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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여리한 복종
1화
#Prologue


무대는 내 꿈이었다. 지금은 그게 내 꿈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것은 내 꿈이었다. 빛나는 생기와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랑스러운 노래와 신나는 춤으로 내 인생을 장식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자 전부였다.
내 십 대는 그 꿈을 위한 발판이었고 희생양이었다. 교복을 입고 구르는 낙엽만 봐도 웃을 나이였지만 나는 지하 연습실에 처박혀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나중에 받게 될 보상을 기다리며 나는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데뷔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고, 사치스러운 옷도 입었고, 유치한 노래도 불러 보았지만 시선은 관심과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나는 무명의 걸그룹 리더, ‘윤여리’다.



#1. 계약


“저보고 뭐를 하라고요?”
황당해하는 여리를 보며 소속사 대표인 이현태는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연예계 짬밥이 2년인데 내 말이 뭔 뜻인지 몰라?”
“아니 그러니까…… 대표님 말씀은…….”
여리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 대표는 그런 여리를 정면으로 바라볼 만큼 뻔뻔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린 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설득을 이어 나갔다.
“그 사람만 잡으면 회사는 자금난 해결할 수 있고, 너는 지긋지긋한 중고 신인 소리 벗어날 수 있어.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이 바닥에서 날고 긴다는 애들 중 스폰서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내가 그 사람 잡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우리 같은 피라미가 잡을 수 있는 흔한 동아줄이 아니라고.”
스폰서가 동아줄이야?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결국…… 몸을 팔라는 소리잖아요. 그래 봤자 몸 팔고, 웃음 팔고 창녀처럼 스폰서 밑에서 벌벌 기라는 소리잖아요.”
예상하고 있던 일이긴 했다.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였던 지금의 회사에서 야심 차게 데뷔시켰던 걸그룹 ‘크리스탈’은 2년간 그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시간을 축내고 있었다. 회사는 투자금을 환수하지 못해 자금난으로 곤란한 상황이었고 크리스탈 멤버들은 어린 나이에 겪은 인생의 실패를 온몸으로 감수하느라 허리가 휘었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방법은 딱 두 가지였다. 패배를 인정하고 연예계에서 물러나거나, 밑바닥에서 하늘 저 끝까지 올려 줄 강력한 스폰서를 만나거나. 이현태 대표는 후자를 택한 것이었다.
여리는 앞으로 닥쳐올 미래를 여러 가지 형태로 떠올렸다. 17살 때부터 시작한 꿈이었고 이제 와 포기하기에는 이미 잃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당연히 누리고도 남았을 학창 시절은 물론이고 가수 외에 다른 진로를 꿈꿀 가능성조차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하루의 전부인 것처럼 산 지가 5년인데 그것을 놓아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게다가 지금의 소속사를 나가 또 다른 기회를 잡을 것이라는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벌써 나이가 22살이었고 심지어 데뷔까지 한 중고 신인이었다. 아이돌 가수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였으니 늘 새로운 얼굴만 찾는 연예계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언제쯤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꿈을 잃고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내는 것이 더 끔찍할 것 같았다.
네까짓 게 무슨 연예인이냐며 비웃던 아빠의 얼굴과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는 친구들의 얼굴을 차마 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녀 뒤로는 연습생 기간 3년과 데뷔 후 2년을 합쳐 5년을 함께한 멤버들이 있었다. 흘린 땀으로만 보면 빛을 보고도 남았어야 했다. 그들과 함께 몰락을 선택하기에 그녀는 자신의 꿈을 너무 사랑했다.
멤버들과 여리는 서로를 껴안고 서럽도록 울었다. 누구 하나 감히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하고 소리 죽여 흐느낄 뿐이었다.

*

“어차피 하기로 한 거 잘하자.”
강남에서 가장 핫 하다는 클럽의 VIP 라운지 앞에서 현태는 말했다.
여리는 하늘하늘한 흰색 원피스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울리지도 않게 타이트한 원피스를 입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우스워 보이기만 할 것 같아 포기했다.
숙소를 나서기 전 거울을 보며 끊임없이 올라오는 구역질을 어찌나 참았는지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자신이 맞이해야 할 두려운 현실 때문이 아니라 그 현실을 당당히 거절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역겨워서였다.
“여리야.”
이 대표는 그런 여리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름 애처로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미안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서로를 마주 보는 눈빛에 원망은 없었다.
“제 선택이에요.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제 스스로 선택한 거니까 대표님 탓 아니에요.”
이 대표의 깊은 한숨 소리가 바닥을 기자 여리는 애써 웃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마음 단단히 먹었으니까.”
“그래……. 그리고 조심해.”
