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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고 블루
1화
1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 날이었다. 오전에 신경외과 레지던트들끼리 요구르트 하나씩 들고 모여 시무식을 하면서, 올 한 해도 무사히 넘기자고 파이팅을 했더랬다.
“……제가 어디로 가게 된다구요?”
시무식보다는 그 시간에 수술실에 한 번 더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며 거부했지만, 동료들의 따가운 눈초리 때문에 무려 한 시간 동안 의국에 처박혀 있었다. 동료 레지던트들이 새해맞이 각오와 더불어 서로를 향한 덕담까지 나누는 바람에 삼십분이 예상되었던 시무식은 결국 한 시간으로 늘어났다.
그렇게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 후 해은은 느닷없이 과장실로 호출되어 올라왔다. 신경외과 과장인 손낙환은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꽤 심각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해은이 망연한 얼굴로 되묻자, 그는 한 번 더 읊어주는 대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종이를 그녀의 앞으로 스윽 밀어주었다. 해은의 시선이 종이로 떨어졌다.

서울정명대학병원 블라디보스톡 메디컬 센터(JBM) 전근 명령서
신경외과 레지던트 문해은

해은은 구길 듯 황급히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눈을 비비고 몇 번이나 확인했다. 전근 명령서라는 다섯 글자가 놀라운 위력으로 그녀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사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이름 옆 공란에 뜨악해진 눈길을 던졌다. 인상을 찡그리며 한동안 종이만 들여다보던 그녀는 그것을 탁 소리가 나도록 책상에 다시 놓았다.
“싫습니다.”
“뭐가?”
“못 간다구요, 과장님.”
“문 선생.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문 선생은 싫다 좋다 판단할 수 있는 입장이 아냐. 판단은 위에서 해. 문 선생은, 위에서 그냥 까라면 까는 거야. 알겠냐?”
해은은 손낙환의 억지에 모종의 배신감마저 느꼈다. 예과 1학년 때부터 믿고 따르던 인자한 교수가 지금은 그녀를 쓰러뜨리려는 거대한 괴물로 보였다. 그녀는 거부의 의미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이유도 없고 납득도 되지 않는 일에 사인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있게 마땅한 이유를 대 주세요, 과장님.”
“여기보다 급여도 두 배로 높아. 오피스텔도 두 배로 넓어. 여기와는 달리 출퇴근 시간 칼 같지. 외래진료 거의 없지. 그냥 러시아 여행한다 생각하고 여기저기 왕진만 다니면 돼. 게다가 딱 1년만 견디고 오면 수술실에 많이 들어가게 해줄게. 싫어? 갔다 오기만 하면, 자네가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 하는 수술장에 아주 상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거야. 그게 싫어?”
“그렇게 좋은 곳이면 저 말고 다른 레지던트를 보내세요. 아무리 1년이고 다녀온 뒤 어마어마한 금덩이를 준다고 해도 전 싫습니다. 1년, 아니 단 하루라도 말도 통하지 않는 그런 불모지에서 제 실력을 낭비할 순 없어요. 과장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그거 다 지켜보셨으면서 그런 곳으로 저를 보내고 싶으세요?”
“거기 병원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이 병원 출신들이야. 의사들도 간호사들도, 심지어 직원들도 모두 이 병원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많다고. 사람 사는 곳이야, 거기도.”
손낙환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여 의자에서 일어났다. 책상을 돌아 나와 아끼는 제자 중 하나인 해은의 앞에 선 그는, 잠시 안경을 벗곤 이마의 땀을 손등을 닦았다. 제 손으로 이런 일을 처리하는 것에 아직은 익숙하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톡이라니.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로 미화하고 꾸민들, 그곳은 엄연히 유배지나 다름없는 곳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의료장비가 이곳과는 달리 낙후되어 있고 시설이나 시스템도 아직은 안정적이지 못한 곳이었다.
이른바 서울정명대학병원의 해외출장소 같은 그곳. 의료과실을 일으키거나 환자와의 사이에서 트러블이 발생하거나, 내지는 윗선에서 감당하기 버거운 사람을 집게손가락으로 뽑듯 뽑아서 가차 없이 보낸다.
