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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보다 1분 더 2화
1. (2)


“살만 빼 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거야. 너한테 들이대는 남자도 많을 거고 넌 한 번도 못 해 본 연애라는 것도 하게 될걸?”
“그래서, 넌 연애해 봤니?”
“……뭐?”
혜수는 예상치 못한 지아의 공격에 말끝을 흐렸다. 계집애. 이런 식으로 친구의 가슴에 난 구멍을 사정없이 후벼 파다니.
“너 예쁘고 날씬하잖아. 한 번이라도 연애해 봤냐고. 내가 알기론 짝사랑만 삼세번인 걸로 아는데? 너 같은 애도 못 해 본 연애를 나도 굳이 하고 싶지 않아. 우리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자. 난 식욕, 넌 애욕.”
“……애욕이라니?”
“그저 남자하고 연애할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이 철딱서니 없는 것.”
지아가 혀를 끌끌 찼다. 혜수는 자신도 모르게 당황하여 큰 눈을 껌뻑거렸다. 이 친구, 뭐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저 당당한 표정은 또 뭐고. 혜수는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나 지아에게로 다가갔다.
“잠깐만. 내가 어떻게 보인다고?”
“0.1초의 찰나의 순간도 잡아내는 내 눈엔 그게 보여. 네 눈길이 요즘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다 보인다고. 이 허술한 친구야.”
지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혜수를 쳐다보았다. 탐정이 단서를 찾는 듯한 그 눈빛에, 혜수의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이 친구, 분명히 뭔가를 알고 있다. 하지만 설마, 그럴 리가. 장담하건대 혜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땐 절대 강욱에게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회의 시간에 그의 맞은편에 앉으려고 노력한 적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선배 기자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고 자신했다. 그랬는데 이 곰 같은 지아가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괜스레 제 발 저린 혜수는 지아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곤 의구심을 담은 눈빛을 하고 입을 열었다.
“너…… 너 정말…… 알고 있는 거야?”
“어라? 서혜수. 너 정말 뭔가가 있는 거야? 난 그냥 해 본 말인데 덥석 낚이네?”
“뭐어? 아, 진짜 이 나쁜 년이.”
혜수는 그제야 지아가 던진 농담이었다는 것을 깨닫곤 그녀의 팔뚝을 세게 쳤다. 그러자 ‘아앗!’ 하고 외마디의 비명을 내지른 지아가 팔뚝을 슬슬 문지르다가도 혜수에게 의구심을 품었다.
“너 왜 그렇게 안심하는 건데? 요것 좀 봐라. 수상쩍은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네.”
“됐어. 장난은 그만하고 삼계탕이나 먹으러 가자. 네 입 속으로 세 번째의 삼계탕이 들어가는 걸 꼭 봐야겠어.”
혜수는 민망한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서둘러 지아의 팔짱을 꼈다. 계속해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고 있던 지아는 마지못해 혜수를 따라 다시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혜수는 강욱과 마주쳤다. 보도국장실에서 나온 그가 혜수와 지아가 먼저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로 다급히 올라탄 것이다. 시선이 부딪치자 혜수의 가슴이 먼저 두근거렸다. 그의 옆구리에 끼워진 서류 뭉치로 스르륵 시선을 내린 그녀는 엉거주춤 고개를 까딱이곤 인사를 했다.
“이 피디님, 안녕하세요? 점심 식사는 하셨어요?”
지아가 활기찬 목소리를 내며 강욱에게 말을 걸었다. 앞서 있던 그가 슬쩍 돌아보았다. 베이지색 야상 점퍼가 살짝 흔들린다.
“지금 하려고.”
“아, 그러시구나. 저희도 밥 먹으러 내려가는 길이에요. 오늘 메뉴가 삼계탕이라고 하더라구요. 저 세 번째로 먹으러 내려가는 거예요. 호호호.”
“어련하겠어? 김 기자?”
강욱이 지아에게 무안한 대답을 보냈지만, 지아는 아랑곳하지 않은 듯했다. 그러자 이번엔 강욱의 시선이 혜수를 흘깃 향했다.
“넌 인사 안 해?”
“아까 했어요, 선배님.”
“인사라는 건 상대방과의 감정적인 교류인 건데 내가 알아채지도 못한 인사가 무슨 소용이야? 다시 해.”
장난인지 진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의 말과 표정은 상반되었다. 말투는 가벼운 반면 표정은 무척 엄격했던 것이다. 혜수는 정중하게 90도로 상체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혜수가 인사를 끝내자마자 엘리베이터는 지하 1층에 있는 구내식당에 도착했다. 토해지듯 그곳에서 내린 혜수는 먼저 식당 안으로 사라지는 강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인사를 해도 받아 주지도 않을 거면서. 야속한 남자 같으니. 혜수가 야멸친 강욱의 태도에 서운해하고 있는데, 그런 그녀를 지아가 살피는 눈길로 보고 있었다.
