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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서경이 말했다. 진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잘 알아. 잘 안다고! 하지만 이건 아니야. 너 이러는 거 시혁이가 알면 어떨 거 같아. 그래, 잘했다 칭찬이라도 할 거 같아?”
“시혁이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다인컴퍼니가 곧 시혁이야. 시혁이와 상관없다면 누구와 상관있는 건데? 다인이 그렇게 힘없는 회사였냐? 이번 프로젝트, 이런 식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성사될 수 있어. 그 자식, 그렇게 못 미더워?”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갈 필요 없다고 생각할 뿐이야.”
진오가 따지듯이 물었다.
“어디 한번 들어 보자. 그 쉬운 길이라는 게 뭔지. 성진그룹 정우현 만나서 도대체 어쩔 셈인데?”
“…….”
“두 달 가까이 공들여 온 일이야. 손바닥 뒤집듯이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이번 주가 고비야. 성진그룹 내부에서 ‘효명’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어. 상황이 이런데 무작정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잖아.”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정우현이 원하면 몸이라도 내어 줄래?”
제 말에 제가 놀랐는지, 진오가 주춤대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다음에 나온 서경의 말이었다.
“꼭 필요한 일이라면 그 방법도 나쁘지 않겠지.”
“뭐라고? 너 돌았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냥 그렇다는 말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서경이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미국 유학 시절에 처음 만나서 십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지만, 진오는 도무지 한서경이라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이 그토록 그녀를 맹목적으로 끌고 가는 것일까.
그녀는 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차가운 가면 속에 저를 가두고 강한 척하지만,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늘 아슬아슬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 그녀가 안타깝고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었다.
제 분에 못 이긴 진오가 문을 닫고 사라지자,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경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시선이 다시 프로 파일로 향했다.

정우현
· 나이 32세. 키 182cm 몸무게 75kg
· 성진그룹, 정현성 회장의 2남 1녀 중 첫째
· 미국 뉴욕 출생, 어린 시절을 뉴욕에서 지내다가 13세에 서울 귀국
· 서울에서 중, 고등학교를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감
· 뉴욕 NYU Stern을 거쳐 Stanford MBA 박사과정 이수
· 취미는 스카이다이빙, 윈드서핑, 승마
· 성진그룹의 실질적인 후계자로 정현성 회장의 신임을 얻고 있음
· 2년 전 귀국하여 현재 성진그룹의 호텔, 백화점, 리조트 등의 유통업을 전담함
· 세련된 외모와 매너, 친화력 있고 밝은 성격으로 그룹 내 인사들에게 평판이 좋음
· 드러난 여자관계는 없음

서경이 파일의 뒷장을 넘겼다. 드러난 프로필 외에 진오에게 따로 부탁한 오프 더 레코더에는 그의 비밀스러운 과거와 사생활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쭉 읽다 보니 몇 가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다.

호적상 모친은 정현성 회장의 아내 한숙희로 되어 있지만, 한국이 아닌 뉴욕에서 자란 과거 이력 때문인지, 생모가 따로 있다는 소문이 있음. ……드러난 이성 관계는 없지만, 끊임없는 염문설로 인해 그룹 차원에서 따로 언론 관리를 한다고 함.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으로 주변의 호의를 쉽게 얻지만,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개인주의적인 성향과 자유분방한 행동이 기업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판도 있음.

서경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진오가 건넨 몇 장의 서류에는 ‘정우현은 이러한 사람이다.’라고 결론지은 듯이 쭉 나열되어 있지만,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정우현이라는 남자의 실체가 잡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비서실을 통해서 만나고 싶다는 청을 넣었지만, 대기업 후계자인 그에게 흔쾌한 답변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째서 그는 만남을 허락한 것일까. 무엇이 그를 움직였을까. 아니, 전제가 어긋난 질문이었다. 만남을 자청한 스스로를 향해 물어야 한다. 그를 만나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설득하려면 마음을 움직일 만한 근거와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자와 모든 것을 가진 자와의 싸움은 불 보듯이 훤한 결과로 이어질 뿐이다. 어리석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부딪쳐 보고 싶었다. 부서져서 쪼개지는 한이 있어도 원하는 것을 얻고 싶었다.
서경이 마음을 굳히기라도 한 듯이 서류를 챙겨서 자신의 사무실을 나갔다.

