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테라 님.”
“세, 세크 백작님!”
그리고 달의 궁 정원에서 익숙한 관절을 만났, 아니 할아버지를 만났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가 한 걸음씩 내게 다가오려고 하기에 얼른 그 앞으로 달려갔다. 백작님이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하시려는 것도 그만두게 했다. 할아버지의 관절을 응원하면서 온종일 정원에서 인사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테라 님 덕분에 망고부가 살았습니다. 농가에서 그동안 얼마나 성화였는지.”
“아, 아니에요. 그냥 생선 자르기인데요.”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지금까지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태양의 나라에서 망고 농장이란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진 기적이지, 신의 은총은 아니니…….”
하긴, 원래 망고나무 종자 자체가 없었다고 했지. 전부 수입해서 키우고 있는 것이라고 들은 기억이 났다.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인간의 힘이 더 대단하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생선들만 안되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운명도 안타까운데 신의 은총이라는 이유로 먼 궁까지 끌려와서는…….”
그는 혀를 끌끌 차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주 잠깐, 그가 생선이 아닌 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까. 신의 뜻 때문에 이곳에 오게 된 건 나나 생선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안타깝습니다, 참. 도와줄 수도 없고.”
“그, 그렇죠?”
“네. 그나마 테라 님께서 한 번에 고통 없이 죽여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보통 솜씨가 아니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뭔가 등골이 싸늘하다. 내 몸이 딱 반으로 갈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죽음은 곧 영혼의 자유를 찾는 일이죠. 테라 님께서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아, 아뇨. 아닙니다. 저기 그럼 저는 들어가겠습니다.”
어쩐지 그와 계속 대화하고 있으면 영혼의 자유를 얻을 것만 같아 오싹했다.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그의 아픈 관절을 외면한 채 궁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나는 곧바로 라프 님의 방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전해 주려고 했던, 아니 정확히는 어젯밤부터 전해 주고 싶었던 꽁지깃 대금을 전해 주어야 했다.
똑똑.
그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반응은 없었다.
“후우.”
어째서인지 안심했다. 사실 그가 불편했다. 미안하기도 했고.
어제 솔과의 만남을 통해 확실하게 알았다. 결국, 라프 님의 말이 옳았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에게 나를 데리고 나가 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달의 나라에서 그가 응당 가져야 하는 행복을 쟁취하면서 살아가야 했다. 그러니까 절대로 솔과 있었던 일을 그에게 알려서는 안 되었다. 신경이 쓰이게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는 방에 없으니, 나는 그의 방문을 이리저리 훑으며 돈주머니를 걸어 둘 만한 곳이 없는지 찾았다.
그리 꼴사납게 그의 방 앞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느닷없이 문은 열렸고, 나는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그는 한 손에 몽둥이를 대신할 수 있는 막대기를 들고 있었는데 마침 목욕을 막 끝낸 사람처럼 가운 하나만 가볍게 걸쳤을 뿐이었다. 노크 소리에 물기를 제대로 제거할 수 없었는지 그의 금발에서는 물이 한두 방울씩 사르르 흘러내리기도 했다.
“씻는데 집요하게 문에서 비비적거리는 소리가 나니, 변태가 찾아온 줄 알았습니다.”
나는 그다지 문 앞에서 비비적거리지 않았다. 그저 주머니를 걸어 둘 마땅한 곳을 찾고 있었을 뿐이다.
“저는 라프 님 방에서 변태가 나오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다 벗고 계셔서요.”
“다 벗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문 앞에서 학학거리는 소리를 내던 사람한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몽둥이를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어느 변태가 라프 님을 노리기에 이렇게까지 경계를 한단 말인가.
“궁 안에서는 금발이 특이한 탓인지……. 며칠 전부터 시녀 몇 분과 병사 몇 분이 자꾸 추근대는 통에…….”
“……병사?”
뭔가 굉장한 소릴 들은 것 같아서 되물었다.
“테라.”
그는 대답 대신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얼굴을 내게 쑥 내밀었다. 그의 몸에서 묘한 습기가 느껴졌다. 밀려오는 비누 향기는 무척이나…….
“……냄새.”
나의 어깨 근처에서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냄새?
잔뜩 일그러진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에게서 좋지 못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생선의 비린내가 아닐까.
“냄새나는 것은 필요 없습니다.”
그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문을 닫으려고 하기에 필사적으로 문에 발을 끼워 넣었다. 돈만 주면 끝나는 일을 굳이 질질 끌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정말이지…… 테라 당신이라는 사람은……. 어휴. 왜 온 겁니까.”
지난번 일에 아직도 마음이 상한 걸까, 그는 꽤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는 돈주머니를 그 앞에 흔들었다. 원래는 불새의 꽁지깃 값을 치르러 온 거지만, 지금 사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일단 안 본 눈 삽니다. 선제시요.”
