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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하불명 4화
第一章. 형문산의 사냥꾼과 사자맹의 이공자 (4)


“차 드세요.”
그는 삼복이 내온 약초 우린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뜨거운 기운에 속이 느른하게 풀렸다. 서늘한 산바람도 지금만큼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이곳에서 보니 풍광이 참으로 운치 있습니다. 좋은 곳에 터를 잡았군요.”
“할아버지가 지은 집이에요. 저는 이곳에서 나고 자라 특별히 좋은 건 모르겠지만요.”
“하하, 사람은 가끔 손에 쥔 것이 귀한 것임을 모르다가 잃고 나서야 깨닫곤 하지요. 세상의 이치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걸까요.”
알 듯도, 모를 듯도 한 말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삼복의 모습에 청인이 온화하게 웃었다. 그와 같은 도사나 승려들도 간혹 산 생활에 염증을 느끼는데 살날이 한창인 청년의 답답함은 더할 터였다.
청인의 훈훈한 눈초리에 삼복은 떨떠름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그러다 내심 궁금했던 걸 물었다.
“저…… 청 도사님.”
“예?”
“낮에 대호와 싸우셨잖아요. 그게 무공이라는 건가요?”
“오, 무공을 아는지요?”
“아뇨, 본 적은 없는데 마을 아저씨들이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손짓 하나로 바위를 쪼개고, 발을 한 번 구르면 천 리를 간다고……. 마주치면 무조건 피하라고요.”
삼복의 설명에 청인은 웃음을 삼켰다. 그를 바라보는 삼복의 눈동자가 약간의 미심쩍음과 기대로 반짝였다. 마을 사람의 말처럼은 아니라도 대호와 대등하게 싸우던 청인의 모습이 굉장했던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빈도가 배움이 부족하여 단걸음에 천 리를 이동하진 못하지만 바위 정도는 쪼갤 수 있습니다.”
“우와아!”
“그리고 삼복 도우가 들은 얘기는 사실에 가까우니 그대로 행하셔야 합니다.”
“예?”
“무림인과 마주치면 피하라는 것 말입니다.”
“……아. 왜, 왜요?”
“마음이 선하든 악하든 강한 힘이란 때론 의도치 않은 불행을 불러오니까요.”
청인이 빙긋이 웃었다. 같은 웃음이라도 깊이가 달라서인지 삼복은 어깨를 움츠렸다.
“빈도는 삼복 도우가 마을 사람인 줄 알고 따로 언급을 안 했지만…….”
“……?”
“어렵겠지만 당분간 산을 떠나 있는 게 좋을 것입니다.”
“예?”
황당한 소리에 삼복이 깜짝 놀랐다. 이곳은 그의 터전이자 고향이었다. 갑자기 떠나라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삼복이 크게 동요하자 청인은 아차 했다. 제대로 된 설명 없이 결론부터 말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잠시 진정하고 빈도의 말을 들어 보시지요.”
청인은 삼복 모르게 그의 혈도 하나를 기풍으로 지그시 눌렀다. 놀란 마음에 벌떡벌떡 뛰던 심장이 서서히 느려졌다. 삼복이 진정한 듯 보이자 그제야 청인은 이유를 풀어 놓을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이상한 소문 하나가 돌았습니다. 무림 비급…… 아니, 쉽게 말하자면 이곳 형문산에 귀한 보물이 있다는 그런 소문이 말이지요.”
“……이곳에 그런 건 없어요. 있다면 벌써 발견했을 텐데…….”
형문산이 큰 산이긴 하지만 수백 년간 사냥꾼과 약초꾼들이 헤집고 다녔다. 모르는 장소가 있을 리……. 의아해하던 삼복이 이내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들어가지 않는 장소가 있긴 해요. 하지만 그런 곳들은 절벽이거나 포악한 맹수의 영역이라 보물이 있을 거라곤 딱히…….”
우물거리며 말을 흐리는 삼복에 청인이 턱을 쓰다듬었다.
“삼복 도우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보물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소문이 난 이상 보물이 없다고 해도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진실을 믿으려 하지 않을 테지요. 그럴 정도로 그 보물은 무림인에겐 천고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빈도와 같은 무림인이 계속 이 산을 찾을 겁니다.”
