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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TY SALTY SALTY
1화
프롤로그


몸을 실은 버스는 시원스럽게 고속도로 위를 질주했다. 차창 밖의 풍경이라 해 봤자 산과 논이 전부인데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쏟아지는 햇살을 얼굴로 받아 내다 불쑥 스친 생각에 건너편을 돌아보았다. 무릎 위에 책을 펼쳐 놓고 잠든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어려 있었다. 커튼을 바싹 여민 채 좁아진 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피고인 정지안에게 징역 6년을 선고한다.」
냉엄한 판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오늘부로 꼬박 6년의 수감 생활을 마쳤다. 이제는 교도관의 지시하에 움직이거나 정해진 시간표대로 생활할 필요가 없었다. 어디든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었고,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원하는 대로 볕을 쬐고, 심지어 원하는 만큼 낮잠을 잘 수도 있었다.
오래도록 꿈꾸었던 일이 현실이 되었지만 즐겁지만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실감이 안 났다. 긴 세월을 안에서 보내다 몇 시간 전에 나왔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차츰 나아지겠지.
의자에 몸을 기대자 금세 졸음이 밀려왔다. 버스 안의 가벼운 흔들림이 수마를 재촉했다. 좀 더 보고 싶은데, 아직 잠들고 싶지 않은데. 깨어났을 때 그곳으로 돌아가 있을 것 같아 겁이 났다. 필사적으로 내려앉는 눈꺼풀을 막으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햇살이 비치는 방이 보였다. 하늘색 벽지. 문학 전집과 참고서가 꽂힌 책장. 침대 위에 놓인 낡은 토끼 인형. 방 안의 풍경은 정겹고, 그리운 냄새가 났다. 액자 속엔 꼬꼬마 시절의 내가 브이 자를 그리며 웃고 있었다. 아련한 기분으로 사진을 어루만지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누나 뭐 해? 빨리 나와. 엄마가 찌개 식는다고 뭐라 하잖아.’
영우였다.
‘학교 안 갈 거야?’
학교? 그제야 거울 속에 비친 내가 교복을 입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구나. 학교에 가야 했어. 손짓하는 영우를 따라 방을 나섰다.
‘천천히 먹어, 체할라.’
시간에 쫓겨 숫제 음식을 흡입하는 영우와 나를 지켜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애들보다 당신이 더 늦었으니까 빨리 먹고 가요.’
머쓱해진 아버지의 헛기침이 들렸지만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젓가락질을 했다. 부랴부랴 신발을 신는데 다급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정영우, 실내화 살 돈 챙겼어? 책상 위에 올려놨다니까 또 안 챙겼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엄마 없으면 어떻게 살래? 어머니의 잔소리에 부루퉁해진 영우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맨날 나만 갖고 그래. 불만스레 중얼거리는 영우의 손을 잡아끌며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열린 문틈으로 하늘이 보였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이루게 해 줄 것만 같은 새파란 하늘이었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순간, 거짓말처럼 손안에 감겨 있던 온기가 사라졌다.
텅 비어 버린 공간에 우두커니 서서 아이처럼 울었다. 슬퍼서도 외로워서도 아니었다. 믿기지, 않아서였다. 교복을 입고 등교를 하던 그날의 나는, 내가 꿈꾸던 미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어째서 지금의 나는 이토록 초라한 모습인 걸까.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멀리서 근거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그저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살아가는 누구나 형태는 달라도 자의로, 타의로, 혹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불행을 떠안고 살아갔다. 알고 있었다. 삶은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며, 나의 통제 범위를 넘은 변수로 가득 차 있다는 걸.
부유하진 않지만 다정한 가족 사이에서 자라난 나의 삶은 평탄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의 삶을 토대로 미래를 점쳤을 때, 나의 미래는 화려하게 빛나지는 않아도 딱히 암울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착각했었다.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다를지 모른다는 믿음을 품었다.
바보처럼 순진했었다. 나 역시 주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보통의 인간이었을 뿐인데, 나만큼은 생의 진리에서 제외된 것처럼.
평온한 일상이 부서진 건 고등학교 2학년 겨울이었다.
내게는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동생은 친구를 좋아하고 운동장에서 뛰노는 걸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아이였다.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낙천적이고 활달한 성격으로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나이 차가 적으면 형제간의 싸움이 잦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 흔한 말싸움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외탁을 해서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거의 170센티에 달해 있었던 나와 달리 동생은 중3이 되어서도 160을 갓 넘겼을 따름이었다. 작은 체구 탓일까. 내게 있어 두 살 아래 동생은 항상 보듬고 지켜 줘야 할 어린 존재로 보였고 동생 역시 순한 강아지처럼 나를 잘 따랐다.
겨울 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지안아, 어서 가 보렴. 어서 집에 가 봐. 영문도 모른 채 선생님의 재촉을 받고 집으로 갔다. 아파트 입구엔 사람들이 벌 떼처럼 몰려 있었다.
