후에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장미가 아프다고 말했던 것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다가, 그녀가 다시 머리가 아프다고 말한 후에야 잊고 있었던 약을 꺼내 주었다.
지금도, 현재가 장미에게 전화한 것은 사라가 괜찮냐고 묻기 위해서였다.
그런 장미의 속을 모르는 사라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도대체 왜 남자 친구의 동생을 부른 걸까? 그 남자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르는데, 왜 여지를 남기는 건지.
사라는 오후 연습 내내 그 신경 쓰이는 일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저녁 시간이 되어, 사라는 바로 수험생 레슨을 가야 했다. 그런데 떠나지 못하고 주차장 근처에서 머뭇거렸다.
괜찮냐고 묻던 다정한 목소리. 무섭다는 말에 걱정으로 굳어 버리던 얼굴.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서던 모습까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잠시 후 검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그 차에서 현재가 내리자, 사라는 그제야 지금 자신이 무슨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다른 여자를 데리러 온 남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들 사이가 어찌 되었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데.
사라가 현재와 눈이 마주치자 꾸벅 인사를 하고 서둘러 아트홀로 돌아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곧 어지러워 자리에 잠깐 멈춰 섰다. 요즘 자주 이렇게 어지러웠다. 하기야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잠도 제대로 안 자니 몸살이 올 때가 되었을까.
그녀가 멈춰 서 있는데 현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병원 가 볼까요?”
“네?”
사라가 돌아보니 현재가 휴대폰을 들고 서 있었다.
“장미가 몸이 안 좋다고 해서 데려다주러 왔는데. 연습 중인지 연락을 안 받네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 많이 아픈가 해서 걱정했는데.”
장미 선배 오늘 아프기는커녕 컨디션 완전 좋던데. 연주도 겁나 잘하던데. 사라는 차마 그런 말들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현재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쪽…… 이름이 뭡니까?”
“강사라요.”
“사라 씨도 몸이 계속 안 좋은 것 같아서.”
현재가 제 차를 턱짓했다.
“병원 갈래요? 장미 나오면 같이 데려다줄게요.”
“저 레슨 가야 돼요.”
“레슨?”
“네. 그러니까 고맙지만 다음에요.”
아르바이트 외에도 일을 하고 있다는 사라의 말에 현재는 무슨 생각인지 더 대답이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호구도 아니고, 왜 형 여자 친구가 아픈데 자기가 데리러 오는지도 따지고 싶었다. 정말로 그녀를 좋아하는 거냐고 묻고 싶다.
그러나 결국 아무 질문도 하지 못했다. 사라가 돌아선 후에야 현재가 그녀를 불렀다.
“강사라 씨.”
그가 불러서 사라가 돌아보자, 현재가 말을 이었다.
“혹시 다른 아르바이트 안 할래요?”
“다른 아르바이트요?”
“자꾸 부모님께서 선을 보라고 하셔서. 저는 아직 연애 생각이 없거든요.”
장미 선배 때문에요?
그렇게 물어볼 뻔했다. 사라가 현재가 있는 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리고 물었다.
“그래서요? 무슨 아르바이트?”
“내 여자 친구 행세를 잠깐만 해 줄 수 없습니까?”
“여자 친구…… 행세요?”
“새벽 시간에 바에서 아르바이트하고, 몸이 아플 정도로 레슨을 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은데. 돈도 그것보단 많이 드리죠.”
“…….”
“그냥 보조 출연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사라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그가 험한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잠시 만들어진 설렘이 깨질 때 사라는 약간의 아픔을 느꼈다. 몸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런가. 그 균열로부터 갑자기, 꾹 누르고 있던 모든 아픔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사라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그냥 사귀고 싶을 정도로 매력은 없나 봐요.”
“……예?”
“여자 친구 행세를 해 달라면서요. 한번 꼬셔나 보지 그랬어요. 뭐 돈까지 줘 가면서 행세를 해 달래.”
“…….”
“웃기는 아저씨네.”
‘현실 연애’라는 말에 저 남자를 떠올렸는데, 그것도 틀렸던 거다. 저 남자도 드라마 속에 있는 강준하와 다를 게 없었다.
어차피 나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원한다고 해도 만날 수 없는. 그저 그런 드라마 속의 남자인 것이다.
“싫어요.”
그녀가 돌아서서 걸어갔다. 보조 출연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생각하라니.
어떤 세상에서는 단역이어도 괜찮았다. 오케스트라 안에서는 단원1이면 충분했다. 대학 다닐 때부터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려고 남들 솔로곡 연습할 때 혼자 오케스트라에 들어간 선배들을 쫓아다니며 엑섭(excerpts, 발췌곡) 레슨을 해 달라고 조르곤 했으니까, 취업이 결정되자마자 좋아서 친구들과 캠퍼스 한가운데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랬어도.
그래도.
그래도 어떤 세상에서는.
단역이 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