물론 그곳의 부족한 인력을 메우기 위해서라는 그럴싸한 핑계를 갖다 붙이고 있고, 실제로 자원해서 간 의사들도 있다. 하지만 은연중에 모두가 알고 있다. 블라디보스톡으로 차출되어 간다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라는 걸.
낙환은 안경을 고쳐서 걸치곤 제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여자의 몸으로 예과 1학년 때부터 수석을 놓치지 않은 재원이었다. 지방에 홀로 계신 모친의 곁을 일찍부터 떠나와 혼자 서울에서 지내온 이 녀석이, 학비 걱정 없이 무사히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기 위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평균 수면시간 2시간.
밥을 먹을 때에도 겸자(수술용 도구)로 반찬을 집어 먹는 녀석이고 회진을 돌든 수술장에 들어가든 옆구리에 책이 기본적으로 2권이 끼여 있다. 인턴 시절엔 흉부외과 수술에 어시스트로 들어가 ACC off(대동맥 근위부를 잡은 집게를 제거함)때 혈전을 발견하여 테이블 데쓰의 위기를 넘기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인사처리가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거부하고 싶은 건 해은뿐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봐, 문 선생. 해은아. 나라고 자넬 그런 데다 내패대기 치고 싶겠어?”
낙환은 해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위로를 건넸다. 그러면 그럴수록 답답함이 솟구쳐 결국 속엣 것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이왕 얘기 나왔으니 한 가지 물어보자. 너 부원장님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
아무리 생각해도 부당하다 싶은 처사에 혼자 씩씩대던 해은은, 낙환의 물음에 돌연 머릿속이 아득하니 하얘지기 시작했다. 잠시 큰 눈을 껌뻑거리기만 하다가 이윽고 정신이 현실과 맞물리자 생각을 퍼뜩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원장님이요?”
“그래.”
“그럼 이번 인사가 부원장님 지시라는 건가요?”
“그렇다니까. 아주 완강하시더라.”
그러니까 이 갑작스러운 인사의 배후에 있었던 건 결국 부원장이었다는 거다. 해은은 좀 전까지 오기로 가득 차올라 있던 자신의 모습이 무안하리만치 허탈해졌다. 부원장이 왜 그녀의 인사에 관여하고 그녀를 멀리 보내려고 하고 있는지는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두통 같은 것이 밀려오는 듯했다. 해은은 손바닥으로 잠시 이마를 짚었다.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려 버렸다. 그 자식, 그녀의 인생에 한 톨의 도움도 되지 않는 그 망할 자식 때문에 결국 이런 수모까지 당하고야 말았다.
“어떻게 내가 부원장님을 한 번 만나봐?”
해은이 눈에 띄게 휘청거리자 그에 불안을 느낀 낙환이 슬그머니 제안했다. 하지만 말뿐인 제안이라는 걸 해은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염려일 뿐 낙환이 부원장님한테 찍소리도 못 하는 스텝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해은도 잘 알았다.
“아뇨. 그러실 것 없으세요, 과장님.”
해은은 여전히 연민을 보내고 있는 낙환을 두고 힘없이 과장실을 나섰다. 복도를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섰다. 게임 오버. 부원장이 지시한 거라면 이건 명백하게 게임오버인 것이다. 갈 길을 놓친 사람처럼 허망하게 서 있던 해은은, 문득 주머니 속에서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을 꺼내었다.
608호. 비통에 잠긴 그녀를 나무라기라도 하듯 소리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은은 상념을 멈추고 곧장 발길을 옮겼다.

608호 병실에 들어선 해은은 박미향 환자의 침대로 다가갔다. 이틀 전 허혈성 뇌졸중 수술을 받고 어제 하루 중환자실에 있다가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일반 병실로 올라온 환자였다.
“무슨 일이에요?”
붙어 있던 담당 간호사에게 해은이 묻자 간호사가 안도의 숨을 쉬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한 시간 전부터 열이 갑자기 올라가서요. 혈압도 오르고 바이탈이 전체적으로 불안정해요.”
