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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정의 시간 1화

1. 여름의 시작


타박, 타박.
앞코가 반질반질한 검은색 단화가 전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은하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팸플릿을 펼쳤다.
‘너와 꽃’이라는 제목의 유화 전시회였다. 은하는 서늘한 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며 사람들을 헤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도슨트(docent: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관람객들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전시회장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부산스러웠다. 조용한 분위기의 다른 전시와는 꽤 차이가 있었다.
오후 1시 51분. 2시를 9분 남겨 둔 시간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은하는 내내 펼치고 있던 팸플릿으로 고개를 내렸다. ‘7월의 작가, 입하의 유화 전시회’라는 글자가 큼지막한 제목 아래 적혀 있었다. 입하, 은하는 이름으로 부르기엔 낯선 그 단어를 작게 중얼거렸다.
은하가 입하 작가의 그림을 본 것은 지난봄, 인적이 드문 조그만 전시관에서였다. 분명 그림인데도 햇볕에 빛나 반짝이는 착각이 일 정도로 찬란한 목련. 기어코 꽃가지를 꺾는 아이처럼,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림을 향해 팔을 뻗기까지 했었다. 허공에 멈춘 손을 타고 목련의 진한 향이 흘러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 그림은 찬란했고, 강렬했다.
“안녕하세요. 이번 전시회의 도슨트를 맡게 된 큐레이터 장수영입니다.”
전시회장에 퍼지는 낭랑한 목소리에 은하가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1시 58분, 곧 2시였다.
“오늘은 입하 작가님의 첫 개인전 기념으로, 2시에 진행되는 도슨트에는 특별히 작가님이 직접 나오실 텐데요.”
전시장을 채운 사람들이 부산스러운 이유였다. 주목받기 시작한 화가의 첫 개인전이자, 그동안 얼굴 없는 화가로 활동했던 그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프레스라고 크게 적힌 명찰을 목에 건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카메라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기자님들은 약속해 주신 대로, 이쪽으로 나와서 촬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은하의 몸이 두서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에 치여 왼쪽으로 돌았다. 그녀는 부딪힌 어깨를 문지르며 아래로 향했던 시선을 들었다. 무심코 정면을 바라보던 은하의 눈동자에 짙고 붉은 꽃 한 송이가 피었다.
“그럼 입하 작가님을 소개하겠습니다.”
은하는 손바닥 두 개를 합쳐 놓은 것 같은 크기의 액자 속, 강렬하게 피어난 한 떨기 꽃에 시선을 빼앗겼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와 반대로 그녀의 발은 앞으로 향했다. 마치 자신을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 입안으로 속절없이 끌려가고만 있었다.
처음 그의 그림을 보던 그날처럼, 은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검을 정도로 붉은 꽃잎에 맺혀 있던 그녀의 눈이 무심코 아래로 떨어졌다.

여름의 시작

“안녕하세요.”
그림의 제목을 읽던 은하의 눈이 순간 딱딱해졌다.
“제 개인 전시회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
은하가 주춤거리며 뒤를 돌았다. 몇 겹씩 겹쳐 있는 사람들의 틈 사이를 지나온 목소리가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작가, 입하입니다.”
은하는 숨을 들이켰다. 정말로 삼켜진 것 같아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은하를 보면 몰랐던 것들을 알게 돼. 어떤 처절함이나 고단함 같은 거…… 동화되는 것처럼, 내 감정인 것처럼 은하의 마음이 느껴져.”

박수 소리가 잦아들었다.
전시장 안의 모든 시선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시선이 모인 곳에 서 있는 건 화가이기도 했고,
“내내 기다렸던 순간이네요.”

“나는 은하가 가여워.”

은하를 비틀고 뒤흔든 남자이기도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전시회장을 벗어난 뒤였다.
은하는 북적이는 사람들을 헤치고 로비를 가로질렀다. 길가로 나오자 끈적한 더위가 그녀의 온몸을 감쌌다. 주먹을 쥐고 허리를 숙인 은하의 이마에서 땀이 떨어졌다. 턱 선을 따라 떨어지는 땀방울이 바닥에 동그란 자국을 냈다.

“나는 은하가 가여워.”

뒷목에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달라붙을 정도로 땀이 났다.
지독했던 그날처럼.

* * *


은하는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게 만들 정도로 시린 햇살이 누군가의 등장에 막히기 전까지.
눈꺼풀을 들어 올린 은하가 고개는 고정한 채 눈을 위로 치켜떴다. 책상에 손을 짚고 선 소년의 미소는 햇살보다 더 시렸다. 다시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이거.”
은하의 책상에 조그만 공책 한 권이 놓였다. 두 갈래로 찢어져 있던 공책은 넓은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진 채였다. 공책을 확인한 은하는 내심 놀랐지만,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꼭 깨물었다.
“네 거지?”
“…….”
“주웠어. 소각장에서.”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을 아래로 내린 은하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짧은 손톱이 손바닥 가운데를 거칠게 쓸었다.
“내 거 아냐.”
“네가 여기에 그리는 거 봤어.”
“내 거 아냐.”
은하는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네가 버리는 것도 봤고.”
개구진 목소리에 은하의 미간 위로 주름이 새겨졌다.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줄은 몰랐네.”
마디가 굵고 긴 손가락이 은하를 가리켰다.
끼이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은하는 자신의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공책을 쥐고 일어서 곧장 뒤로 향했다. 빽빽하게 모여 있는 철제 사물함 옆, 쓰레기통으로 걸어가 망설임 없이 공책을 버렸다.
“그걸 왜 버려?”
“상관하지 마.”
은하의 눈매가 예민해졌다.
“보기보다 멍청한 거야? 소각장에 버린 쓰레기를 주워 가지고 올 정도로?”
“박은하?”
“최인욱.”
반팔 셔츠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 속 이름을, 은하가 씹어 뱉듯 읊조렸다.
“말 걸지 마.”
“나는…….”
은하는 인욱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찬바람이 부는 착각이 들 정도로 세차게 돌아서서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딩동댕동. 수업이 시작되는 종소리에도 은하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발에 힘을 주어 걸을 때마다 살갗에 땀방울이 맺혔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는 것도 잊은 채 그녀는 무작정 걸었다. 해가 질 때까지.

“어디 갔다 왔니?”
은하가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차분한 표정의 남자와 잠시 눈을 맞추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뗐다.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학교요.”
짝!
남자의 손이 은하의 뺨을 거침없이 갈랐다. 옆으로 얼굴이 돌아간 은하는 입안에 몽글몽글 맺힌 피를 뱉지도 삼키지도 못했다.
“점심에 전화 받았다.”
“…….”
“2교시부터 보이지 않았다면서.”
남자의 손이 다시 한번 은하의 뺨을 갈랐다. 그녀의 뺨에 가늘고 긴 생채기가 났다.
“보육원에 널 찾으러 온 사람이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뛰쳐나갔다고 말했으니까.”
“…….”
“상처는 급하게 뛰어오다가 넘어진 걸로 해.”
남자의 손이 다시 위로 향하자 은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뺨을 때릴 거라고 생각했던 손은 그녀의 어깨 위에 닿았다. 토닥토닥, 아기의 등을 도닥이는 것 같은 부드러운 손길에 은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엄마가 찾으러 온 줄 알았다고 해도 좋겠구나. 데리러 온 줄 알아서 헐레벌떡 뛰쳐나갔다고.”
깨문 입술이 짓이겨졌다. 입 전체를 감도는 피비린내에 은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알았니?”
“……네, 원장님.”
“들어가.”
은하가 기계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손에 힘이라곤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