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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술사 1권 2화
Chapter 1-1 (2)


쿵!
부딪히는 소리. 소녀는 문을 열기 위해 뻗어 내었던 손을 얼른 거두어들였다. 다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낡은 창문에 몸을 살짝 기대었다. 소녀의 낡은 원피스는 빗물을 머금어 한 방울씩 바닥으로 그 물기를 내려보내기 시작했다.
쿵!
한 번 더 들려오는 소리. 소녀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사기꾼 자식!”
“아이고, 아닙니다. 비가 계속 오니 장사를 나갈 수가 없어서…….”
화를 내는 자의 목소리를 소녀는 알고 있었다.
설탕 장수 아저씨였다. 그 집에는 딱 그녀 또래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핑크빛의 귀여운 원피스에 붉은 리본을 달고 있는 귀여운 소녀의 모습은 모든 아이의 동경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애원하는 목소리 역시 소녀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빌고 애원하고 때로는 폭력에 신음하는 소리는 이제 익숙했다.
소녀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주머니에서 천천히 손을 빼냈다. 주머니에도 물이 새어 들어왔었나 보다. 그 안에 고이 숨겨 두었던 손은 물에 퉁퉁 불어 있었다.
소녀의 가느다란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는 빗물이 거미줄처럼 맺혀 있었다. 다른 손으로 그 사이를 끊어 내고 끊어 내어도 그것은 또 이어졌다. 세게 손가락을 털어 내면 잠시 그 선은 사라졌다. 그러나 곧 다른 물방울들이 같은 모양으로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손가락이 만들어 내는 ‘비의 실’만큼 재미있는 장난감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것을 알아챈 이후로 비가 오는 날에는 함부로 손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그것을 ‘마녀의 증거’라고 부르기도 했다.
치안대 아저씨들에게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말은 아이에게는 충분히 무서운 말이었다. 소녀는 아버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비가 오는 날에 손을 꺼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남들 앞에서는 손을 씻는 일도 세수를 하는 일도 절대로 하지 않았다.

