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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히트!(Be hit!) 2화
제 1장. 지피지기 백전백승 (2)


“방송국이 요새 인력난이라.”
“그래서 드라마국에 남은 연출이 그쪽밖에 없다고요?”
“뭐, 그렇게 됐네요.”
온은 황당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그래도 크다 싶었던 눈이 끝을 모르고 동그래진다. 초콜릿색의 예쁜 눈동자가 또륵 굴러간다.
“아무튼 그쪽은 싫어요. 편성 뒤로 밀어도 되니까 다른 연출자 붙여 주세요.”
“지금 되게 까탈스러운 거 알아요?”
“지금 되게 무례한 거 알아요?”
온의 꾹 다물린 입술을 바라보며 지훈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웃으면 안 돼 등신아…….
이유는 몰라도 아마 이 작가에게 단단히 미운 털이 박힌 것 같다. 그러니 쿡 하고 찔러보고 싶은 이 충동을 더더욱 눌러야만 하는데. 지훈이 씰룩거리는 입술을 물며 온을 향해 몸을 수그렸다.
“근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속삭이듯 물어 오는 목소리에 온은 짜증이 조금 섞인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몇 살입니까? 교복이 어울리는 액면가기는 한데.”
이번엔 도대체 무슨 말로 내 심기를 거스르나 보자, 하는 표정을 하고 있던 온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 들었다. 지훈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질러 버렸네. 아니 입이 근질거려서 살 수가 있어야지. 간지럽다고 다 긁을 수는 없는 노릇인걸 알면서도 말이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는지 온의 턱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딱히 근육이랄 것도 없어 보이는 매끄러운 턱이라 조금은 신기했다. 온은 예상했던 대로 올라오는 화를 삭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훈은 스스로가 미쳤다 싶으면서도 그 모습을 보니 또 참지 못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웃겨요?”
그리곤 그건 분명히 상황에 악화시키는 데 충분했다. 지훈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가요?”
온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 생긴 얼굴로 그렇게 화를 내 봤자 효과가 없는데…
“할 말 다 했으니까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훈의 시선이 일어나는 온을 따라 올라갔다. 몸집에 비해 품이 큰 니트의 소매가 온의 손등을 슬쩍 덮었다.
따라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가게를 가로지르며 걸어 나가는 단호한 뒤통수를 바라보며 지훈은 고민했다. 굳이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 그럼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가서 부국장에게 작가가 나를 깠으니 나는 못 하오, 하고 말을 하면 되고. 재준이든 누구든 다른 한가한 피디가 맡게 되겠지.
지훈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빠르게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치는 작으면서 발은 또 엄청 빠르네. 카페 밖으로 나선 지훈이 벌써 꽤 멀어진 온을 향해 최대한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작가님.”
온이 표정을 구기며 뒤돌았다.
“뭐예요.”
날씨가 춥기는 춥다. 아직 11월임에도 불구하고 밤이 되자 가을의 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온의 입에서 날리는 입김이 비싼 CG처럼 부풀었다 사라졌다.
“나, 왜 싫어요?”
“말했잖아요. 연출이 안 맞아서 싫다고.”
“그런 거 말고요.”
지훈은 설명을 잘 못했다. 제멋대로인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란 걸 스스로도 모르지 않았다. 얼마간을 입만 다물고 서 있던 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더 어려 보인다는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얼굴이 싫어요.”
뭐라고요. 지훈이 낮게 읊조렸다. 진짜로 못 들어서는 아니었다. 뜻밖의 말을 들었을 때 보통 그러듯이 단순한 감탄사에 가까웠다.
“너무 잘생겨서?”
제 머리로 생각하기엔 그쯤이 타당성이 최대치로 높은 이유였다. 온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름도 마음에 안 들어요.”
이름? 이름이 뭐가 어때서, 씨발. 세상에 지훈이가 얼마나 많은데. 길 가는 남자 열 명쯤 붙잡으면 한 명 정도는 있는 지훈이 아닌가.
“그러니까 싫어요.”
온은 휙 눈을 치켜뜨며 지훈을 노려보곤 갈 길을 재촉했다. 남겨진 지훈은 생각보다 큰 충격을 되새겼다. 얼굴하고 이름이면, 첫인상에서 알 수 있는 건 죄다 별로라는 거 아닌가? 멀뚱히 서서 볼을 긁적거렸다.
근데, 뭐 저렇게 귀여운 게 다 있지.