“그런데 왜 제가 산을 나가야 해요?”
“형문산이 작은 산이라면 별문제 없겠으나 이곳은 오악(五嶽)*에 비견될 만큼 커다란 곳이지요. 산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길잡이를 필요로 할 겁니다. 이를테면 약초꾼이나 사냥꾼 같은 산사람들이 주요 대상이 되겠지요.”
사냥꾼이나 약초꾼. 산사람치고 사냥을 하거나 약초를 캐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삼복 또한 사냥이 주업이나 귀한 약초를 캐서 팔기도 했다. 즉, 무림인이란 자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그럼, 청 도사님도 그 보물 때문에 이 산에 온 거예요?”
“그럴 리가요. 괜한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형문산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며 소식을 전하는 중이었습니다. 마지막이 장가촌이었는데 이렇게 높은 봉우리에도 사람이 살 줄이야. 대호 일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는데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것도 다 연(緣)이겠지요. 그러니…….”
조심스럽게 다시 하산을 권하려던 청인이 멈칫했다. 기척이 느껴졌다. 멀리서 느껴지던 기척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청인은 내공을 손끝으로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청객이 사파인이라면 대화로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울타리 밖에 십여 명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방문자는 청인이 잘 아는 이들이었다. 그들 중 선두에 있던 청년이 청인을 발견하고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아니, 청인 도장. 여기에서 또 뵙습니다.”
“원시천존. 모용 소가주가 아닙니까.”
“예, 이런 곳에서 청인 도장을 볼 줄은 몰랐습니다.”
“빈도야말로 놀랐습니다.”
청인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모용 세가의 위치를 떠올린 그는 일이 생각보다 범상치 않다고 여겼다. 빈한한 문파 탓에 신객(信客, 일종의 집배원) 일로 중원을 누비는 청인이 비보에 대한 소문을 들은 건 형문산 인근에서였다. 공공연한 비밀처럼 주워듣긴 했지만, 어쨌든 은밀한 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이제는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모용 세가가 위치한 곳은 산해관(만리장성의 동쪽 육상교통로의 관문으로서 ‘천하제일관’으로도 불림) 너머의 요녕이었다. 곤륜파가 있는 청해만큼이나 먼 곳에 이렇듯 빨리 소문이 퍼졌다는 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말을 흘린 거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청인 도장?”
가만히 있는 청인이 이상했는지 소가주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퍼뜩 정신을 차린 청인이 의혹 어린 표정을 갈무리했다.
“전에 소림에서 본 이후로 두 해 만이지요. 요녕에 있어야 할 도우가 이곳에 있으니 좀 놀랐을 뿐입니다.”
“하하하, 저야말로 놀랐습니다. 도장께선 비급이나 영약에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그도 아닌가 봅니다.”
사람 좋게 웃고 있지만 소가주의 말 속엔 경계가 깃들어 있었다. 천고의 비급과 영약은 무인이라면 모두가 꿈꾸는 것이다. 청인까지 이 일에 끼어들까 봐 마뜩잖아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 속내를 파악한 청인이 나직이 한숨을 삼켰다.
“신객 일로 형문현에 왔다가 소문을 듣고 우려의 마음에 잠시 산을 오른 것뿐입니다. 천하제일인의 비급과 영약이라니. 솔직히 빈도는 그런 허황한 것이 이곳에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의심이 없는 건 아니나 한낱 속세의 인간인지라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안심을 할 수 없다 보니…… 이해하시지요, 도장?”
“음…….”
청인은 침음을 흘렸다. 어차피 순순히 물러날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손이 귀하기로 유명한 세가에서 소가주까지 보냈는데 아무런 수확도 없이 물러날 리 없었다.
침묵하는 청인을 일별한 소가주는 그의 뒤에 멀거니 서 있는 삼복을 보고 눈을 빛냈다. 작은 체구에 어린 외형이지만 손에 박인 굳은살이나 처마에 걸린 육포, 마당에 널려 있는 약초를 보곤 하는 일이 무엇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침 그들이 찾는 사람이었다. 모용 소가주는 삼복을 보며 입을 열었다.
