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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진오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시혁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비록 정략적인 관계였지만, 앞으로 약혼녀가 될 사람인데, 듣는 사람 민망할 정도로 사무적인 말투가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진영 씨도 나오라고 하지?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보게.”
“늦었어.”
“차갑게 굴지 말고 좀 챙겨라. 인마! 이러니저러니 해도 너와 평생을 함께할 사람 아니냐?”
“…….”
“너 좀 이상하다는 거 알아? 일에서는 철저한 놈이 여자관계는 왜 그리 흐리멍덩한데? 약혼을 앞두고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는 거, 정상이라고 생각해?”
진오가 대답 없는 시혁을 쏘아보다가 서경을 향해 소리쳤다.
“서경이 너도 그래. 무조건 싸고돈다고 다가 아니잖아. 저 자식 저러고 노는 거, 지켜보는 것도 지겹지 않아?”
시혁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무슨 뜻이야?”
“교통정리 좀 하라는 뜻이야! 네가 여자들 만나는 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나도 남자니까. 하지만 왜 서경이까지 더러운 꼴 보게 하는데? 즐기고 싶으면 아무도 모르게 즐겨. 예의를 지키면서 놀란 말이야!”
작정한 듯이 소리쳤다. 시혁의 술잔이 탁 소리를 내며 테이블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왜! 기분 더럽냐?”
“…….”
“나, 네놈 십년지기 친구다. 친구가 돼서 이 정도 말도 못 해!”
으르렁대며 소리치던 진오가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고 사라졌다. 시혁이 상한 기분을 달래려는지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진오가 한 말,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 말은 저렇게 해도 너 많이 생각해.”
서경이 말했다.
“이상하긴 이상하겠지. 나 역시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시혁이 자조하듯이 씁쓸하게 웃었다.
서경은 불현듯 17년 전, 늦은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최 회장은 평소 과묵한 사람이지만, 한번 화가 나면 혹독할 정도로 사람을 몰아붙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혈육이라고 예외가 없었다.
성북동 최 회장 자택에서 지낸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늦은 밤, 서재에서 들리는 둔탁하고 반복적인 소리가 어린 서경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문틈으로 가만히 눈을 가져다 대는 순간, 보고도 믿기지 않은 끔찍한 광경에 숨이 멈추었다.
평소 눈길 한번 주는 법이 없는 시혁은 지독하리만큼 차갑고 쌀쌀맞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신음조차 흘리지 않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최 회장의 거친 매를 받아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또 다른 자신 같아서 지켜보는 내내 몸이 떨려 왔다.
도망치듯 별채로 가서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올 리 만무했다. 파랗게 질린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자, 심장이 두근거리며 까닭 모를 죄책감이 몰려왔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별채 밖으로 나왔다.
우왕좌왕하며 뜰을 서성이고 있을 때, 어두운 안뜰 구석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난히 푸른 달빛이 아이의 작은 몸을 어슴푸레하게 비추고 있었다.
엉망이 된 얼굴로 몸을 덜덜 떠는 아이의 떨림이 몇 걸음 떨어진 서경에게까지 전해 오는 듯했다. 흐느끼는 아이의 손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시혁이 다섯 살 때 세상을 등진 생모의 사진이었다.
서경은 문득 깨달았다. 아무리 냉정하게 굴어도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열두 살의 상처받기 쉬운 어린아이라고. 가족을 떠나 홀로 내팽개쳐진 자신만큼이나 가여운 아이라고.
그 후, 흐르는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숨죽여 울던 아이는 장성하여 눈물을 모르는 남자가 되었다. 그러나 서경에게 시혁은 늘 정원 한구석에서 몸을 떨던 열두 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서로의 눈물을 닦아 내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마치 한 몸에 두 영혼을 지닌 샴쌍둥이처럼,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그와 자신은 늘 그렇게 아프고 슬프고 가여웠다.
“시혁아. 진영 씨 좋은 사람이야. 너를 많이 사랑하고.”
“…….”