그는 입술을 깨물며 무책임한 충고를 건넸다. 하지만 이미 호랑이 굴 앞에 선 여리에게 조심하라는 말은 불필요했다.
“네 스폰서 될 사람, 성질머리 더럽기로 유명해.”
여리는 클럽에 오기 전 자신의 스폰서가 될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화그룹’ 현 회장의 셋째 아들, ‘권이현’이었다.
이화그룹은 최근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였다. 그룹 이름을 따 ‘꽃들의 전쟁’이라고 부르는 ‘후계자 싸움’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이현은 이화그룹의 통신 사업과 아트재단을 물려받은 서른 살의 ‘세 번째 꽃’이었다.
“여자라고 봐주는 것 같지 않으니까 괜히 자존심 부리고 그러지 말자.”
여리는 괜한 헛웃음이 삐져나와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온 것부터가 자존심이 없는 거지.”
도착지까지 가는 길에 진흙탕이 있다면, 반드시 진흙탕을 지나야 한다면 여리는 온몸에 진흙을 묻히며 진창을 구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존심이라곤 다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어요. 걱정 말아요.”
라운지의 문을 열자 커다란 공간 안에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며 구르는 것이 보였다. 쾌락으로 얼룩진 지옥이 있다면 딱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시가와 담배의 뿌연 연기가 천장을 채웠고, 독한 술 냄새가 숨 쉬기도 어려울 만큼 가득해 있었다. 여자들은 헐벗었고, 남자들은 그런 그녀들을 좇느라 바빠 보였다. 그중엔 얼굴만 보아도 알 만한 캐스팅 디렉터와 영화 감독, 크고 작은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임원들이 있었다.
여기서 연예계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구나, 싶은 광경이었다.
이 대표는 헛기침으로 긴장을 숨기며 여리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두 사람은 제법 비장한 걸음으로 사람들을 헤쳐 나아갔다. 여리가 만나야 할 이현은 당연하게도 가장 먼 자리, 상석에 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긴 테이블의 옆을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을 즈음, 누군가의 긴 다리가 여리의 걸음을 가로막았다.
“누구?”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여배우였다. 그녀의 얼굴엔 경계심과 호기심이 이곳저곳 묻어 있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어린 여자의 존재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순간 독한 시가 향이 안개처럼 풍겨 왔다.
“네가 알아서 뭐하게.”
장난스럽지만 낮은 목소리의 남자가 여자를 밀어냈다. 그는 검은색 소파에 상체를 묻은 채 긴 손가락으로 시가를 태우고 있었다. 테이블의 가장 끝이자 가장 높은 자리의 주인, 이현이였다.
여리의 손목을 잡은 이 대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오빠 손님이야?”
여자는 얼굴색을 밝게 바꾸고 이현의 팔에 매달려 아양을 떨었다. 여리를 쳐다보던 예민한 눈매가 단번에 애교스러워지는 걸 보니 그녀도 이현에게는 약자인 모양이었다.
어떤 남자가 보아도 어여뻤을 그 여자를 이현은 신경질적으로 밀쳐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더러운 것이라도 묻었다는 듯 툭툭 털어 내는 모양새가 제법 날카로웠다. 이현은 바짝 얼어 있는 여리와 현태를 번갈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반가워요. 쥬얼리 엔터의 이현태 대표님 맞죠?”
목소리는 낮고 어쩌면 단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사님.”
현태는 자신보다 몇 살은 더 어린 이현을 향해 황급히 손을 모아 허리를 숙였다.
“뭐, 영광까지야.”
이현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깔끔하게 올라간 검은색 머리카락이 남자의 긴 눈꼬리와 어울렸다.
“저희 회사 메인입니다. 예쁘고, 재능도 많으니 이사님께서 잘 봐 주시면…….”
현태가 여리의 등을 떠밀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자 이현은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입꼬리를 말아 웃었다. 정확히는 비웃었다.
“예쁘고 재능도 많으면 왜 날 찾아와.”
장난스러운 분위기, 입에 걸린 미소, 어려 보이는 외모까지 남자의 모든 것이 가벼웠지만 그의 말에는 숨도 못 쉴 만큼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안 그래?”
자존심을 가볍게 뭉기고는 확인 사살까지 하는 잔인함도 갖추고 있었다. 현태는 이현의 직설적인 말과 행동에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런 현태를 한심하다는 듯 힐끗 쳐다보던 그가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대로 가다간 인사도 하지 못하고 기회를 날려 버릴 것 같았다. 여리는 어렵게 버린 자존심이 아까워서라도 그럴 순 없었다.
“윤여리라고 합니다.”
한 걸음 나아가 허리를 숙이고 인사했다. 이현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가까이서 마주한 이현의 외모는 신문에서 본 것과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매스컴에선 이미 ‘훈남 재벌 2세’로 유명한 그였지만 실물은 사진 속 외모보다 몇 배로 훌륭했다.
