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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거 몰라? 건축학과 석준경, 울면서 고백하면 다 받아 준대.



[1부. 석준경 ]

01. 실연의 이유


이묵주는 엄청난 소음과 함께 등장했다. 당시 나는 디자인 하우스 설계 공모 준비로 인해 이틀 밤을 샌 상태였다. 어설프게 취한 척하는 세희를 데려다주고 돌아와 근 다섯 시간째 모형 만들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오차에도 모형은 쉽게 틀어졌고 나는 뜻대로 되어 가지 않는 작업에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시작은 단순한 말다툼 소리였다.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베란다 창 구조가 최악이었다. 이중으로 문을 꼭꼭 걸어 잠가도 방음이 잘 되질 않았다.
이사를 가려고 마음먹은 것은 오래전이었으나 일에 치여 미루다 보니 벌써 3년째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사무소와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덜컥 계약을 해 버린 것이 잘못이었다.
“꺼져. 개자식아.”
“내가 잘못했다니까.”
“이거 놔.”
새벽 3시. 쥐 죽은 듯 고요한 여름밤. 남녀의 목소리는 마치 에코처럼 오피스텔을 뒤흔들어 놓았다. 잠을 자는 사람을 깨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깨어 있는 사람의 신경을 거스르기엔 충분했다.
나는 못 들은 척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10분. 20분. 그리고 30분. 오피스텔 앞 주차장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경보음이 울리기 직전까진.
오늘 저녁까지 무지막지하게 비가 왔었고, 덕분에 지상에 주차된 차라곤 경비 아저씨의 소형차와 자정을 넘어 들어온 내 차뿐이었다. 아저씨의 차엔 딱히 다른 경보 장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저 소린 내 차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는 모형 디자인 하우스의 지붕을 내던진 채, 차 키를 들고 나왔다. 우리 집은 5층이었다. 몽골인 수준의 시력은 아니더라도 지금 내 차 앞 유리에 처박힌 저것이 무엇인지는 아주 잘 보였다. 벽돌이었다. 뽑은 지 한 달도 안 되는 내 차에게 죄가 있다면 새벽에 치정 싸움을 하는 얼간이들 사이에 운 나쁘게 끼어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관을 통과했다.
“누나, 너 미쳤어?”
“나도 실수야. 너한테 던지려 그랬는데.”
“진짜 왜 그래. 내가 미안하댔잖아. 어젯밤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어, 그래. 들었어. 취해서? 그럴 수도 있지.”
근처에 가서 경보음부터 해제했다. 어둠 속의 남녀는 내가 등장하건 말건 여전히 싸움 중이었다. 나는 겨울날 눈 결정처럼 박살이 난 앞 유리를 확인하고 차에 기대어 섰다.
“누나도 좋았잖아. 그럼 된 거 아냐?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좋아? 내가? 넌 되게 좋았나 봐요? 술김에 마음에도 없는 여자랑 자서?”
“에이 또, 서운한 소리 한다. 마음에 없긴, 누난 언제나 내 마음속 일등…….”
“그럼 거기서 난 빼. 다른 여자들 사이에 복잡하게 끼어 있는 거 질색이니까.”
목소리를 듣고 둘 중 하나가 이묵주라는 걸 알았다. 나는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이묵주가 우리 오피스텔에 이사 온 지 이제 반년. 이묵주가 남자와 있는 걸 딱 두 번 봤는데 두 놈 다 상태가 저따위였다. 이묵주의 취향이 거지 같은 건지 아니면 거지 같은 놈들만 이묵주에게 꼬이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그랬다.
질척거리는 남자를 매몰차게 떼어 낸 이묵주는 휘청거리며 돌아섰다. 부는 바람에 옅은 향수 냄새가 났다. 멀쩡한 남의 차에 벽돌을 처박은 걸 봐서 취했을 거라 짐작했으나 맨정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묵주는 코앞에 있는 날 보지 못한 채 부딪혔는데 나는 매가리 없이 튕겨 나가려는 그녀의 팔을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내 어깨에 얼굴을 들이박은 이묵주가 슬로우 모션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죄송합…… 미안.”
말과는 달리 눈빛이 전쟁터에서 적군을 만난 군인처럼 표독스러웠다. 휘청이며 저만치 가는 이묵주를 붙잡기 위해 남자가 달려왔다. 둘은 옥신각신했다. 하지만 전쟁은 파괴력에 비해 허무하게 끝났다. 이묵주는 못 이긴 척 절 부축하는 남자에게 이끌려 오피스텔로 향했다. 나는 합의는 고사하고 현관 입구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날 보던 이묵주의 눈빛 때문이었다.
이묵주는 늘 나를 저런 눈으로 봤다. 12년 전 여름, 잔뜩 젖은 하복 차림으로 덜덜 떨며 내게 고백하던 그때, 그 고백을 고민해 보지도 않고 거절했던 그 순간 이후론 쭉 그랬다.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무너져 내리던, 그러나 울기는커녕 새까맣게 투지에 타오르던 눈동자.