* * *


현관문 도어락의 비밀번호 여섯 자리가 빠르게 눌렸다. 띡띡거리는 소리가 빈틈없이 나란하다. 이 집에 들락거리는 사람이라곤 글쟁이 김온과 그의 보조 최봉뿐이다. 봉 자신은 집 안에 들어와 있으니, 저걸 누르는 사람은 분명 온이었다. 문제는 온은 저렇게 황급한 속도로 번호를 누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온은 언제나 무던하고 침착했다. 시종일관 기복 없이 평온한 그 속도.
“작가님 오셨어요?”
봉은 평소보다 다소 긴장한 얼굴로 현관문을 향해 다가섰다. 원래도 온에겐 최선을 다해 공손했으나, 지금은 최선에 최선을 더했다.
천장의 감지 센서가 툭 하고 반응하며 환한 불이 켜졌다. 봉은 빛에 그림자 진 온의 표정을 기민하게 살폈다. 작가란 섬세하고 예민한 영혼들이다. 어느 작가는 동터 오는 새벽 아지랑이를 표현하기 위해 몇날 며칠을 마루에 걸터앉아 부연 아지랑이를 쳐다보았다고 한다. 온의 성격도 그 못지않게 끈질기고 대쪽 같았다. 평소에 조용하고 침착한 만큼, 돌아설 땐 일말의 여지도 없이 칼날처럼 매서웠다.
“거절은 잘하셨어요?”
꾹 다물린 입매가 먼저 눈에 띄었다. 화가 났을 때의 습관이었다. 봉이 천천히 거실을 가로지르는 온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안 그러던 사람이 화내는 게 더 무섭다는 걸 이럴 때마다 체감하게 된다.
“앞으로 방송국은 봉 씨가 대신 가 줄 수 있겠어요?”
“네?”
“방송국 갈 일이 생기면, 봉 씨가 나 대신 가 줘요. 부탁할게요.”
문고리를 잡고 선 온의 목소리가 거실에 낮게 깔렸다. 봉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암요. 당연하죠. 뭐든 분부만 내려 주세요.
“작가님…… 저…… 근데, 오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온이 고개만 슬쩍 돌려 되물었다.
“왜요?”
“아니…… 표정이 안 좋아 보이셔서. 그러니까…… 혹시 화가 나셨나, 해서…….”
온은 대답 없이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봉은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국경까지 넘게 만든 자신의 우상은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답을 알아도 풀이 과정을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수학 문제 같았다.
“제가요? 전혀요.”
탁.
봉은 단호하게 닫힌 방문 밖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화난 거 맞네, 맞아. 그러니까 그걸 왜 물어봤어!

어려 보이는 건 온에게 일종의 콤플렉스였다. 도무지 세월 앞에 수그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외관은 사회생활에서 득이 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은 비단 지훈이 콤플렉스를 건드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래라면 웃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온은 그다지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 화가 나고 짜증이 곧 폭발할 것처럼 넘실대는 것은 오로지 그 인물이 ‘강지훈’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똑 닮은 얼굴로 기분 나쁜 구석만 쿡쿡 찔러 대며 실실 웃어 버리니까. 존재만으로도 괴로움의 반추 같은 녀석이 말이다.
온은 스탠드를 켜고 책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팔꿈치를 책상에 기대고 마른세수를 했다.
완전히, 주말 막장 드라마 클리셰 같다. 딱 질색.
“짜증 나.”
그렇게 습관처럼 말하고 나니 정말로 짜증이 났고, 곧이어 속상해졌다. 온이 눈을 질끈 감았다.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스물몇 무렵에는 이 정도로 나이를 먹었을 땐 울 일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온은 과거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나오려는 눈물을 꾹 누르고 또 눌렀다.