“저야말로 이 코를 팔고 싶습니다.”
라프 님은 내 이마를 손바닥으로 따악 때리고는, 방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옷을 헐벗고…… 저를 왜……?
“무슨 오해를 담은 눈빛인지는 알겠는데.”
“오, 오해라뇨!”
내가 정색하여 소리 지르자 그는 한숨을 쉬었다. 뭔가 농담할 기운도 없는 모양이었다.
“……영수증. 영수증 안 받습니까? 거래를 한두 번 해 보는 것도 아니고.”
아……. 영수증. 받아야죠. 내가 성실하게 돈을 냈다는 유일한 증거가 되어 주는 그 서류를 잊다니. 나도 참 오랫동안 일선에서 떠나 있었던 모양이다. 예전에는 ‘빈틈없는 거래의 테라’로 유명했었는데.
나는 그의 방으로 들어가 적당히 소파에 앉았고, 그는 아직 더 씻으려는 모양인지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두리번거리며 그가 머무는 방을 구경했다.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라 특별한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아서 곧 흥미를 잃었지만. 다행히 라프 님은 금방 돌아와 주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모두 챙겨 입고 있어서 시각적인 편안함에 안도할 수 있었다.
“확인해 보세요.”
나는 그 앞에 돈 주머니를 내놓았다.
“흐음.”
그러나 그는 그것을 집어 들지 않았다.
“문제가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테라가 돈을 잘못 줄 리도 없으니, 정확한 금액이 들었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죠.”
“그런데 왜요? 얼른 받고 영수증 주세요.”
“냄새나는 것은 만지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 가방에서, 종이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손에 습기가 남아 있어 넘기는 것이 어려운지 속도가 무척 느렸다. 종이와 그의 손가락이 스치며 들리는 바스락거리는 간지러운 소리에 나도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테라.”
“네, 네?!”
종이 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탓일까. 갑작스러운 그의 부름에 깜짝 놀라 대답했다. 평소의 그라면 정신을 놓고 있었느냐, 한마디 더 할 법도 한데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과 적당히 가볍게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좋습니까?”
“뭐, 뭐를요?”
“뭐든지요.”
그는 영수증에 사용할 종이를 찾아내었는지, 그것을 죽 뽑아냈다. 그리고 깔끔하게 닦아 놓은 펜대를 집어 들고, 펜촉을 골랐다. 모든 행동은 지극히 느렸고, 깊은 생각을 한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제가 당신에게 건네는 모든 말.”
“그걸 왜 골라야 하죠?”
“그건…….”
그는 작은 유리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겨우 손가락만 한 그 유리병에는 작은 펜촉이 하나 들어 있었고, 그는 그것을 꺼내 펜촉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이제, 시간이 없으니까요.”
“시간이…… 없다?”
“네.”
그는 잉크병을 열었다. 펜촉을 충분히 그 안에 적시고 꺼내자, 곧 펜촉은 검은 방울을 머금었다. 그 양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테라가 얼마나 제게 관심이 없는지는 잘 알았습니다. 아마 잊었겠죠. 제가 이 영수증을 쓰고 나면, 좋든 싫든 달의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는 시에라 씨의 심부름으로 이곳에 물건을 배달하고 그 비용을 받으러 왔다. 그것이 이 나라에서 그가 해야 할 일 전부였다.
“미안해요. 잊은 건 아니에요.”
그에게 어제 솔과 있었던 일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고,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저기. 저, 음……. 그저, 요즘 재미있었잖아요. 부채도 만들고 팔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조금 들뜬 마음에…….”
서류 위를 스치려던 펜을 그는 잠시 내려놓았다. 아니, 놓친 걸까. 날카로운 펜촉이 종이에 걸려 쓰러지며, 머금었던 잉크를 전부 내뱉고 말았다. 서류는 전혀 쓸 수 없이 엉망이 되었지만, 라프 님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솔직한 것도 가벼운 것도 저에게는 상관없어요. 어느 쪽도 라프 님의 성격이잖아요?”
그는 다시 종이를 꺼내지도, 흘린 잉크를 닦아 내지도 않았다. 한참이나 서류 위로 번지는 잉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말이 뭔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도 상관없다.”
그는 나의 말을 굳이 반복하였다. 지금까지 보여 준 그의 행동만큼이나 무척 느리게.
“여전히 잔인하도록 솔직하시군요.”
무엇이든 괜찮다는 것이 어째서 잔인한 것과 연결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서류는 버려둔 채, 다시 내게 다가왔다.
“테라.”
그가 담아내는 나의 이름이.
“테라.”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테라.”
그가 그 자신을 위해서 부르는 나의 이름. 그의 입술이 짧은 이름을 반복해서 그릴 때마다 그의 표정도 변해 갔다. 의미를 모르는 미소로.