*


호텔 수영장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나온 우현이 별관 집무실에 딸린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스탠드 행거에는 장 비서가 가져다 놓았는지, 짙은 네이비색의 슈트가 잘 손질된 채로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클래식한 스타일보다는 슬림한 정장을 선호하는 우현은 날렵한 핏의 슈트가 제법 마음에 들었지만, 오늘은 정장보다는 가벼운 차림을 하고 싶었다. 세련된 워싱이 돋보이는 데님 셔츠에 화이트 진, 그 위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블랙 재킷을 걸쳤다. 문을 열고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 비서가 고개를 숙었다.
“대표님. 차를 대기시켰습니다.”
“갑시다.”
장 비서가 앞서 가는 우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러운 웨이브 헤어에 슬림한 몸매,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재킷이 세련되고 도회적인 그의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우현은 평소 편안한 캐주얼을 즐기지만, 업무 시에는 반드시 정장을 고수했다. 그러한 점이 공과 사를 구분하는 성격의 단면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의 차림은 약간 의외였다. 오늘 저녁 약속 또한 마찬가지였다.
호텔을 빠져나오자 우현의 전용차가 별관 입구에 대기하고 있었다. 차에 오르자, 장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표님.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어째서요?”
“제주 호텔 합자 건은 광덕회가 아니라도 투자자가 줄을 섰는데, 굳이 더러운 돈을 끌어들일 필요 없다는 게 회사 이사진의 의견이고…….”
우현이 피식 웃었다.
“돈이면 다 같은 돈이지, 더러운 돈은 뭡니까?”
“하지만…….”
우현이 장 비서의 말을 끊었다.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어요. 사실 이번 합자 건은 누가 돼도 아무 의미 없는 시시한 게임 아닙니까? 말만 합자지, 누가 되든 성진의 들러리 구실을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귀한 시간 내실 필요가 없으신데 어째서…….”
대답 대신이 우현이 싱긋 웃었다.
2년 전, 우현에게 성진그룹의 유통을 맡긴 아버지는 멀리서 관조할 뿐, 어떤 사업적 관여도 하지 않았다. 프리모 호텔의 개축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우현은 제주도 부지에 호텔과 복합 레저타운 프로젝트를 직접 기획했다. 하지만 그것은 보여 주기 위한 쇼일 뿐,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투자자 선정 역시 누구와 함께 놀아 볼까를 궁리하는 재미있는 놀이에 불과했다. 실패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사업 허가가 떨어지자, 여기저기서 돈 냄새를 맡고 투자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가운데 ‘다인컴퍼니’가 있었다.
며칠 전 투자 설명회에서 인사를 나눈 최시혁이라는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선을 끄는 매력적인 외모와 자신만만한 태도.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거친 남자는 야심을 감추려는 기색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모두가 맹수의 새끼는 역시 맹수라며, 한 목소리로 수군댔다. 남자의 부친인 최 회장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광덕회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끄는 자로 깡패 건달로 시작해서 제법 돈 좀 굴린다는 인물이었다.
최근에 귀국한 최시혁이 다인컴퍼니라는 회사를 설립하자, 일선에서 물러나 조용히 아들의 뒤를 봐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음지에서 양지로 조직을 끌어올리겠다는 야심인 모양인데, 우현이 보기에는 그저 가당찮게만 보였다.
우리나라 재계가 그렇게 호락호락 곳인가. 한마디로 보수꼴통의 집합소인데, 조폭 나부랭이가 그곳에 발을 들이겠다니.
다인컴퍼니가 투자자로 나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친 듯이 웃어 댔다. 하지만 재밌지 않은가. 자신은 고리타분한 것을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자신이 준비한 쇼에 가장 적합한 게스트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성진의 정우현이 조폭을 재계에 입성시키다.’ 두고두고 노친네들 입에 오르내릴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게다가 본격적인 로비라도 하려는지, 다인 비서실에서 은밀하게 연락이 왔다.
그렇게 안 봤는데 그 역시 별수 없는 작자였다. 여자를 앞세워 수작을 부리려는 모양인데, 판을 벌였으니 노는 시늉이라는 해 볼까 하는 기분으로 만나자는 제의를 수락했다.
“큭.”
우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운전대를 잡은 김 기사와 장 비서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기다리지 마시고, 두 분은 먼저 퇴근하세요.”
미끄러지듯 차가 도착하자, 우현이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멀어지는 그의 걸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가벼워 보였다.