* * *


“봉 씨, 부탁한 자료 프린트 좀 해 주세요.”
“네? 아 넵!”
온은 시선을 노트북 모니터에만 굳건히 붙이고 있다. 동그란 안경알에 모니터가 푸르스름하게 비쳤다. 하루 종일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던 봉은 허둥지둥 인쇄 버튼을 누르고 프린터 앞에 섰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제 그렇게 살벌하게 화가 났었는데, 하루 만에 또 평소로 돌아오셨네.
온은 아침부터 대본 쓰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이미 꽤 많은 분량이 완성된 상태였는데도 게으름 피우는 법이 없다. 온은 쪽대본을 꺼려 했다. 배우에게 반전이나 결말을 미리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삼각관계의 여주인공에게 ‘너는 걔만 봐’ 하고 언질을 주는 식이다. 알고 하는 연기와 모르고 하는 연기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그랬다.
봉이 갓 뽑은 뜨끈한 종이 뭉치를 가지런히 모으며 슬쩍 곁눈질을 했다. 온의 표정은 평소처럼 어긋남 없이 무덤덤하다. 어젠 정말 답지 않게 기분이 어그러져 있었는데. 하루 종일 방에만 있었고 만난 사람이라곤 드라마 피디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봉은 자연스레 온이 만났을 강지훈 피디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훈은 나름대로 유명 인사였다. 자기주장 강한 이목구비를 제쳐 놓고도, 난잡한 여자관계에 대한 사소한 가십이 유명세에 불을 지폈다. 기억 속 지훈은 방송국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풍운아였다. 그러나 묘하게 이목을 끄는 아우라가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완전히 반대…….”
봉의 목소리에 온이 모니터 너머로 목을 쭉 빼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예? 아니요. 혼잣말이요.”
봉이 서둘러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 피디하고 우리 작가님 완전히 반대네. 생긴 건 물론이고 알맹이는 더욱 더. 지훈이 굵은 붓으로 죽죽 그린 것 같은 얼굴이라면, 온은 세필로 공을 들여 그려 낸 얼굴이었다. 성격도 그와 비슷하게 평행선을 달렸다. 하나 있는 공통점은 둘 다 몇몇 연예인 서러울 정도로 잘났다는 정도랄까.
“작가님 여기.”
온이 모니터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종이 뭉치를 받아 들었다. 두께가 제법 두껍다. 아무래도 배경이 일제강점기인 드라마를 쓰다 보니 이것저것 고증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번 드라마는 온에게도 제법 큰 도전이었다. 그러니까 잡생각은 금물이다. 습관적으로 안경 쓴 콧대를 찡그리던 온이 불현듯 봉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봉 씨?”
“네?”
“생각난 김에, 방송국 좀 다녀올래요?”