“그러니까 소중하게 대해 줘. 나는 진심으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녀가 행복하라고 한다. 그 말이 심장 부근에 닿아 뻐근한 감각을 일으켰다. 말이 기쁜 것이 아니었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턱없이 비현실적이지만, 말이 전하는 의미보다는 바라봐 주는 눈동자가 지나치게 따스한 탓이다. 늘 그랬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온갖 상념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 녹아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행복이 뭔지는 모르지만, 네가 행복하라면 행복할게.”
시혁의 말에 서경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나한테는 네가 그래.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 주고 싶으니까.”
“바보. 그런 말은 약혼녀에게 하는 거야.”
서경이 어렴풋이 웃었다. 취기 때문일까. 어딘가 공허한 웃음이었다.
호텔 코스테의 나른한 선율이 부유하는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소파에 몸을 기댄 서경이 다시 눈을 감았다. 상기된 그녀의 뺨 위로 속눈썹의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시혁은 생각했다. 삶 속에 발견해야 할 진실이 있다면, 오직 그녀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지금 이 순간만이 자신이 아는 유일한 행복이라고.



5

가끔 어울려 노는 친구들을 호텔로 불러 모았지만, 딴생각에 잠긴 우현은 술잔만 들이켤 뿐이었다.
“놀자고 불러 놓고, 정신은 안드로메다야?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해?”
언제 다가왔는지 정훈이 우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정훈은 뉴욕에서 함께 자란 친구로 유명한 의류 회사의 오너이기도 했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
“너 이번에 제대로 사고 치는 거 아니야? 너희 집 노친네가 말은 안 하지만, 내심 벼르고 있을 거다.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부류들과 엮이는데?”
우현의 시큰둥한 태도에 정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부류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오늘따라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몇 년 지내더니, 너도 많이 변했구나. 언제는 권위적이고 틀에 박힌 이 세계가 끔찍하게 싫다며?”
“그거야 어렸을 때 이야기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놀던 물이 가장 좋은 법 아니겠어?”
“그래 봐야 우물 안의 개구리지.”
우현의 표정을 살피던 정훈이 그의 어깨를 다시 툭 쳤다.
“요즘 왜 이리 삐딱해? 무슨 일 있어?”
그때 스테이지에서 춤추던 여자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화려하고 육감적인 외모의 희주는 한때 우현과 뜨거운 사이였지만, 지금은 마음에 맞는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뭣들 해! 한쪽 구석에 처박혀서.”
시원스러운 말투. 거리낌이 없는 태도가 그녀의 다혈질적인 면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었다.
“이 자식 사고 치고 떨고 있는 거 안 보여?”
정훈의 말에 희주의 눈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떨기는, 분명 새로운 사고 칠 거 또 없나 궁리나 하고 있겠지.”
“크큭…… 하긴.”
우현이 유쾌하게 웃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기업의 경영자이지만, 우현은 일과 사생활을 철저히 구분했다. 뉴욕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기에 구속 없고 걸림 없는 생활에 익숙했다. 그런 자유로운 성향으로 인해 가끔 구설에 오르지만, 일 때문에 프라이버시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가까이 지내는 친구 역시 그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이가 많았다.
“답지 않게 뭐가 그리 심각해? 무슨 고민 있어?”
살피는 눈으로 우현을 보던 희주가 물었다. 바깥일을 노는 자리까지 끌고 오는 우현이 아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성격 탓에 사업조차 게임이라고 여기는 우현이었다. 일이든, 사람이든, 그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하는 대상이 궁금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엉뚱한 물음이었다.
“현희주. 네가 보기에 나는 어떤 놈이냐?”
우현의 물음에 곁에 있던 정훈이 낄낄거렸다.
“그걸 몰라서 물어?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지.”
“인간으로서? 아니면 남자로서? 어떤 게 궁금한데?”
술잔을 들이켜며 희주가 물었다.
“둘 다.”
“인간으로서는 나쁘지 않지. 유능하고 통찰력 있고 신의도 있고.”
“…….”
“하지만 남자로서는…….”
“…….”
“한마디로 개자식이지, 뭐.”
“어라? 죽고 못 살 때는 언제고?”
