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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 큐피드, 양강현


금방이라도 심장을 터트려 버릴 것처럼 큰 사운드가 울리는 젊음의 상징, 홍대 클럽 안은 불타는 금요일답게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서로의 몸을 은밀히 밀착시키고 음악에 힘겨웠던 감정을 지워 내듯 신명 나게 춤을 추며 깊어 가는 밤을 즐겼다.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여자가 있었다. 육감적인 몸매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탑으로 된 붉은 바디콘 드레스를 입고 섹시한 눈웃음을 흘리며 매혹적으로 춤을 추는 여자. 남자라면 쉽게 눈을 떼지 못할 만큼 관능적이었다. 욕망에 이른 갈증을 호소하듯 수컷들이 하나둘씩 그녀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야릇한 시선은 오롯이 한곳에만 박혀 벗어날 틈을 보이지 않았다. 요염하게 춤을 추던 여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부드러운 머릿결을 두 팔로 들어 올리며 뽀얗고 아찔한 목선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BAR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자신을 바라보기만 할 뿐,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여자는 체념하듯, 추던 춤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을 밀쳐 내며 BAR에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자신이 바로 앞에 와 있는데도 시종일관 흐트러짐 없이 여유로운 남자의 태도에 여자는 미칠 것만 같았다. 남자에게서 이런 미적지근한 반응을 받아 보는 건 처음이었던 여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남자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여자는 자신의 쭉 뻗은 다리를 살짝 꼬며 바텐더에게 맥주를 주문했다. 춤을 춰서 목이 타는 건 절대 아니었다. 옆에 앉아 있는, 지나치게 매력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서 나오는 갈증이었다.
여자는 결국, 조급함에 밀려 먼저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주변이 시끄러워 웬만한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선뜻, 자신의 귀를 여자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작은 솜털마저 귀엽게 보이는 탐스러운 귀가 코끝을 스치는 시트러스 향과 함께 여자의 입가로 다가왔다.
“나 마음에 들어서 쳐다본 거 아니었어?”
귓속말을 하며 여자는 빠르게 남자를 스캔했다. 티끌 하나 없는 아기 같은 피부를 소유한 남자를 과일에 비유하자면, 두말할 것 없이 상큼한 ‘레몬’이나 ‘라임’이 떠올랐다. 또한 에로스로 비유하면 딱 적합할 정도로 남자의 외모는 지독히도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 몸매는 얼굴에 반항하듯, 대조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꽤 높이 올라가 있는 BAR 전용 의자에 앉았음에도 땅을 딛고 있는 다리의 길이는 한참 남아 있었고 딱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잔 근육은 헐렁한 흰색 티셔츠로도 감출 수가 없었다.
“너 같은 여자를 안 쳐다볼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목소리라도 좀 이상하면 좋았으련만, 여자는 자신의 귓가로 스며드는 남자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결국 황홀한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자신이 클럽을 다니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홀려 정신이 아찔해지기까지 했다.
“나 같은 여자가 어떤 여잔데?”
“예쁘잖아. 너.”
자신을 보며 미동조차 보이지 않기에, 아예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해 조금은 괘씸하게 느껴졌던 남자의 말에 여자는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귀자거나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은 것도 아닌데, 여자는 벌써 남자와 함께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즐거워했다.
그러다 이내,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기에는 이 시끄러운 공간이 너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우리 같이 나갈래?”
여자는 마치 남자의 오래된 애인처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했다. 여자의 제안을 남자는 흔쾌히 받아들이며 맥줏값을 계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지나쳐 입구로 나오는 동안, 남자의 존재 때문에 부러운 눈빛이 서린 수많은 여자들의 시선에 여자는 우쭐해 했다. 클럽에서 나온 여자는 남자의 팔을 잡고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이제 뭐 할 거야?”
여자의 질문에 남자가 대답 대신, 화사하게 웃으며 도로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그러곤 뒷문을 열어 주자, 여자가 신나는 발걸음으로 올라타서는 남자의 자리를 내주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어디 가는 거야?”
“집에 가는 거야.”
한참 만에 대답을 들려준 남자가 탁, 소리 나게 차 문을 그대로 닫아 버렸다. 그리고 남자는 아무 미련 없이 뒤쪽에서 오는 택시를 향해 걸음을 옮겨 가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놓인 여자가 당황해하며 얼른 문으로 붙어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었다.
“뭐야! 집엘 왜 가? 같이 있기로 했잖아!”
여자의 의아한 고함 소리에 남자는 다른 택시의 조수석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같이 있기로 했다고?”
“그래! 그래서 같이 나온 거잖아!”
“아, 네가 뭘 착각했구나.”
그에게서 자신이 원치 않는 대답이 나올 거라는 걸 예상하면서도 여자는 남자의 손끝에서조차 느껴지는 매력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난 같이 나간다고 했지, 같이 있겠다고 한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담백한 남자의 대답에 여자는 뒤통수 한 대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집에 조심히 들어가고.”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끝낸 남자를 잡으려 여자가 허둥지둥 택시에서 뛰어내렸다.
“야. 야아!”
하지만 이미 남자가 탄 택시는 여자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후였다. 여자는 자신을 떠난 남자에 대한 원망보다는 같이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에 한동안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 차에 탄 남자는 피곤한 몸을 소파 깊숙이 기대었다. 아직도 그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이명처럼 귓가를 떠도는 것 같아 성가셔하던 그때였다. 바지에 넣어 두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진운]
지금의 상황에서 더 성가신 존재가 아닐 수 없지만 받지 않는다면 받을 때까지 걸고, 전화를 아예 꺼 버린다면 집까지 찾아올 친구라는 것을 알기에 강현은 억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전화받을 상황 되냐?
진운의 목소리는 앙큼하게 들떠 있었다.
“당연하지. 왜 못 받을 상황이겠냐. 혼자 있는 택시 안인데.”
― 뭐? 혼자? 택시? 무슨 소리야. 너 여자랑 같이 나갔잖아. 내가 똑똑히 봤는데?
“같이야 나왔지.”
― 같이만 나간 거냐?
“어.”
가기 싫다는 클럽을 억지로 끌고 간 진운이 붙잡지 않고 자신을 후하게 보내 줄 수 있어야 할 상황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자신을 노골적으로 유혹하며 다가오는 여자에게 미끼를 던졌고 여자는 고맙게도 그 미끼를 덥석 물어 주었다. 기필코, 오늘 밤을 함께 지새우리라 쓸데없는 의욕에 불타 있던 진운은 자신을 버리고 가 버린 친구에 대한 원망으로 쉽게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 그래서 너 지금 어디야. 집이야? 나 바로 거기로 출발한다. 딱 기다리고 있어.
“오늘만 봐줘. 나 진짜 피곤해서 그래. 대신, 다음 주에 제대로 쏠게.”
강현이 마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무심하게 매만지며 피로함에 붉어진 눈을 창밖으로 던졌다.
― 진짜?
“그래. 진짜.”
진운은 약속한 것을 어기면 자신도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경고를 수십 번 반복하고 나서야 강현을 놓아 주었다.
강현이 창문을 끝까지 내렸다. 한적한 밤의 도로를 여유롭게 달리는 자동차 안으로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강현이 창틀에 몸을 반쯤 기대었다. 어둠에 잠식된 세상을 밝히는 한남대교의 찬란육리한 불빛들은 언제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강현은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떠올렸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누나의 친구였던 그녀.
열 살의 강현에게 있어서 ‘누나’라는 존재는 목소리 크고 잘 때리거나 혹은 일명, ‘한 입만’이라는 거짓말로 잘 뺏어 먹는 마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매일 상냥한 미소와 함께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며 인사를 건넸고 심심해하는 자신을 위해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기꺼이 브루마블 게임의 주사기를 힘껏 던져 주었다. 더위가 한창인 여름에는 시원한 아이스크림도 사 주고 배고프다 하면 맛있는 떡볶이도 만들어 주며 한참 어린 동생의 별 시답지 않은 말도 귀 기울여 들어 주던 천사 같은 여자였다.
그녀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 즐겁고 행복했다. 지나가는 시간이 너무 빨라서 아쉬웠고, 엄마에게 정연 누나 집에서 살고 싶다고 울고불고하며 생떼를 부리기도 했고, 예쁜 머리핀을 보면 정연 누나에게 사 주고 싶어 꼬박꼬박 동전을 모으기도 했었다.
그리고 매번 그녀와 시간을 보낼 때마다 격한 행복에 강현은 무언가를 결심하곤 했다.
‘나는 꼭, 커서 정연 누나랑 결혼해야지!’
하지만 세상은 자신이 마음먹는 대로 흘러갈 만큼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2년 후, 아버지의 번창한 사업 발전으로 좋은 기회가 닿아,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 강현은 강제적으로 정연과 이별을 하게 되었다.
미국으로 떠나던 날 공항에서 정연은 강현과 세정의 팔에 실 팔찌 하나를 묶어 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의 인연이 이렇게 꽁꽁 묶여 있는 거야.’