“혹…… 사냥꾼이시오?”
“아. 저, 저는…….”
“그렇다면 넉넉한 사례를 할 테니 길을 안내해 줄 수 있겠소?”
갑작스러운 제안에 삼복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선뜻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모용 소가주란 사람은 겉보기엔 평범해 보였으나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아직 미숙하긴 해도 삼복은 다년간 형문산을 누빈 사냥꾼이었다.
어떤 짐승이 사나운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특히 피해 다녀야 할 맹수는 확연히 눈에 보였는데, 눈앞의 저들이 그랬다. 엮이면 좋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삼복은 대답 대신 청인의 뒤로 숨었다. 체구가 좋은 청인 덕에 그의 작은 몸은 소가주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안을 거부하는 몸짓에 소가주는 애써 웃으며 세 걸음 옆으로 걸어 시선을 피하는 삼복을 보며 설득했다.
오만한 그의 성정상 평소라면 강압적으로 굴었겠으나 청인이 보고 있는 이상 섣불리 겁박할 순 없었다.
“나쁜 조건은 아닐 것이오. 이곳으로 온갖 무림인이 모여들고 있소이다. 정파인뿐만 아니라 사파인까지 오고 있으니 잘못 걸리면 험악할 꼴을 당할지도 모르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우리와 함께하는 게 낫지 않겠소? 우린 청인 도장과 같은 정파요. 안전은 확실히 책임지겠소.”
그제야 삼복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소가주와 눈을 맞췄다. 까만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주인의 불안함을 느끼는지 노옹이 이를 드러내며 작게 울었다. 삼복은 이제 믿을 사람은 청인뿐이라고 생각했는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청 도사님…….”
“끄응, 벌써 모이기 시작했다면 마을에도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터인데…… 하아, 큰일이로다.”
갈등하는 건 청인도 마찬가지였다. 소가주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사파인에게 잘못 걸려 험한 일 당하느니 차라리 같은 정파인 모용 세가와 함께 움직이는 게 나았다. 경공 외의 무력은 이류 수준인지라 그보다 무공이 높은 고수라도 만난다면 삼복을 안전하게 지키긴 힘들 터였다.
“삼복 도우, 일이 이렇게 됐으니 같이 움직이도록 하지요.”
그 말에 소가주의 얼굴이 득의만만해졌다.
“청인 도장까지 허락하지 않았소. 어찌하겠소?”
삼복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당장 청인과 산에서 내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건 청인의 말도 있지만 소가주 쪽에서 무언의 압박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삼복이 어쩔 수 없이 수락하려던 때였다.
그들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
“……!”
타악.
모용 세가인과 청인 사이로 낯선 인영이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그는 육 척(六戚, 약 180센티미터)은 훌쩍 넘는 신장의 사내였는데, 특이한 점은 여인이나 사용할 법한 화려한 면사를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난입에 모용 세가인들은 등에 찬 창에 손을 올렸다. 날카로운 경계 속에서 사내가 면사를 들어 올렸다. 살짝 젖힌 면사 사이로 붉은 입술이 드러났다. 얼굴을 다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괜히 얼굴이 붉어질 만큼 고운 입술이었다.
사내는 멍하니 넋 놓은 삼복을 보며 이를 드러냈다.
“뭐야, 하나 남은 게 저런 쥐 불알만 한 놈이야? 한 대 치면 골로 가게 생겼네, 썅.”
난데없는 비난에 삼복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면사로 가리고 있어도 정확히 그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난데없는 방해꾼에 소가주의 눈썹이 사납게 치솟았다.
“이게 대체……!”
소가주가 발끈하고 청인이 눈을 크게 뜨는 사이 침입자, 사지평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으악!”
“삼복 도우!”
동시에 삼복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누구도 손을 쓰지 못했다. 노옹만이 펄쩍 뛰어 주인의 바지를 물었다.
사지평은 삼복을 옆구리에 낀 채 초옥 지붕에 올라섰다. 그는 아래를 쳐다보며 한껏 비웃었다.
“꼴값 떠네. 그러니까 너희가 정파 나부랭이인 거다. 명분 따지다가 거지 되고도 거북이처럼 느린 꼴이라니. 이놈은 내가 데려간다. 으하하하!”