“열은 얼마죠?”
“39도요.”
차트를 집어 든 해은은 환자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인상을 썼다. 가래가 들끓는 것이 확실하며 그 때문에 기침도 잦았다. 수술 직후에 으레 생기기 쉬운 합병증이 의심되었다. 해은은 청진기로 환자의 가슴을 진단한 후 물었다.
“박미향 씨. 기침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오전부터요.”
환자는 기침을 하느라 쉬어버린 목소리를 겨우 끌어내고 있었다. 발음이 불분명하여 해은은 귀를 그녀의 얼굴로 가까이 갖다 대어야 했다.
“가래도 나와요?”
“네.”
해은은 고개를 끄덕인 후 차트를 간호사에게 넘겼다. 제 담당인 환자에게 찾아온 불청객인 합병증으로 잠시 짜증이 솟았지만, 환자에겐 인상을 쓰는 대신 든든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곤 이내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 지시를 내린다.
“가래 받아서 검사실로 보내세요. 아무래도 흡인성 폐렴에 합병증이 온 것 같아요. 그리고 내과에 연락해서 협진 할 거라고 전해주세요.”
“내과라면 성 교수님을 호출할까요?”
“아뇨. 우선 검사만 할 거니까 스텝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어요. 김은호 선생님…….”
환자의 링거 수액을 살피며 말을 이어가던 해은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이름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이내 간호사가 잽싸게 그 이름을 받는다.
“아, 김은호 선생님 부를까요?”
“아뇨. 다른 선생님을 불러주세요. 검사 결과 나오면 다시 연락해줘요. 민 교수님께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해은은 의도치 않은 실수에 자신을 못마땅해 하며 병실을 나왔다. 박미향 환자의 수술을 담당했던 주치의인 민 교수에게 연락을 한 후 승강기 앞에 섰다. 자꾸만 기분이 가라앉아갔다. 승강기의 출입문에 비쳐든 자신의 모습을 멀거니 응시했다. 반사각 때문인지 실루엣이 흉측하게 일그러져 눈이며 코의 명확한 선이 보이지 않는다.
해은은 지금 자신의 상황이 저 울퉁불퉁한 모습과 닮아 있다고 여겼다. 잔뜩 모가 나 있는, 그래서 어딜 굴려도 반듯하게 굴러가지 못하고 튕겨나가는, 속에는 개흙과 먼지를 잔뜩 끌어안고 있으면서 밖으로는 황금색 가운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가 또래 중 가장 뛰어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에게서 풍기는 우울한 분위기가 상대로 하여금 본능적인 벽을 세우게 만드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해은은 늘 직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싫어한다는 것을. 물론 그것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의 정신력과 오기는 가지고 있었다. 다만 오늘처럼 뜻하지 않은 상황과 마주할 때면, 마음 깊숙한 곳에 적재되어 있던 울컥함 같은 것이 밀려와 속이 아려오곤 했다.
시린 속을 달래가며 승강기 출입문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그녀는, 문이 열리자 승강기에서 내리려 하는 누군가를 발견하며 멈칫했다. 흰색 가운의 가슴께에 붙은 이름표가 가장 먼저 보인다. 제 1 내과 레지던트 김은호.
“저하고 얘기 좀 하시죠. 김은호 선생님.”
해은은 승강기에서 막 내린 은호를 망설임 없이 막고 섰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당황한 은호가 서둘러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난감해진 표정을 황급히 수습하며 사무적인 말투로 내뱉었다.
“저는 별로 할 말 없는데요.”
“제가 있어요. 잠시 나가실래요?”
해은은 완강하게 버티며 그를 향해 작게 턱짓을 했다. 승강기 옆에 있는 비상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녀는 차가운 공기가 감돌고 있는 그곳에 멈춰 섰다. 뒤따라온 은호가 비상구 출입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내부와 단절되자 그제야 그가 크게 소리친다.
“어디서 함부로 오라 가라야? 네가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