강현은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내내, 그 실 팔찌를 어루만졌었다.
처음엔 적응할 수 없었던 미국 생활에서, 자신을 은근히 차별하는 현지인들의 행동에 강현은 제대로 된 기를 펼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강현은 한국에서 정연과 함께하던 순간들을 떠올리곤 했었다.
동네의 무서운 개로부터 겁에 질려 하는 자신을 안아 주며 노래를 불러 주던 정연, 누나들과 함께 간 수영장에서 길을 잃어 헤매던 자신을 가장 먼저 발견해서는 괜찮다며 노래를 불러 주던 정연, 탈 줄 모르는 자전거를 타면서 넘어져 상처가 나서 우는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 주며 무릎을 치료해 주던 정연.
항상 울고 있던 자신에게 불러 주던 그녀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실 팔찌를 어루만지며 강현은 기꺼이 눈물을 참아 냈다. 그러다 보니, 항상 그녀가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미국 생활에 서서히 적응을 할 때쯤, 그녀를 잊었다. 그렇게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국적이기에 가지 않아도 되는 군대를 아버지의 제안으로 한국에 귀국하여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다.
첫 휴가를 나온 날이었다. 버스 터미널로 향하던 지하철에서 깜빡 졸아 버리는 바람에 종점까지 가게 된 강현이 뒤늦게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표가 다 팔려 버린 뒤였다. 하지만 이 버스를 타지 않으면 복귀가 늦어지게 되는 아주 위급한 상황이었다. 당장 필요한 돈을 부쳐 달라고 하기 위해 누나와 부모님에게 연락을 취해 봤지만 아무도 받지 않아 혼자 발을 동동 구르며 애만 태우고 있었다. 터미널과 그 버스를 타는 사람들을 붙잡고 상황을 사정해 봤지만 사람들은 모두 강현을 외면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한 여자가 다가와 강현에게 버스표를 내밀었다.