동생은 열여섯 그해 겨울,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동생의 시신을 발견한 건 당시 순찰을 돌고 있던 경비원이었다. 발견했을 때 동생은 말간 얼굴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고 했다. 전날 눈이 많이 내린 탓에 아파트 단지 내의 누구도 동생의 죽음을 듣지 못했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화단 위엔 동생이 흘렸을 핏물이 붉게 녹아 있었다.
[부모님 죄송해요. 누나 미안해.]
책상 서랍 안쪽에서 유서가 발견되었다. 열여섯 동생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을 보며 어머니는 오열했다. 아버지는 자리를 뛰쳐나갔고 나는 멀뚱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동생을 잃었다는 슬픔보단 죽음의 연유에 대한 의문만이 머리를 메웠다.
따뜻하고 상냥한 아이였다. 당연하다는 듯 파지를 줍는 할머니의 리어카를 밀어 주던 아이였고, 사촌 동생이 놀러 오면 귀찮은 기색 없이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놀아 주던 아이였다. 그뿐인가, 친구가 많긴 또 얼마나 많은지.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통에 어머니가 하소연을 할 정도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나보다도 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을 갖고 있던 동생은 무엇 때문에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걸까. 2학기가 시작되며 성적이 심하게 바닥을 치긴 했지만 애초에 시험에 크게 연연하던 아이는 아니었다.
동생의 몸이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을 즈음 경찰은 죽음의 연유를 성적 비관으로 인한 자살로 결론지었다. 조금이라도 동생을 아는 사람이라면 납득할 수 없는 수사 결과였다.
부모님은 동생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죽음에 대한 실마리를 캐고자 했다. 암묵적인 논의가 있었던지 아이들은 쉽사리 부모님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공인중개사 일을 그만두고 아침부터 밤까지 뛰어다니며 진술서를 받아 냈다.
동생은, 아니 영우는 성적 비관으로 자살한 게 아니었다. 영우는 2학기가 시작되며 반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반에 있던, 소위 말해 일진들의 눈에 찍힌 것이 원흉이었다. 녀석들은 반 아이들을 협박해 영우를 고립시켰고 철저하게 자신들의 노리개로 삼았다.
[김진태가 영우에게 빵 심부름을 시켰어요. 초코 빵을 사 오라고 했는데 다 팔려서 메론 빵을 사다 주었더니 뺨을 때렸어요.]
[영우는 매일 김진태 패거리의 준비물을 챙겨 주어야 했어요. 미술 시간에 조각칼을 챙겨 와야 했는데 영우가 걔네들 몫까지 모두 사 왔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김진태 패거리들은 놀러 나가고 영우가 뒷정리까지 해야 했어요.]
[김진태 옆에 있던 이형신이 영우한테서 돈을 빼앗았어요. 영우가 어머니 생일 선물을 살 돈이라고 말했지만 배를 걷어차고 자기 다리 사이로 기어가라며 협박했어요. 영우가 거부하자 바닥에 침을 뱉고 그 침을 핥아 먹으라고 했어요. 저는 말리고 싶었지만 영우를 도와주면 저도 당할 것 같아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영우가 죽고 난 뒤에 김진태가 쓸데없이 입을 놀리면 죽여 버리겠다고 했어요. 걔네들이 무섭고 영우한테도 미안하고, 또 나도 죄를 진 것 같아 아줌마가 찾아와도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100장이 넘는 진술서에는 넉 달간의 악질적인 괴롭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반 아이들의 집 문턱이 닳도록 찾아가 애원하고 빌며 알아낸 진실은 참혹하고, 남루했다. 삐뚤빼뚤 서툰 글씨들은 칼날이 되어 남은 가족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영우가 홀로 길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을 때 가족들은 모두 저마다의 일로 바빴다. 아버지는 회사 내부의 심사 문제로 정신이 없었고 어머니도 외할머니의 간병을 위해 친정집을 오가느라 동생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나 역시 대입 준비를 하느라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생활을 했다.
그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열두 시가 다 되어 집에 돌아와 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영우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나, 오늘 같이 자자.’
‘이제 고등학생인데 다 큰 동생이 누나랑 자고 싶어 해도 되는 거야?’
‘싫어?’
여느 때와 달리 주눅 든 모습이 생경했다. 평소라면 뭐 어떠냐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을 녀석인데. 의아함을 숨긴 채 곁을 내어 주자 영우가 들고 온 베개를 내려놓고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누나.’
‘왜.’
‘좀 더 안아 주라.’
‘이미 안고 있는데.’
‘응. 근데, 좀 더 안아 줬으면 좋겠어.’
장난을 친다 생각했다. 마른 몸을 힘주어 끌어안으며 ‘우리 영우, 애기 다 됐네.’ 짓궂게 농을 걸었다.
‘그래서, 싫어?’