*


난설 입구에 도착한 우현을 맞이한 것은 비취색의 단아한 한복을 입은 중년의 여자였다.
종로 조계사 뒷골목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난설은 간판 하나 없지만, 입소문으로 유명한 한정식집이었다.
전통 가옥을 개조한 건물은, 50년 전만 해도 꽤 이름난 기생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우아하지만, 폐쇄적인 분위기의 한옥은 옛 흔적이 남아 어딘가 은밀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우현이 여자의 안내에 따라 길게 이어진 나무 복도를 걸었다. 팔각 문양으로 조각된 창호지 문 앞에 다다르자, 여자가 가벼운 묵례를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현이 방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건넸다.
“많이 늦었습니다.”
열린 창틈으로 정원을 바라보던 서경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귀하신 분 모시는 자리인데, 청한 제가 먼저 기다려야지요.”
서경이 우현을 바라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순간 당황한 우현이 잠시 말을 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눈동자였구나. 복잡한 기분이 섞여 들었지만,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보기 좋은 모양과 선명한 빛깔의 갈색 눈동자는 아름다운 모양과는 달리 어딘가 정처 없고 서늘한 분위기가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 그대로였다.
“앉으시죠.”
우현이 앉기를 청하자, 서경이 따라 앉았다.
“비서실장이라고 들었는데…… 성함이?”
“한서경입니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고집스럽게 시선을 마주쳐 오는 여자에게 흥미가 돋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긴장감이었다. 우현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시장한데,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배부터 채울까요?”

식사하는 내내 우현은 서경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딱딱한 비즈니스 정장을 벗어 던진 여자는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윤기 나는 긴 머리카락이 갸름한 얼굴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단아한 이목구비와 긴 목선, 몸의 곡선을 살려 주는 엷은 스킨색 스커트 정장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여성스러운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피하는 갈색 눈동자가 작은 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몸이 달아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어떤 남자라도 지금의 그녀를 보았다면 남자로서의 욕정을 참지 못할 것이다.
불현듯 호텔 객실 앞에 서 있던 서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몸을 관통하는 열기와는 대조적으로 머릿속은 점점 싸늘하게 식어 갔다. 정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여자의 속셈은 불 보듯 뻔했다.
제주도 합자 건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했을 테고, 머릿속은 설득할 구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저 아름다운 육체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질 것이다.
어디까지 놀아 주면 여자가 쓴 위선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까. 그 이면에는 과연 어떤 모습이 도사리고 있을까. 욕망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가식적인 것이 싫었다.
“한서경 씨, 우리 그냥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뜻밖의 말이었는지, 그녀의 긴 속눈썹이 모양 좋게 올라갔다.
“뜸 들이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서…….”
“…….”
“원하는 게 뭐예요. 제주도 합자 건?”
짧은 침묵이 흘렀다.
“네. 가능하다면요.”
마침내 가면을 벗은 그녀가 차가운 눈동자로 응시해 왔다. 예상은 했지만, 그녀의 목적은 명백해졌다. 나쁘지 않았다. 차라리 솔직한 편이 부담 없었다.
“그래서?”
“네?”
우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그래요. 김빠지게. 뭔가 준비한 게 있을 거 아닙니까?”
서경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매력적인 눈매의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어서 딜을 하라고, 어서 준비한 카드를 내놓으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서경은 좀처럼 ‘정우현’이라는 카드가 읽히지 않았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남자는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깎아 놓은 듯이 다듬어진 세련된 매너와 스타일리시한 외모가 철부지 도련님을 연상시켰지만, 부드러우면서도 사람을 휘어잡는 흔들림 없는 눈빛이 그가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좋아요. 내가 먼저 시작하죠.”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기 있는 당신 서류가방에는 나에 대한 자료가 가득 차 있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 조그마한 머릿속은 나를 설득할 구실로 가득 차 있을 테고.”
“…….”
“하지만 그런 시시하고 재미없는 카드로는 나를 움직이게 할 수 없어요.”
“…….”
“왠지 압니까?”
“…….”
“그런데도 내가 왜 이 자리까지 나왔는지 압니까?”
“…….”
“당신이 내놓을 최후의 카드를 알고 있어서. 그리고 나는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일 생각이고.”
그의 입술에 특유의 미소가 떠올랐다.
“자, 어서 말해 봐요. 그 마지막 카드가, 뭔지.”
“…….”
“당신에게 직접 듣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