* * *


주르륵. 지훈이 무료한 얼굴로 숟가락 위의 멀건 액체를 떨어뜨렸다. 이게 북엇국이야, 북어 가루 국이야. 재준은 먹을 생각은 않고 몇 번이고 손장난을 반복하는 지훈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야. 너 먹는 거 가지고 자꾸 그럴래?”
지훈이 코웃음을 쳤다.
“먹는 거? 넌 이게 먹는 걸로 보이냐? 완전히 돼지 콧물 같은데.”
“나 먹고 있거든.”
“난 안 먹을란다.”
지훈이 숟가락을 식탁 위로 패대기쳤다. 쇠와 나무가 맞닥뜨리며 쨍그랑 하는 제법 요란한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늦은 점심시간에도 불구하고 제법 사람이 찬 식당 안의 이목이 순간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재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구내식당 오자고 한 내 잘못이지. 그래도 동기라고, 휴게실에서 퍼질러 자던 놈 밥 좀 먹여 보겠다고 데려왔더니만.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재준은 숟가락질 바로하기 홍보대사처럼 정갈한 손놀림으로 밥을 떠먹었다. 지훈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괜히 씨근덕거렸다. 그 때문에 결국 재준 역시 몇 숟갈 뜨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아야만 했다.
“너 무슨 일 있냐?”
“네니오…….”
말끝을 질질 끄는 본새가 은근히 사람 화를 돋운다. 학생부에 끌려와 앉은 날라리 고등학생 뺨치는 태도다.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아니응.”
“……언제 철들래?”
“다음 생에는 들겠지.”
이번 생에는 계획이 없다는 말이다. 지훈을 안 세월만 햇수로 10년이 넘어간다. 근데 어째 갈수록 인간이 종잡을 수 없어지는 것 같았다. 사람이 이렇게 한결같기도 쉽지 않다. 교복 입었던 시절부터 바뀐 게 아무것도 없다니.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면 딱히 가리는 것 없이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놈이, 하지도 않던 반찬 투정을 부리는 폼이 딱 봐도 맘에 안 드는 게 있는데. 보아하니 얘기해 줄 것 같지는 않고.
“김온 작가님 새 작품 맡게 됐다면서 왜 그렇게 죽상이야? 그거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인지는 아냐. 윤 피디님은 하던 드라마 관두고라도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
지훈이 한쪽 눈썹을 쓱 치켜세웠다. 고귀하신 작가님은 너랑 같이 하고 싶으시단다. 이 사랑하는 친구야.
“나 까였는데.”
뜨거운 국물을 식히며 떠먹던 재준이 숟가락을 우뚝 멈췄다. 콜록 콜록. 그러다 목에 걸린 국물 때문에 잔기침을 반복했다. 지훈은 물을 들이키는 친구를 바라보며 홀쭉한 배를 쓰다듬었다. 그냥 먹을까. 배고프네.
“뭐라고?”
“작가가 나 깠다. 나 싫대.”
“왜?”
“얼굴이 싫대.”
뭐? 재준이 귀를 의심했다.
“이름도 싫대. 아니 지훈이가 뭐가 어때서. 우리 할아버지가 몇 달 동안 공들여서 지었다 그랬다고. 솔직히 개뻥 같지만.”
“그 작가님이 그랬다고? 네가 꿈꾼 거 아니고?”
“내가 돌았냐.”
“그 작가님이 그런 말을 하실 분이 아닌데.”
“아이고, 아—주 깊으신 신뢰 관계네요.”
이상한데, 그럴 리가. 재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훈이 삐딱하게 웃으며 젓가락으로 고구마 줄기를 쿡쿡 찔렀다. 그러다 무심코 시야에 들어온 누군가 때문에 손장난을 멈추었다.
“뭐야, 저 곰은?”
재준이 지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배식을 받고 있는 덩치 큰 남자가 한 눈에 띄었다. 손에 들린 식판이 인형 장난감 같아 보이는 사이즈다. 재준은 휴지를 뽑아 입가를 닦았다.
“아. 최봉 씨네.”
“성이 최고 이름이 봉은 아니겠지.”
“맞아.”
“우리 할아버지보다 더 심해. 이름 진짜 성의 없어.”
“남의 이름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니야.”
곰은 밥을 수북이 쌓은 식판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자리를 잡고 앉는다. 볼까지 발갛게 물들었다. 뭐가 그렇게 신날까.
“누군데?”
“너 몰라?”
“좆도 모르니까 빨리 알려 줄래? 나 성격 급하거든.”
“김 작가님 보조잖아.”
무관심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던 지훈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래?”