짙은 눈썹은 남성적이었고, 쌍꺼풀 없이 길게 뻗은 눈은 날카롭고 깊었다. 수려한 콧날과 날렵한 턱 선은 도톰한 입술과 만나 섹시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정확하게 재단된 슈트에 가려진 몸은 한눈에도 매끈하게 관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신문에서의 모범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여유로워 보였고, 망설임이 생길 만큼 위압적인 분위기에, 모든 것을 아래로 보는 듯한 기운이 역력했다. 미남, 미녀라면 셀 수 없이 많은 연예계에서 2년이나 살아온 여리의 눈에도 어김없이 매혹적이었다.
“여리?”
이현이 재미있다는 듯 여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름 참…….”
이현이 제 왼쪽에 있던 또 다른 여배우를 짐짝 치우듯 밀어 내고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친절한 듯하면서도 무례하고, 배려한 듯 보이면서도 장난스러운 행동이었다.
그의 곁에 앉자 독한 시가 냄새가 여리의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예명이에요?”
이현이 물었다.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운 것이 그와 잘 어울렸다.
“아, 아니요. 본명이에요.”
“아―”
이현이 말끝을 천천히 늘이며 여리의 얼굴 구석구석에 시선을 두었다.
“신인?”
“데뷔한 지 2년 정도 됐어요.”
여리는 얼굴이 붉어졌다. 데뷔한 지 2년이나 되었음에도 인지도 하나 없는 제 처지가 부끄러웠고, 끈질기게 따라붙는 그의 시선이 민망했다.
“그래요? 왜 난 그쪽을 본 기억이 없지.”
“…….”
“하긴 그러니까 여기서 이러고 있겠지.”
이현이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나 걱정이나 순수한 동정심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신기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단 하나도 풀어져 있지 않은 단추와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게 올린 헤어스타일이 그의 사회적 위치와 까다로운 성격, 부의 크기를 보여 주고 있었지만 어딘가 묘하게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과 가벼움, 장난스러움이 가득했다. 소년과 남자, 그 어딘가를 걷고 있는 모습이었다.
“술 마실 줄 알아요?”
질문이긴 했지만 그는 이미 짙은 색깔의 양주를 콸콸 따르고 있었다.
“마실 줄은 알아요.”
이현이 웃었다. 긴 눈이 곱게 접혀 웃는 모양이 꽤 예뻤다.
“마셔 봐요. 좋은 거야.”
술잔을 손에 쥐고 입술 가까이로 가져간 여리는 독하디독한 냄새가 훅, 코끝을 스치자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현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시선을 고정하며 어서 마시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목을 타고 흐르는 술이 불길처럼 따끔거렸다. 시끄러웠던 장내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얼얼한 맛이었다. 울상인 얼굴을 보고 이현이 또 웃었다.
“말 잘 듣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 그가 현태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는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이현은 그저 권태로운 얼굴로 정신 놓고 놀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기만 했다. 여리에겐 무심했고, 그렇다고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걸 관망하는 자세로 가끔씩 조소를 뱉어 낼 뿐이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구석에서 지저분하게 놀고 있던 남자 하나가 여리의 손목을 움켜쥔 것이었다.
“이야, 처음 보는 얼굴이네? 이름이 뭐야?”
남자는 풀린 눈을 한 채로 독한 술 냄새를 풍겼다. 어지간히 취한 모양이었다. 여리는 굳어진 얼굴을 애써 다잡으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왜 이러세요. 이것 좀…… 놔주세요.”
“에이, 처음 왔으면 신고식을 해야지. 우리 이쁜이는 뭘 잘하나? 노래? 춤?”
남자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여리의 몸을 훑다 그녀가 이현의 곁에 앉아 있는 걸 보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순진하게 생겨서는 오자마자 이현이 옆에 앉은 거야? 속 보이는 녀……!”
쨍그랑― 깨지는 소리 뒤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자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소파 아래로 쓰러졌다. 장내는 잠깐의 정적이 있었고 이내 술렁였으며 모두들 한 남자의 눈치만 살폈다.
“겁도 없이 누구 물건에 손을 대.”
이현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흩어졌다. 쓰러진 남자에게로 쏠렸던 사람들의 시선이 깨진 술병을 들고 불쾌한 듯 인상을 구긴 이현에게로 향했다.
여리는 순식간에 일어난 끔찍한 일에 온몸을 덜덜 떨었다. 쓰러진 남자를 쳐다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남자는 피와 술 그리고 깨진 유리 파편으로 얼룩진 채 쓰러져 있었다. 크게 다쳤는지, 아님 죽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현이 깨진 술병을 아무렇지 않게 던져 놓고는 여리의 턱을 쥐고 제 쪽으로 돌렸다.