사지평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광소(狂笑)만이 메아리처럼 남았다.
졸지에 닭 쫓던 개가 된 소가주는 허탈한 얼굴로 혀를 찼다. 그가 눈치 못 챌 만큼의 은신술에 단걸음에 삼 장을(약 9미터) 넘게 뛰어넘는 신법을 보아 상대는 뛰어난 고수임이 틀림없었다.
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싸운다면 승패와 상관없이 사상자가 나올 수 있었다. 일개 사냥꾼 하나 때문에 괜한 손실을 각오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이외다. 그럼 다음에 또 보지요.”
소가주는 청인에게 가벼이 포권을 하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마주 포권한 청인은 초조한 얼굴로 삼복이 사라진 자리를 보다 이윽고 땅을 박찼다. 그의 신형이 표표히 흩어졌다. 지면에 발이 한 번 닿을 때마다 오, 육 장을 죽죽 뻗어 나가니 가히 경공일절(輕功一絶)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인은 사지평을 따라잡았다. 다른 이는 몰라도 청인은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오절도왕!”
“아, 씨. 걸인 새끼 신법을 깜빡했네.”
욕설을 뇌까린 사지평이 손을 한번 털었다. 강렬한 기파가 청인을 향해 뻗어 나갔다. 공기가 파르르 진동하자 흠칫한 청인이 몸을 틀었다. 미처 빼지 못한 소맷자락이 날카롭게 잘렸다.
한번 주춤하긴 했지만 청인은 뒤처지는 일 없이 사지평의 옆에 바짝 붙었다.
“오래간만에 보는데 이리 매정하게 굴다니. 역시 암화(暗花)의 향기가 독하긴 하오이다.”
“닥쳐, 거지새끼야. 청해에서 개미나 핥아 먹을 것이지 뭐 주워 먹겠다고 여기까지 왔어?”
“하하하, 빈도야 천하가 곧 내 집이 아니겠습니까.”
“도둑 새끼 보소. 천하는 황제 거거든? 아니, 내 거거든? 암튼 따라오지 마!”
“삼복 도우만 내려놓는다면 언제든지 보내 드리겠소이다.”
“지랄!”
사지평은 속도를 높이는 것으로 청인의 제안을 거절했다. 청인도 딱히 기대한 건 아니었다. 상대가 멀어지는 만큼 그도 내공을 일으켜 뒤쫓았다.
가볍게 허공을 유영하고 땅을 박찰 때도 힘 한번 들이지 않는다. 활짝 편 팔의 도포 자락이 바람에 파라락 나부꼈다.
비붕신법(飛鵬身法).
신법만 놓고 보자면 무림에서 최고인 곤륜의 무공신법 중 하나였다. 크기가 수천 리에 달하고 한 번에 구만리를 간다는 전설의 붕새처럼 청인 또한 사지평을 뒤쫓았다.
무력은 몰라도 신법에선 청인이 위였다. 기어코 그는 사지평의 목적지까지 따라갔다.
임시 거점인 공터로 돌아온 사지평을 가장 먼저 맞이한 건 천막 앞에서 쉬고 있던 가사군과 흑명이었다. 뒤이어 흑사자단도 분분히 일어나 주인을 맞았다.
가사군이 사지평 뒤의 청인을 보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공자? 그 뒤에는…….”
“저 새끼 좀 떨쳐 내!”
“예, 주공!”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사지평의 명에 흑명이 지체 없이 청인에게 달려들었다. 기겁한 청인이 허리를 한껏 젖혔다.
쉬앙!
그의 위로 아슬아슬하게 도가 스쳐 지나갔다. 거의 한 치(약 3센티미터) 차이였다. 청인은 손바닥을 쫙 펴고 흑명의 허리를 후려쳤다. 몸 안으로 파고드는 묵직한 장력을 흑명은 내공을 일으켜 흩어 버렸다. 청인의 내력이 깊었다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내공은 흑명보다 아래였다.