* * *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휴게실을 나다니는 직원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직장인의 세계란 다 그런 법이지만, 봉은 방송국에 올 때마다 괜히 주눅이 들곤 했다. 글 쓰는 일을 동경했고 김온이란 작가를 존경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정말 좋아하고 있다. 그래도 지갑에서 명함을 꺼낼 수 있다는 건 뭔가 어른의 상징 같지 않은가.
멍하니 복도에 서 있던 봉이 주춤거리며 자판기 옆 의자에 큰 덩치를 욱여넣었다.
“역사 전문가 소개해 달라고 협조 요청…… 했고, 원하는 제작사 전달했고…… 또…….”
온이 봉에게 시킨 심부름은 총 세 가지였다. 두 가지는 끝냈다. 문제는 마지막이었다.
‘부국장에게 다른 피디를 원한다고 말하기’.
다른 인력은 없습니다. 무조건 강 피디와 진행하여 주세요. 기획팀에 캐스팅부터 미리 시작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부국장이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하는데, 겨우 보조인 자신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곤란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봉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안녕?”
고개를 한참이나 들어 올려야 했다. 봉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형광등 불빛을 등진 남자가 씨익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방송국을 드나들며 일면식은 있어도,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강지훈이라고 하는데.”
“아, 안녕하세요.”
주춤거리며 일어나려고 하는 봉을 지훈이 다시 붙잡아 앉혔다.
“편하게 있어.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사인데, 뭘?”
답지 않게 생글생글 웃는 것이 이상하다. 기억 속 지훈은 일단 태어났으니 살아 본다는 표정을 하고 의자에 축 늘어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쭉 뻗은 눈썹이며 긴 눈매가 전체적으로 차가운 인상이라 얼굴에 늘 묻어 있는 무심함마저 살벌하게 느껴졌다.
지훈은 뭐랄까,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듯했다. 알고 지내는 막내 작가 하나가 말하길, 강지훈은 감독이 아니라 배우 같다고 했다. 하지만 봉의 생각은 달랐다. 배우라기 보단 모델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호리호리한 몸에 팔다리가 쭉쭉 잘도 뻗었다.
“부국장한테 피디 바꿔 달라고 했다가 뺀찌 먹었다며?”
말투는 가벼운데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색하게나마 웃고 있던 봉의 얼굴이 차츰 굳어 든다.
“절대 나쁜 의도는 아니었고요, 그게…….”
“됐어, 나 그런 거 신경 쓰는 찌질이 아니야. 편하게 생각하라니까.”
지훈이 환히 웃었다. 이제까지 본 지훈의 웃음이라곤 한쪽 입꼬리만 슬쩍 당겨 짓는 비웃음뿐이었는데, 환하게 웃으니까 의외로 차가움이 덜해 보인다. 눈꼬리가 휙 접히는 게 특히 그랬다. 잘생긴 사람이 웃어 주기까지 하니 경계심이 한결 누그러졌다. 봉은 지훈이 건네는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두 손으로 넙죽 받아 들었다.
“나 빠른 년생 서른이거든. 우리 보조님은?”
“아 저는 스물다섯…….”
“뭐?”
스물다섯?? 서른다섯 아니고? 지훈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온 ‘거짓말 치지 마’란 말을 고이 접어 삼켰다.
그래. 액면가가 좀 양심이 없을 수도 있지. 세상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까. 충분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럼 내가 말 놔도 되나?”
“아, 네. 그럼요.”
봉은 대답하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뭘 이제까지는 안 놓은 사람처럼……. 정말 당당하게 자연스럽다.
“왜 작가님이 직접 안 오고 보조님이 왔어? 부국장 만나러 온 거 아니야?”
“그것도 있고 겸사겸사……. 작가님이 일제강점기 사료 때문에 전문가 필요하다고 하신 것도 있어요.”
“감독인 내가 있는데 나한테 말을 하지.”
강지훈이 원래 이렇게 상냥한 사람이었구나. 봉은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하여 생각 중이었다. 그리고 지훈은 휴게실 유리에 비친 제 표정을 보고 토할 뻔했다.
“작가님이 나 싫다지?”
“아뇨! 아뇨 절대. 싫어서 그러신 게 아니라, 연출 스타일이 안 맞아서 그러신 거라고 생각해요.”
“생각해요?”
“……그렇게 말씀하신 건 아니지만요.”
봉이 시무룩한 얼굴로 큰 덩치를 수그렸다.
지훈은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어차피 작가가 무슨 이유로 자신을 거절했든 별 상관은 없다. 결국은 같이 찍느냐 마느냐 아니겠어. 지훈은 온이 감방에 다섯 번쯤 다녀온 파이브스타라도 찍어 보고 싶다고 마음먹었으므로.
참 잘났다. 봉은 다리를 꼬고 한쪽 팔을 의자에 걸친 채 시계를 보고 있는 지훈을 보며 새삼 감탄했다. 같은 황인종인데 콧대가 저럴 수도 있구나. 옷걸이가 좋으니 평범한 치노팬츠에 무늬 없는 티를 입어도 태가 났다. 피디니까 공부도 잘했겠지. 누군가가 말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고.
“오후 4시? 꽤 낮이지만 뭐…….”
“……네?”
“술 마시자.”

* * *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고치기 힘든 만큼이나, 일찍 일어나는 습관 고치기도 힘들다. 온은 늘 그렇듯이 새벽 6시 반에 눈을 떴고, 일어나자마자 양치를 했다. 왜 굳이 6시 반인가. 그건 온도 알지 못했다. 1교시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일어나야 하는 시간인가, 하고 추측만 해 봤다. 이십대의 언젠가부터 온은 늘 새벽같이 일어났으므로.
하루가 여섯 시간 정도 모자란 사람처럼 바쁘면 몰라도, 프리랜서의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일찍 기상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대단히 부지런하다고 스스로 치켜세우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다. 할 것도 없는데 뭐 하러.
날이 추워지면 해도 늦게 뜬다. 푸르스름한 창문 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커피를 마시다, 깔끔병이 도져서 청소를 했다가, 노트북을 켜 놓고 책상 앞에도 앉아 봤다. 채 한 줄도 되지 않는 대사를 여섯 번 쯤 썼다가 지우고 나서야 글 쓰는 것을 포기했다. 억지로 무언가를 써내려 해봤자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올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