“서 기자야, 너 이 피디님하고 싸웠어?”
“아니. 내가 저 선배님하고 싸울 일이 뭐가 있어? 근데 왜?”
“아니. 이 피디님을 쳐다보는 네 표정이 좀 적대감도 있는 것 같고 어색함도 있는 것 같고. 예전에 너 입사했을 때 이 피디님이 멘토였다며. 그런데도 친해 보이지가 않아. 하긴 이강욱 피디님을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는 건 국장님이 유일할 거야. 그지?”
“빨리 들어가자. 배고파.”
혜수는 지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팔을 이끌었다. 이 눈치 9단인 친구의 촉수를 피하기 위해선 표정을 최대한 들키지 않는 것뿐이었다. 지아는 어어어, 하며 혜수에게 이끌려 갔다. 혜수는 지아의 몸무게를 유일하게 감당할 수 있는 악력을 가졌다.
점심시간을 10분 남겨 둔 구내식당은 막차를 타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방송국 직원들로 만원이었다. 혜수는 지아와 함께 쟁반을 들고 자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지아가 갑자기 팔꿈치로 혜수를 쿡쿡 찔렀다.
“저어기에 자리 있다. 가자.”
지아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은 강욱이 혼자 앉아 있는 테이블이었다. 혜수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못 이기는 척 지아를 뒤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이 도착하기도 전에, 강욱의 옆자리는 보도 1국 기자들이 차지해 버렸다. 빙긋 웃으며 강욱을 향해 인사를 건넨 무리들은 위풍당당히 삼계탕을 먹기 시작했다.
곧이어 지아가 다른 자리를 탐색한 후 혜수에게 저쪽으로 가자는 신호를 보내왔지만, 혜수는 허전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등만 봐도 절로 터지는 깊은 한숨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마음은 이미 사춘기를 겪고 있는 여고생이었다. 혜수는 지아를 뒤따랐다.

* * *

강욱은 자판기에서 뽑아낸 커피 잔을 들고 정문 밖 쉼터에 앉았다. 그러곤 손 국장이 건넨 상반기 개편안을 진지한 표정으로 들여다보았다. 삼계탕을 절반도 채 먹지 못한 건 이 개편안 때문이었다. 자신을 평일 밤 9시 뉴스 메인 피디로 내정하겠다는 부분 때문이었다.
손 국장이 강욱에게 9시 뉴스를 제안한 건 작년부터였다. 평일 밤 9시 뉴스는 보도국 피디라면 누구나 탐을 낼 자리였다. 강욱은 주말 밤 9시 뉴스를 맡고 있었지만, 같은 9시 뉴스라도 평일과 주말은 엄연한 ‘급’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러나 조연출을 벗어나 연출 자리에 오른 지 이제 겨우 3년째인 그에겐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방송국 내부에 자신만의 라인을 탄탄히 만들기를 원하는 손 국장의 손에 놀아날 생각 역시 없었다.
물론 손 국장이 현역에 있을 때부터 자신을 응원했던 걸 모르지 않았다. 업무에서나 일상에서나 늘 도움의 손길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자력(自力)이 아닌 억지로 이런 행운을 거머쥘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때? 생각이 바뀌긴 했어?”
언제 다가왔는지 손 국장이 강욱의 옆자리에 앉았다. 강욱은 그를 힐끔 보곤 다시 서류에 눈을 두었다.
“그만 들여다봐라. 아까 국장실에서 다 했던 얘기잖아. 그냥 툭 까놓고 네 생각만 말해. 할 거야, 말 거야?”
손 국장은 강욱에게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강욱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방송국 앞 넓은 마당에 오가는 사람들에 시선을 두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국장님은 제가 하기를 바라세요?”
“당연하지, 인마. 평일 9시 뉴스를 개나 소나 맡는 건 아니니까. 기회가 왔을 때 잡아. 너 지금 주말 9시 뉴스 하는 거, 시간만 옮긴다고 생각하라고. 내가 너한테 돈다발 땡겨 오라고 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차라리 어디 가서 돈다발 좀 가져오라고 하시는 편이 나을 뻔했어요. 경력 있는 선배 피디님들을 제치고 새파랗게 어린 제가 9시 메인 뉴스를 맡는다는 게 말이 안 돼요. 저 그렇게 얼굴에 철판 깐 놈 아닙니다. 선배님들을 무슨 낯으로 뵈라고 그러십니까.”