“야.”
자신을 부르는 이현의 목소리에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리는 두려움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방 안의 모두가 이현과 여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답 안 해?”
이현은 끔찍한 일을 벌인 당사자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여유로웠고 장난기 많은 소년처럼 웃었다.
“네…… 이사님.”
여리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이현의 눈이 매서웠다.
“내 옆에 있을 거면 처신 똑바로 해.”
“…….”
“헤프게 굴지 말고.”
억울했지만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뻣뻣해진 목을 억지로라도 움직여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 여리를 짜증스럽다는 듯 쳐다본 그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뭔 일 났어?”
이현이 느린 시선으로 한 명, 한 명을 쳐다보자 모두들 맡은 바 역할을 다하듯 다시 놀기 시작했다. 방금 전 누군가 그의 손에 맞아 머리가 깨졌든, 찢어졌든 그것은 아무 상관도 없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그를 위해 놀고, 웃고, 마시고, 춤추었다는 것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런 모습에 이현은 조용히 입꼬리를 말며 웃었다.
그는 어지러운 라운지 안을 완벽한 뒷모습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여리에게 호텔 키 하나를 건네주었다.

호텔 스위트룸으로 가는 동안 여리는 두려운 마음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밤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보다 그 남자가 한 남자의 머리통을 깨부순 사람이라는 사실이 더 두려웠다.
여리는 후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어 냈다. 마지막 남은 아주 작은 자존심과 두려움, 후회와 역겨움, 그 외에 모든 것을 뱉어 내고 싶었다.
방 손잡이에 호텔 키를 스치니 짧은 전자음과 함께 문이 철컥, 하고 열렸다. 방 안은 웬만한 집 한 채 크기만큼이나 넓었지만 어두웠다.
한 걸음, 한 걸음. 하이힐을 벗지도 못한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중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여기야.”
이현은 구석 테이블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클럽 라운지에서처럼 소파에 한껏 파묻힌 모습이었다. 빳빳하던 하얀 셔츠의 소매를 풀어 놓은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위태롭고 위험해 보였다.
두려움을 한껏 숨긴 채로 맞은편 소파에 앉자 피식, 하는 남자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야.”
“……네.”
“이름이 뭐라고?”
예명이냐고까지 물었으면서 그는 다시 한번 이름을 물었다.
“윤여리입니다.”
여리가 천천히 다시 말해 주자 그가 작은 목소리로 잘 어울리네, 라고 중얼거렸다.
“배우?”
그는 정말이지 여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만약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하는 거라면, 그런 식으로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주고 싶은 거라면 그의 작전은 훌륭했다.
여리는 스스로가 가여워졌다. 자신에 대해 조금도 모르는 남자 앞에서 웃고 기어야 할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수치스러웠다.
“아니요, 가수예요.”
“아―”
이현은 나지막이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돌?”
“네.”
“데뷔한 지가 2년이나 됐는데 사람들은 너라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고…… 딱하네.”
이현이 손에 쥔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긴 손가락을 따라 찰랑거리는 포도주가 애처로웠다.
그가 여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단순한 행동에도 위협적인 느낌이 서려 여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뒤로 물러났다.
이현은 화를 내지도, 웃지도 않은 채 뻗은 손을 가만히 두고 기다렸다. 쳐다보는 그의 눈이 깊고 날카로웠다. 여리는 천천히 상체를 기울여 그의 손끝에 제 얼굴이 닿을 수 있도록 했다. 이현이 긴 손가락으로 여리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얼마나 별 볼 일 없으면……. 쯧.”
이현은 여리를 지탱하던 실낱같은 가면을 한 번에 벗겨 냈다. 이런 일 따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몸뚱이 하나 파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양 여린 속을 감추던 여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기어코 참아 낸 눈물이 고삐 풀리 듯 주룩주룩 쏟아졌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더 비참해지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어 흐느낌을 참아 내는 것뿐이었다. 이현은 그런 여리를 차분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여리의 눈물에 당황하지도, 미안하지도 않은 아주 차분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이현이 다시 손을 뻗었다. 긴 손가락이 여리의 눈과 뺨을 지나쳐 입술을 매만졌다. 힘을 줘 깨문 탓에 핏기가 돌았다.
“깨물면 안 돼. 이제 네 것도 아니잖아.”
이현이 꽤 다정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정말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분명 잘생긴 얼굴로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인데도 한기가 서리고 소름이 돋았다. 손발이 덜덜 떨렸다.
“무서워?”
이현이 그런 여리의 손을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싫으면 나가도 돼. 억지로 하는 건 나도 싫어. 너한테 강요하는 사람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