“태양의 나라에 와서 테라는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내 옆에 앉은 그는 내 머리카락을 쓸었다. 조금 더 자란 머리카락 끝에서 그의 손이 멈추었다.
“사람을 부릴 줄 알게 되셨더군요. 제대로 예법을 지키며 웃고, 걷고, 인사하는 것을 보고 사실은 놀랐습니다.”
“그야, 배웠으니까요.”
“그래서, 조금은.”
그는 말을 멈추었다. 제 입에서 나오려는 말에 스스로 놀란 듯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말하면 저를…… 경멸하시겠지만. 그래요. 사실…….”
그는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배우고, 적응하는 동안에 테라가 많이 지쳤길, 고향만을 그리기를 바랐습니다.”
“지치기도 했어요. 그리워도 했고요.”
“그래서 저를 다시 만났을 때 이 별것 아닌 겉모습도…… 테라가 그리는 고향의 것이니, 특별하게 생각해 줄지도 모른다고. 이곳에서야 거의 유일한 것이니 가장 가까이 두고 싶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는 내 머리카락에서 손을 내려놓았고, 곧 고개도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테라는 저의 행복을 늘 빌어 주셨는데.”
늘 빌지는 않았다.
“아, 아니에요.”
“테라는 제게 기대기를 원하지 않았고, 또 제 호의를 항상 완벽하게 끊어 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가 재미있게 해 드려도 좋아하는 것으로 들뜨게 해 드려도 결국 테라는…….”
나는 그제야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어느 쪽도 상관없다, 라는 말을 돌려줄 뿐이니.”



달의 나라에 있을 때, 그는 우리 부채 가게의 특별한 손님이었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모두가 칭찬하는 신상 부채에 제일 먼저 불만을 표현하는 것도 라프 님이었다. 나는 그가 가게에 한 번 방문할 때마다 밤잠을 설쳐야 했다. 그가 나에게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씩씩거리느라.
‘뭡니까, 이 형편없는 색상은. 올해의 유행 빛깔을 대충 발라 놓으면 좋다고 사 갈 줄 알았습니까?’
‘유, 유행과 관계없어요! 예쁘니까 이 색을 골랐다고요!’
‘어쨌든 미묘하게 촌스럽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테라 양은 센스가 없으시군요. 이래서야 이 부채 가게의 미래가 걱정입니다.’
손님인 주제에 참견이 얼마나 알뜰살뜰한지. 하지만 나는 지지 않고 소리치곤 했다.
‘그쪽이 걱정할 바가 아니거든요!’
‘잘 모르고 계시는 모양인데, 지금 테라 양은 굉장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네?’
‘부채를 만드는 감각을 조금 더 키우든, 꼬박꼬박 월급을 타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남자와 혼인하시든 하셔야 할 정도의 위기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점점 잘 만들 수 있어요!’
‘……그쪽입니까.’
‘뭐가요?’
항상 싸웠다. 라프 님과의 관계에 대해 누군가 물었을 때 늘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싸움이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와 이야기할 때 나는 날카롭게 이야기하면서도 웃고 있었던 것 같다. 그도 마찬가지였고.
때때로 서로 한심하다는 눈길을 보내기도 했지만, 결국에 모든 대화의 끝은 웃음이었다. 작은 미소도 아니고, 깔깔거릴 정도로 소리를 크게 내는 웃음.
‘입 좀 가리고 웃든가요!’
‘손님은 뒤돌아보지 마시고 갈 길이나 가시지 그래요?’
‘네, 갑니다. 아주 가죠.’
‘어머, 단골손님. 부디 또 찾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나는 그가 나를 지독히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쉬지 않고 부채를 주문하는 것도 나를 괴롭히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으아아아! 열받아.’
‘어머, 테라. 오늘도 라프 님이랑 싸운 거니?’
근처의 채소 가게 아주머니는 우리들의 싸움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그래서 내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은 반드시 그와 싸운 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네. 맞아요. 라프 님은 저기 태양의 나라에서 온 수입품이나 쓰시면 될 텐데 왜 자꾸 우리 가게로 오는 걸까요?’
‘그거야 테라의 부채가 훌륭하니까 그렇지.’
‘그, 그, 그건 그렇지만 라프 님은 불평만 한다고요.’
‘이상한 일이네. 라프 님은 조금 시든 채소도 웃으면서 사 가는 편인데.’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들고 있던 당근을 집어 던질 뻔했다. 손끝이 분노로 떨렸다. 그 깐깐함이 왜 채소에서는 발동하지 않고, 부채에서만 폭발하는 건데!
‘어쨌든 테라. 라프 님은 나중에는 높은 관리가 될 손님이니까 잘 보여 두는 게 좋아.’
채소 가게 아주머니는 내게 현실적인 조언을 했지만 나는 결코 그 권력에 굴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성공해서 그보다 더 큰 권력이나 명성을 쥐게 되면 반드시 그를 짓밟아 주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