허공에 떠 있던 청인이 바닥에 내려설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엔 수많은 공방이 오갔다. 그러나 무력 차이가 있다 보니 지면에 내려선 두 사람 중 처참한 몰골이 된 건 청인뿐이었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고 옷가지도 너덜너덜해졌다.
다행히 겉가죽만 상했을 뿐 내부는 아무 이상 없었다. 그것을 느낀 청인은 흑명이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청인은 뒤로 벌렁 드러누워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헥헥…… 아이고, 죽겠구나.”
“실력이 여전하십니다.”
“하, 하하. 살생할 일이 없거늘 무력은 키워 무엇 하오리까.”
“그러다 죽습니다. 주공의 명이 없었기에 도장의 목숨 줄이 붙어 있는 겁니다.”
천하태평인 청인의 행동에 흑명이 싸늘하게 경고했다. 둘 사이에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우에에에엑!
숨 막히던 긴장은 삼복의 구토 소리에 와장창 깨졌다. 사지평이 손에서 힘을 풀자 바닥에 떨어진 삼복이 격하게 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배가 눌린 채 이동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흥건한 토사물에 사지평이 기겁하며 몸을 물렸다.
“뭐야, 죽을병이야?”
가사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토한 겁니다.”
“왜?”
“일반인이니까요. 업은 것도 아니고 들고 오는데 안 토하고 배깁니까.”
“썅, 몸뚱이가 쬐깐해서 병이라도 있는 줄 알았네.”
“체구가 작긴 하지만 병 걸린 것처럼 약해 보이진 않습니다만…….”
“생긴 거 봐 봐. 누가 씹다 버린 당호로처럼 생겼잖아. 쥐 불알만 한 게.”
“쥐 불…….”
가사군은 차마 알, 까진 말하지 못했다. 사지평과 달리 그는 본인 앞에서 쥐의 거시기라고 칭할 만큼 양심 없진 않았다.
사지평과 가사군이 잡담하는 사이 삼복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숨을 헐떡이는 그의 다리에 노옹이 제 몸을 쓱쓱 비볐다. 나름의 위로였다. 그런 노옹을 보니 낯선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가라앉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삼복은 용기 내어 고개를 들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널찍한 공터의 모습이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듯 잘린 나무가 한쪽에 수북이 쌓여 있었고 중앙엔 천막 세 개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 그를 납치한 이들의 임시 거처인 듯했다.
삼복은 면사인과 그 앞 문사 차림의 남자, 우글우글 몰려 있는 스무 명 정도의 검은 의복을 입은 사내들까지 봤다가 마지막으로 청인을 발견했다.
“앗. 청 도사님!”
“잔말 말고 돌아가시…….”
“오오, 삼복 도우. 괜찮은지요?”
공터 바깥으로 몰아내려는지 뻥뻥 발길질하는 흑명을 피해 다니던 청인이 잽싸게 삼복에게 다가갔다.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는 모습이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청인은 멀쩡한 삼복의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만신창이가 된 건 청인 쪽이었다. 삼복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괘, 괜찮으세요?”
“이 정도는 끄떡없습니다.”
“멀쩡하겠지. 뒤룩뒤룩 찐 살이 네놈을 살려 준 줄 알아라.”
“히익!”
갑자기 끼어든 냉기 서린 말에 삼복이 어깨를 움츠렸다. 사지평은 못마땅한 얼굴로 청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억!”
“청 도사님!”
청인이 데굴데굴 굴러가자 식겁한 삼복이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뒷덜미를 잡은 사지평 때문에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야, 걸인. 여긴 네놈이 먹을 거 없으니까 청해로 꺼져. 그리고…… 쥐불알.”
“쥐불……. 네?”
“너, 쥐불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정확히 자신을 보며 ‘쥐불알’이라 칭하는 사지평의 말에 사방에서 숨죽인 웃음이 터졌다. 누군가는 ‘쥐불알? 그거…… 거시기 아냐?’ 하고 또 누군가는 ‘아, 있잖아. 쥐 고환. 푸흡, 쥐불알이란다’ 하며 옆 사람과 속닥거렸다. 문제는 그 소리가 다 들린다는 거였다.
삼복은 괜히 아랫도리를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런 반응엔 관심 없다는 듯 사지평은 이를 갈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