‘싫기는. 나는 네가 계속 자라지 않았음 좋겠다.’
‘내가 언제까지 꼬맹이로 있을 줄 알고? 조금만 더 기다려 봐. 금세 따라잡아 줄 테니까.’ 하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할 줄 알았던 영우는 잠잠했다. 잠들었나 싶었던 영우가 한참 후 작게 웅얼거렸다.
‘아침이 오지 않아서, 계속 누나랑 이렇게 있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구나, 생각했지만 그뿐이었다. 졸음이 쏟아졌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빨리 잠들고 싶었다. 지금은 자고 나중에 얘기를 들어 봐야겠다, 스스로를 합리화했지만 그땐 몰랐다. 나중 따윈 없다는 걸.
어째서 놓치고 말았을까. 그것이 영우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어떻게 엄마로서 모를 수 있었지? 우리 애가 이렇게 힘들어했는데, 사는 게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우리 영우가 불쌍해서라도 이렇게 흐지부지 넘길 순 없어.’
어머니가 결연하게 의지를 다지고 있을 때, 고백하고 싶었다.
저, 알고 있었어요. 영우가 힘들어하는 거, 알고 있었어요. 영우가 도움을 청하러 찾아왔는데 피곤하다는 이유로 무시했어요. 제가 그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다면, 늦게라도 물어봤으면, 영우는 살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허망하게 가 버리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내가 그 일을 말한다면 부모님은 망연해하겠지만 이내 그건 네 탓이 아니라며 말해 줄 터였다. 함께 소리 내어 울면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를 위한 참회에 불과했다. 그런 식으로 동생의 구조 신호를 외면한 나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은 확보한 진술서를 바탕으로 경찰에 재수사를 의뢰했다. 동생의 따돌림을 조장하던 패거리 중 세 명은 보호관찰과 사회봉사 판결을 받았고 우두머리 격이었던 김진태는 단기 3월에 장기 6월의 처분을 받았다. 허나 그도 잠시, 김진태의 부모는 변호사를 고용해 항소했고 녀석은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가해자들의 학부모에게 손해배상청구소송을 걸어 2,000만 원의 배상금을 받아 내긴 했지만 소송은 우리의 패배나 다름없었다.
놈들은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고 배상금은 어머니가 직장을 그만두며 벌지 못한 생활비, 진술서를 받아 내기 위해 지출한 돈, 바쁜 어머니를 대신할 외할머니의 간병인 고용비, 변호사 선임비 등을 제외하면 남는 것이 없었다.
무엇도 해결되지 않고 그저 지워지지 않는 피멍만을 남긴 채 시간은 흘러갔다. 그사이 수능을 치렀다.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동생이 죽고 쓸쓸해진 집을 나마저 떠날 순 없었다. 결국 집 근처 국립대의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다시 공인중개사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도 변함없이 묵묵히 회사와 집을 오갔다. 전처럼 가족끼리 외식을 하거나 연극을 보러 가기도 했고 거실에 둘러앉아 쇼 프로를 보며 깔깔 웃기도 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간 듯 보였지만, 아니었다. 어머니는 이따금 영우의 방에 들어가 울음을 삼켰고 아버지는 주말마다 낚싯대 하나만을 들고 바다를 배회했다.
스물한 살, 아버지는 급성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두었다. 인적 드문 바닷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터라 달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점퍼 안쪽에선 끝이 닳아 없어진, 동생의 중학교 입학식 날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나왔다. 갑작스런 이별로 흘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 또다시 외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렀다.
스물두 살, 시험 준비를 위해 친구들과 같이 도서관에 있을 때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직장 때문에 저녁에나 아파트를 볼 시간이 난다던 손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오늘 계약을 성사시키면 둘이서 치맥을 하자던 어머니의 목소리엔 소녀 같은 명랑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날 밤, 어머니와 같은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로부터 사고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의 차가 갑작스레 도로로 뛰어든 새끼 고양이를 피하려다 가로수를 들이받았다고 했다. 두 달 넘게 중환자실에서 필사적으로 삶의 끈을 붙들던 어머니는 끝내 눈을 감았다.
스물세 살, 4학년이 되어 본격적인 임용 준비로 아침부터 밤까지 도서관에서 생활했다. 많지는 않지만 부모님이 남겨 준 재산이 있어 생활비 걱정은 없었다. 가끔씩 이모가 찾아와 반찬을 챙겨 주었다.
날이 무더워지기 시작할 때쯤 불면증이 생겼다. 잠들지 못하는 밤은 그 자체로 악몽이었다. 수면제를 먹기도 했지만 매번 약에 의지할 순 없었다.
몸이라도 혹사시키면 잠이 올까 주말엔 새벽 늦게까지 동네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나면 몇 시간이나마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아슬아슬 위태로운 순간들은 많았지만 시간은 어느덧 흘러가고 또다시 피부 속으로 찬바람이 스미는 계절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