‘왜요?’
‘마녀는 사악해. 이걸 들키는 날에는 무서운 병사들이 너를 끌고 갈 거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녀는 사악해.’라는 아버지의 말에 ‘그렇다면 저는 사악한가요?’라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아버지란 식사이며, 집이었고, 옷이었다. 사악한 딸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사악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 빗물이, 햇살이, 바람이 손가락을 휘감고 걸려 오는 기분은 무척이나 달콤했다.
닿아 오는 느낌이 있었다.
빗물에서는 생명을 느꼈다.
햇살에서는 힘을 느꼈다.
바람에서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비록 그녀는 낡은 옷을 입은 평범한 소녀였지만, 그들의 감정을 받으면 스스로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착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반드시, 다음번에는 꼭 돈을 드릴 테니까…….”
벌컥.
아버지의 애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설탕 장수의 분이 금방 풀린 모양이었다. 소녀는 얼른 무릎 사이로 손을 감추고 고개를 푹 숙였다.
보지 않아도, 설탕 장수의 날카로운 눈길은 그대로 느껴졌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쌍해 보이는 편이 더 편할 때가 있으니까.
“미안하다.”
의외의 중얼거림. 소녀의 고개는 저도 모르게 스르륵 들렸다. 예쁜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뻣뻣해진 채 그녀의 시야를 조금 가렸지만, 손을 꺼내서 그것을 정돈할 수는 없었다.
“전쟁이…….”
설탕 장수는 작게 중얼거렸다.
소녀는 대답 대신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고여 있는 물웅덩이에 처마에서 떨어지는 방울이 떨어져 주름을 만들고 또 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떠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설탕 장수는 소녀에게서 또래의 제 딸을 생각해 냈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그는 현금이 항상 급했다. 조금이라도 대금을 내지 않은 곳에 득달같이 달려가 난동을 피웠다. 예쁜 부인과 딸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전쟁.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치 있는 것들을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침략당하는 것이 아닌, 침략하기 위해 일으키는 전쟁이니 이 나라의 화폐는 아직 가치가 충분한 것이었다.
조금 남아 있는 양심이 설탕 장수의 발을 잡아 두었다. 그도 아버지였고, 요즘 경기가 좋지 못한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어린 소녀의 앞에서 그 아버지에게 주먹질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툭.
그는 푸른색 우산을 소녀 앞에 놓았다.
소녀는 힐끔, 그 손잡이를 곁눈질로 훑었다.
“감기 걸린다.”
설탕 장수는 우산도 없이 제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녀는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려 우산을 집어 들었다.
소녀는 우산을 펼쳤다.
낯선 탄력이 손안에서 느껴졌다.
어쩐 일인지, 같은 순간 구름 사이에서 햇살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비는 금세 멎었다. 소녀는 제 손에 우산이 들어왔기에 비가 멎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손끝이 느끼는 한, 자연은 모두 장난칠 준비가 항시 되어 있는 어린아이 같았으니까.
“다녀왔습니다.”
소녀는 집 앞에서 조금 더 햇빛을 바라보다 집으로 들어왔다.
17세는 어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혼자서 몸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래.”
소녀는 우산을 접어 입구 근처에 적당히 세워 두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것을 바라만 보았다.
“비가 그치려는 것 같아요.”
아버지는 집안에 들여놓은 솜사탕 기계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 냈다. ‘어머니의 목숨값’으로 샀다고 이야기하곤 하는 그 낡은 기계는 생활의 바탕이 되어 주었다. 하나의 목숨으로 둘의 숨이 붙어 있을 수 있으니 남는 장사라고 아버지는 종종 말했다.
농담조로 중얼거리는 그 말에 미소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시장이 열리는 날에 두 사람은 낑낑거리며 솜사탕 기계를 들고 나갔다. 바퀴가 달린 수레가 있어 많이 편해졌다고는 해도, 설탕도 기계도 무거운 것이었다.
아버지가 솜사탕을 만들면, 소녀는 옆에 앉아 있었다. 항상 똑같은 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손놀림, 손님들의 주문, 기뻐하는 얼굴. 그리고 비슷한 것을 보았다. 비 오는 날 그녀의 손끝에 맺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길게 늘어지는 설탕이 뽑아내는 가느다란 실을.
바람이 손가락 사이로 들어와 스치었다. 괜히 주억거려 보았다. 다른 이는 보이지 않겠지만, 빗물과 같은 모양으로 바람이 손에 맺히었다. 솜사탕과 같은 모양으로 손에 맺히었다.
하루 장사가 끝나면 두 사람은 다시 솜사탕 기계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짤랑거리는 동전 소리가 요란할 때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조금 더 가벼워졌다. 소녀는 먹고 싶은 것이 많았다. 비쩍 마른 꼴을 한 소녀는 또래보다 작았다. 배가 부른 날보다 고픈 날이 더 많았고, 맛을 즐긴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빵을 사서 가자꾸나.”
“네!”
소녀는 슬쩍 눈길을 돌려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저 정도라면 흰 빵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말랑말랑하고 따듯한 그것을 떠올리니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녀가 기계를 지키고 서 있는 사이에 아버지는 얼른 빵집에 다녀왔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종이봉투를 건네받은 순간부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되었다.
품에 든 것은 무엇보다 보드랍고 따듯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소한 향이 확 퍼져 나왔다.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소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가 빠진 접시 위에 빵을 올려놓았다. 기계를 닦아 둔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아버지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득하게 길었다.
빨리 먹고 싶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을 때, 누군가 그들의 집을 노크했다.
“누구지?”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척도 친구도 없는 부녀라 낯선 노크 소리에 긴장했다. 어쩌면 설탕 장수가 또 대금을 재촉하러 왔는지도 몰랐다.
따듯한 빵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본 후 소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문고리를 잡아 천천히 당겼다. 단단한 갑옷을 두른 사내가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누구……세요?”
소녀는 용기를 내서 물었고, 그는 검은 머리를 쓸어내리며 미소 지었다. 어째서일까? 소녀는 등골이 서늘했다.
“안녕?”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그의 눈동자가 핏물처럼 붉었다. 소녀는 그 자리에 완전히 얼어붙었다.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치안대는 끔찍한 현장에 이마를 짚었다. 평생 좀도둑이나 불량한 청년들 따위를 상대했던 작은 시골 마을의 치안대원들은 이 사건을 어디에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딸은 피로 물든 칼을 꼭 쥔 채 덜덜 떨고 있고, 그 아버지는 잔인하게 난도질당해 있었다. 현장을 바라보는 이들은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저, 전 아니에요…….”
소녀는 칼을 쥔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걸 놓으면 안 된다고…… 죽는다고…… 했어요.”
눈물이 가득한 애원에도 그들은 그녀의 손을 강제로 잡아 그 날카로운 날붙이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애를 썼다. 소녀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최대한 버텨 보았으나, 젊은 남성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챙!
칼은 바닥에 떨어져 마찰음을 내었고, 소녀는 치안대원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 애절한 마음이 그녀의 마력을 깨웠고, 공기의 감응을 불렀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자,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던 치안대원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이제부터 그거 놓으면 죽인다?’