이묵주는 내가 고백을 거절했던 최초의 여자애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날 보던 그 아이의 눈빛이 너무,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 * *


이묵주를 만난 건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고아였던 나는 당시 후견인인 강일중 검사의 집에 7년째 얹혀사는 중이었는데 이묵주는 그의 딸인 세희의 수많은 친구들 중 하나였다.
자수성가한 검사와 재력가의 외동딸 사이에서 태어난 세희는 매해 생일 파티를 성대하게 치렀다. 그날은 세희의 열일곱 번째 생일이었다.
시끌벅적한 바깥공기완 달리 나는 2층 맨 끝 내 방에 처박혀 때아닌 묵언 수행 중이었다. 그 집에서 날 학대했다거나 세희와 함께 사는 걸 들켜선 안 된다고 강요했다던가 하는 신파적인 이유였다면 내 성장 과정이 좀 더 있어 보였겠지만 단순히 성가셨다.
그맘때쯤의 여자애들은 시끄럽고 호기심이 많았다. 세희와 나의 관계는 거기에 불을 붙이기에 딱 좋은 주제였다. 다행이도 세희의 부모님은 개방적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내가 제 딸과 함께 사는 걸 숨기지 않았다.
다만 거짓말은 약간 보탰는데 난 시정잡배의 아들에서 졸지에 양부모를 잃은 검사 친구의 불운한 아들로 탈바꿈해야 했다.
나는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볼륨을 최대한 올렸다. 끝을 뾰족하게 깎아 놓은 연필 중 하나를 쥐고 수학 문제집을 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성적으로도 가고 싶은 학교는 충분히 갈 수 있었지만 이왕이면 꼬리가 아니라 머리통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이묵주는 심각한 길치였다. 많은 방들 중에 하필이면 2층 구석의 내 방을 화장실로 착각하고 열어젖힌 걸 보면 그랬다.
나는 자꾸만 틀리는 수학 문제를 신경질적으로 되풀다가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멍청히 얼어붙어 있는 이묵주를 맞이했다.
“왜?”
나는 이어폰을 빼고 물었다. 이묵주는 창백한 얼굴을 더 창백하게 물들이더니 말했다.
“아, 화장실.”
“계단 내려가서 오른쪽.”
용건을 끝내자마자 이어폰부터 다시 꽂았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던 시선은 조만간 사라졌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이묵주의 얼굴만은 고작 한 번을 보고 기억했다. 가만히 두면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인상의 여자애였다.
이묵주는 그 뒤로도 종종 집에 찾아왔다. 당연하게도 늘 세희와 함께였다. 두 번째 마주치던 날 세희는 이묵주를 내게 이렇게 소개했다.
“인사해, 오빠. 여긴 묵주. 우리 반에서 나랑 제일 친한 애야.”
이묵주는 솔직한 아이였다. 그때 세희를 쳐다보던 두 눈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슨 헛소리야.
나는 눈치가 빨랐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사람의 분위기를 읽는데는 도가 텄는데 이묵주가 그리 티를 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세희의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한눈에 봐도 세희와 묵주는 비커에 든 물과 기름처럼 겉돌아 보였다. 제일 친한 애? 설마, 제일 안 친한 사이겠지.
나는 이묵주가 왜 수많은 아이들 중 헛소리를 늘어놓고 친하지도 않는 세희를 따라 우리 집에 놀러 오는지 얼마 가지 않아 알게 되었다.
종종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을 때마다 조용히 따라붙던 시선.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수줍게 굳어지던 얼굴. 열아홉밖에 안 됐지만 나는 그런 시선에 익숙했고 그게 무얼 말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너는 나를 좋아해.
다른 여자애들처럼. 그렇지?