‘급하신 거 같아서요.’

얼른 돈을 지불하고 표를 받으며 강현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고 막 출발하는 버스에 황급히 올라타며 생각했다.
저 목소리 어디서 들어 봤지? 왜 이렇게 목소리가 귀에 익지?
그 순간.

‘어머. 정연아! 변정연? 너 정연이 아니니!’

귀에 익숙한 이름이 박혔다. 놀란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자신에게 표를 건네준 여자를 향해 누군가 반갑게 달려오고 있었다.

‘어머, 어머! 널 여기서 다 보내!’
‘변정연! 너 정말 예뻐졌다. 대체 어떻게 지냈어?’

그러고 보니, 얼굴이 지극히도 낯이 익었다. 정연을 만났다는 생각에 강현이 다시 버스에서 내리려 할 때, 기사 아저씨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발목을 잡아 세웠다.

‘탈 거요, 내릴 거요!’

하는 수 없이 강현은 그녀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버스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녀가 건네준 버스표를 소중하게 간직하며.
그 뒤로 휴가 때 몇 번이고 그녀를 다시 찾아보려 했지만, 사람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고, 제대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강현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그녀와 함께 찍었던 어린 날의 사진을 찾아보는 일이었다. 그때 정연과 함께하며 느꼈던 감정을 다시 한번 되새김질하던 자신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린 나이였지만, 설레고 행복했던 그 감정은 분명 다른 사람에게서는 느끼지 못한 특별한 감정이었다. ‘첫사랑’은 그렇게 어린 소년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다가 어른이 된 남자의 삶에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제 존재를 포고했다.
그녀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하고 있는 자신의 미소를 다시 한번 느껴 보고 싶었다. 항상 자신의 손을 잡아 주던 그녀의 손길이 마치, 당장이라도 느껴지는 것 같았고, 자신을 향해 웃던 지난날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려 설레기도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린 시절 정연과 함께했던 2년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추억 하나하나가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전부 선명하게 강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막연하게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끌어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미국에서 취업하기를 바라셨기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현을 지지해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별 의미가 없는 짓이라는 것을 인지한 강현은 미국에 남기로 했다.
그렇게 또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봤다.
세계적으로 발행되는 잡지에서 ‘향후에 가장 기대되는 명품 브랜드 아무르(Amour)의 디자이너, 변정연’이란 타이틀 아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실린 그녀의 모습을.
손을 뻗어 그녀를 어루만져 보았다. 하지만 손끝에서 느껴졌으면 했던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이 아닌, 매끈한 종이의 느낌에 강현은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마침, 그 기업은 함께 일하던 석호가 한국에서 스카우트를 받아 함께 가자고 했던 곳이었고, 대학 후배가 다니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석호의 제안도 더는 뿌리칠 수 없었고, 그녀가 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강현은 한국행 비행기에 기꺼이 몸을 실어 이곳으로 왔다.
“…….”
자신을 기억해 주고 있을까? 궁금하다. 그녀를 만날 기대감에 심장이 조금씩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강현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서울의 미적지근한 바람이 강현의 뺨을 보드랍게 어루만져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