정훈이 끼어들자, 희주가 정훈에게 눈을 흘겼다.
“그 정도였나? 만날 때는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우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물론 최선을 다했겠지. 다정하고 부드럽고 예의 바르고 게다가 잠자리도 끝내주고 말이야. 하지만 결정적으로 부족한 게 뭔지 알아?”
“…….”
“너한테는 진심이라는 게 없어. 마음이 빠진 껍데기가 무슨 소용이야.”
“그야 가벼운 관계로 지내기로 했으니까.”
우현의 말에 발끈한 희주가 그를 흘겨보았다.
“너한테 가볍지 않은 관계가 있기는 해? 너는 어떨지 모르지만, 보통의 여자라면 몸이 가면 마음도 저절로 가는 거야. 지금에야 말하지만, 당시 너 때문에 은근 상처받았어.”
“너 보통 여자 아니잖아.”
눈치 없기로 유명한 정훈이 끼어들자, 희주가 그의 정강이를 발로 확 걷어차고 뒤돌아 걸어갔다.
“보통은 그러냐?”
우현의 중얼거림에 정훈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야?”
“보통의 여자라면, 같이 잔 남자에게 마음이 끌리느냐고?”
“뭐, 보통은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 원나잇이 결혼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으니.”
“…….”
“근데 왜 답지 않게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냥 평소 놀던 대로 놀아.”
우현이 스테이지로 걸어가는 정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조명과 고급스러운 장식. 값비싼 치장과 세련된 매무새의 사람들. 무리 없이 이어지는 대화 그리고 가벼운 웃음.
자신을 둘러싼 견고하고 단단한 세계였다.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고 서로를 억압하기보다는, 가볍게 즐기고 뒤끝 없이 잊을 수 있는 관계가 좋았다.
우현이 테이블에 놓인 휴대전화를 들었다. 며칠 전에 입력된 새로운 번호를 확인했다.
한서경. 이유도 없이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이름.
머릿속을 내내 어지럽히는 그녀는 정훈이 말했던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서경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꿈이라고 착각할 만큼, 시트의 주름까지 말끔히 지우고 간 그녀의 결벽증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어도 결국엔 하룻밤 관계에 불과할 테니까. 게다가 공적인 일에 사적인 관계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가벼운 에피소드로 끝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를 다시 만나면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도대체 이토록 어리숙하고 유치한 감정은 뭐란 말인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우현이 발신 버튼을 눌렀다.
― 네. 한서경입니다.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에 가슴이 설레는 것은 술이 주는 착각에 불과하다.
“정우현입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늦었지만, 잠시 볼 수 있을까요?”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어지는 침묵이 초조하다.
― 어디로 가면 되죠?
“지난번 보았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끊긴 전화를 우현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서경이 낯익은 객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전화를 받고 서둘러 나왔지만, 막상 문 앞에 서니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심호흡한 뒤에 문을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어서 와요.”
샤워했는지, 바스 가운을 입은 우현이 그녀를 맞이했다. 웃을 때마다 눈가에 접히는 주름과 코끝으로 스며 오는 에고이스트 향이 낯설지 않다.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낯설었지만,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놀랐겠군요. 갑자기 불러내서.”
서경을 바라보던 우현이 가만히 웃었다.
“씻을래요?”
“씻고 왔어요.”
한 번의 만남으로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지만, 또다시 연락을 받고 나니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색한 태도로 서성이는 서경을 바라보며 우현이 물었다.
“내가 여전히 불편해요?”
서경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죠.”
그의 눈에 특유의 미소가 떠올랐다. 아이같이 천진한 미소 앞에 사뭇 긴장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 여겨졌다. 서경이 그를 따라 희미하게 웃었다.
“웃는 모습, 처음 봐요. 보기 좋은데요.”
이마로 흘러내리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우현이 활짝 웃었다. 성큼 다가온 그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서경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작이 어색하지만, 그의 품 역시 낯설지 않았다.
“몸은 어때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제 일은 사과할게요. 시선을 피하는 당신을 보니,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실수를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