열아홉, 알맹이는 여전히 개망나니였던 나는 세희의 집에 함께 살게 되면서 사람 좋은 모범생 흉내를 냈다. 그건 나를 고아원에서 꺼내 준 세희 부모님에 대한 예의였고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죽은 어머니를 닮아 봐 줄 만한 얼굴과 부모를 잃은 고아라는 배경은 어른들의 연민과 여자애들의 음심을 동시에 자극했다. 방과 후나 쉬는 시간에 나를 따로 불러 고백하는 여자애들은 없었지만 그게 세희가 수를 썼기 때문이라는 것은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세희는 허술했다. 이따금 나는 거실 휴지통이나 쓰레기봉투에서 분홍색 편지 봉투나 초콜릿, 선물 상자 같은 걸 발견했다. 전부 내게 온 것들이었다.
아마 세희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묵주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이묵주가 나를 좋아해서 이 집에 놀러 왔던 것처럼 세희 역시 이묵주와 함께 있는 날이면 티가 날 정도로 내게 친근하게 굴었다.
처음엔 일종의 소유욕이었을 것이다. 관심에도 없던 장난감을 친구가 갖고 싶어 하면 불현듯 버리기 싫어지거나 새삼스레 흥미가 생기는 그런 거. 어쨌든 세희는 평소엔 하지 않던 스킨십이나 얼토당토않는 부탁을 하기도 했는데, 나는 여느 때라면 거절했을 그것들을 모두 받아 주었다. 이묵주는 표정 없이 눈을 내리깔고 양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마다 하얀 손등에 파란 핏줄이 도드라졌다. 나는 그런 이묵주를 보는 게 좋았다.
이묵주가 집에 돌아가고 나면 세희는 늘 그렇듯 그 아이 이야기를 했다. 말이 이야기지 굳이 따지면 험담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묵주 엄마는 아파서 병원에 있대. 애들 말론 불치병이라 오래 못 산다고. 아빠란 사람이 병간호한다고 와 있는데, 여태껏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지금 나타난 거래. 보험 아줌마가 울 엄마한테 말하는 거 우연히 들었거든. 보험료 때문이라 그러더라. 아줌마 죽고 나면 묵주한테 보험료가 엄청 나올 거라고. 그동안 도박하러 돌아다닌다고 집구석엔 코빼기도 안 비치던 인간이 십몇 년 만에 나타나서 저런다고 엄청 욕하더라구. 오빠, 우리 묵주 어떡해? 엄마 죽고 나면 묵주 그런 사람이랑 같이 살아야 하는 거야?
수능을 앞둔 늦가을의 내 생일, 식탁 앞에서 이묵주와 나는 다시 만났다. 세희의 부모님은 세희의 생일날 그랬듯 왁자지껄한 파티를 열어 주고 싶어 했으나 내가 마다했다. 나 같은 놈이 태어난 게 뭐 축하할 일이라고.
죽은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생일상은 꼭 차려 주었는데, 나를 낳고 늘 힘들기만 했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미역국을 떠먹는 것도 죄스러웠다. 어머니가 곁에 없는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세희의 아버지는 세희의 친구들 가운데 이묵주를 제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들 중 가장 가난하고 가장 파란만장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지만 가장 예의 바르고 모범생이었기 때문이었다.
6인용 식탁의 한 자리를 차지한 이묵주는 가정교육을 잘 받은 아가씨처럼 밥을 먹었다. 그럼에도 부담스런 표정은 숨기지 못했는데 세희의 부모님이 뭐라고 묻거나 칭찬할 때마다 석고상이 살아나 미소 짓는 연습을 하는 것처럼 어색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웃었다. 입술 위로 이묵주의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눈을 맞추진 않았다.
세희는 생일 선물이랍시고 고급 만년필을 줬다. 필기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할 만한 고가의 한정판 제품이었다. 이묵주는 선물 같은 건 준비하지도, 준비할 생각도 없었다는 양 굴다가 집에 가기 직전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나 주는 거야?”
“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갈게요.”
목도리였다. 몇 군데 엉성한 구석이 있는 걸 봐선 기성품은 아니었다. 나는 집에서, 학교에서 홀로 앉아 열심히 목도리를 짜고 있는 이묵주를 상상했다. 엄청나게 안 어울렸다. 식탁 위에서 어색하게 미소 짓던 이묵주만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