무서운 말이 떠오른 소녀는 팔이 자유로워지자 바닥에 떨어진 칼을 향해 손을 뻗어 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녀의 손끝에 머물러 있던 공기들이.
아무런 색도, 모양도 없는 것이 분명한 그것이.
그녀의 손에서 자유롭게 풀려나는 지금만큼은 아주 예쁜 초록색의 가루가 되어 마법처럼 공중으로 흩어져 나갔다. 그것이 허공에서 반짝이는 동안 그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먼저 정신이 든 치안대원 한 명이 그녀를 가리키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 마, 마녀야!”
시신에 난도질이 되어 있는 것에 반해 그녀의 옷에 묻은 피의 양이 많지 않다던가, 분명한 반항흔이 남아 있음에도 그녀에게는 작은 긁힌 자국 하나 없다는 현장의 엇나감은 그 한마디로 모두 설명되었다.
소녀는 당황하여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색 피는 가느다란 실이 되어 거미줄처럼 손끝에 맺혀 있었다.
마녀처럼.



Chapter 1-2 (1)


모든 생명체의 감정을 돌보는 여신, 에모티오의 신전은 모두의 발길이 닿기 쉬운 수도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때때로 신전에서 기도했다. 그릇된 감정에 지배당하여 지혜를 잃지 않기를, 아름다운 감정과 옳은 가치관을 갖기를.
또한, 신전은 황궁 안에도 하나 더 있었다. 종교와 정치는 항시 동등하지만, 종교가 황제의 성에 둥지를 갖고 있다면 꼭 그리 보이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 작고 화려한 신전의 존재는 모두에게 비밀스러운 것이었다.
인간의 사정이야 어쨌든 자연은 공평했다. 비밀스럽고 성스러운 황궁의 신전에도 꼭 그날 필요한 만큼의 햇살이 내리는 법이다.
햇살은 어느 아름다운 엷은 금발에서 머물렀다. 결 좋은 머리카락의 주인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매끄러운 얼굴의 가운데에 살짝 주름이 져 있는 것이 어쩐지 좋지 못한 꿈이라도 꾸는 것 같다. 아니면 어딘가 불편한 걸까.
잠결에 그는 햇살을 털어 내듯 머리카락을 쓸어내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불편함을 이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보라색 눈동자는 몇 번 정도 깜빡이기를 반복하며 눈앞에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분명히 혼자서 자고 있던 침대인데, 지금은 다른 이가 침범하여 나란히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잠에 취해 흐릿했던 눈동자도, 놀라움에 물들어 어느새 선명해졌다. 벌떡 일어나 상대를 확인했다. 붉은 기가 감도는 머리카락과 햇볕에 그을린 피부.
“블랑 선배?! 왜, 여기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잘 아는 이의 얼굴임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이름을 부르며 조금 당황하기는 했어도 금방 안심할 수 있었다.
“으흠……. 프레슐, 우리 후배님……. 나 휴가…… 왔.”
“선배. 지금 여긴 제 침대입니다.”
“나 조금 더 잘래…….”
블랑은 몸을 뒤척이면서,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끄집어 올렸다.
“후, 그러시죠.”
프레슐은 침대에서 빠져나오려 몸을 일으켰다. 애초에 남자끼리 침대에 누워 있는 취미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불쾌감을 표시할 수는 없었다. ‘후배는 선배의 말을 따른다’라는 것이 그들 사이에 가장 중요한 규칙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