“이것 봐, 이것 봐. 우리나란 이래서 안 된다니까.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을 대체 누가 만든 거야? 야! 이 피디! 여긴 회사야. 능력 있는 사람을 대우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 골방에 앉아서 고리타분한 말이나 씨부렁대는 중늙은이들은 필요가 없어요. 회사가 널 원한다고! 회사가!”
“소리 좀 낮추세요, 국장님. 누가 보면 제가 국장님한테 야단맞고 있는 줄 알겠습니다.”
“너 야단치는 거 맞아, 인마. 너 설마…… 내가 라인 만든다고 널 추천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냐? 응? 그런 거야?”
강욱은 고개를 돌려 손 국장을 보았다. 60세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손 국장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강욱이 갓 입사했을 때 방송국을 제집처럼 뛰어다니는 그 활기는 온데간데없어졌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하지만 강욱은 섣부른 욕심을 품지 않았다. 손 국장이 밀어주고 강욱이 아무리 탐을 낸다 해도 그 자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간절하고 절실한 일이 있어도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럼 아닙니까?”
“아냐! 아니라고!”
강력한 손 국장의 부인에 강욱마저도 흠칫 놀랐다. 손 국장이 말을 이었다.
“……후우. 내가 너 그런 오해 하고 있을 줄 알았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지방대 졸업하고 상경해서 죽도록 공부하고 겨우 입사했는데 왕따만 당했던 나였지. 학연이 없다는 이유로. 그런 내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해. 그런데 난 아냐. 난 죽기 살기로 덤볐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는 부류가 바로 그 ‘라인’을 만드는 인간들이라고!”
“진정하세요, 국장님. 숨 좀 쉬시고.”
“후우. 후우. 내가 국장이 되면서 가장 먼저 다짐한 게 뭔 줄 알아? 하는 일 없이 탱자탱자 놀면서 월급은 남들보다 몇 배로 챙겨 가는 골방의 늙은이들 말고, 젊고 신선하고 일도 열심히 하는 인물들로 보도국을 갈아 치우자는 거였어. 그 시작이 이 피디, 너고.”
강욱은 손 국장의 진심 어린 표정에 사뭇 진지해졌다. 손 국장이 아니라고 하면 아닐 것이다. 적어도 그런 거짓말로 상대를 쥐었다 폈다 할 정도로 엉망인 사람은 아니었다. 강욱은 그제야 마음을 풀고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못마땅했던지 손 국장이 흘겨보았다.
“이 피디 넌 왜 그렇게 야망이 없냐. 다른 사람들 같았다면 얼씨구나 하면서 덥석 수락했을 텐데.”
“글쎄요. 야망이 없다기보다는 그냥저냥 사는 쪽을 택한 거죠. 변화 없이 사는 게 가장 속 편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라서.”
“노친네 같은 소리만 하네. 됐고, 우선 네 팀을 꾸려. 그 권한은 전적으로 너한테 줄 테니까. 기자들 중에선 김지아가 어때? 움직임이 둔하긴 하지만 의외로 민첩하고 빨라. 사고력도 풍부하고. 사회부지만 정치 경제에도 박학다식해.”
“생각을 좀 더 해 보겠습니다. 아, 화내진 마시고요. 저도 제 앞날을 어떻게 꾸릴지 고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배님들의 눈초리와 질시를 어떻게 감당할지도 생각해야 하구요.”
강욱은 몸을 일으켰다. 빈 종이컵을 구겨 벤치 옆에 있는 휴지통으로 휙 날린다. 그러자 손 국장도 따라 일어났다.
“국장님은 좀 더 앉아 계시죠? 날씨도 좋은데.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강욱은 손 국장에게 인사를 건넨 후 돌아섰다. 등 뒤로 ‘아, 진짜 저 녀석이.’라는 손 국장의 한탄에 강욱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강욱은 손 국장에게서 받았던 개편안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은 후 창가로 다가갔다.
3평도 채 되지 않는 이 작은 사무실은 그가 유일하게 치열한 가슴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일에 치여 고단한 몸도,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로 다친 마음도, 이곳에선 다 놓아 버릴 수가 있다. 그래서 어쩌면 클래식 음악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을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른다.
발전적인 변화였다. 적어도 반쯤은 잊었다는 거니까.
강욱은 다시 돌아서서 책상에 앉았다. 손 국장의 제안에 대해 사적인 감정과 상황을 모두 버리고 객관적으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었다. 9시 뉴스 메인 피디.
“딱 하나 좋은 점이 있긴 하지.”
머리를 비우고 아무 생각 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