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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아버지의 의뢰인(2)


결국 어렵사리 약속장소인 한정식집에 도착했을 땐 약속 시간에서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고풍스러운 한옥에 잘 꾸며진 아기자기한 한정식집은 제법 손님이 많은 곳인 듯했다. 조용한 분위기에 간간이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복도 한 켠에 작게 꾸며진 실내정원에선 또르르 물 흐르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방을 안내해 준 주인아주머니가 사라진 뒤, 하율은 망설이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너무 늦어 버려 민망함을 가득 담은 그녀의 목소리에 방 안에 앉아 있던 남자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나이 지긋한 중년의 아저씨를 상상했었는데 의뢰인은 예상 외로 젊은 남자였다.
일을 하고 있었던 듯, 노트북을 앞에 두고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인 남자의 세련된 분위기는 그녀가 예상했던 의뢰인의 이미지하고는 많이 달랐다.
비밀스러운 일을 의뢰하는 사람 같은 음습한 느낌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성공한 사업가 같은 당당함과 기품이 넘쳐흘렀다. 그녀가 좋아하는 배우처럼 쌍꺼풀 없는 날카로운 눈매가 몹시 근사해서, 외모로만 본다면 영화배우나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이 의뢰한 일이 무엇일지, 조금 궁금해지기도 했다.
검은 상자를 꼭 끌어안고 어정쩡하게 들어서는 그녀를 남자는 그저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 한 마디도 없으니 마음이 더욱 불편했다. 두 시간이나 늦었으니 기분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남자에게 다가가 상자부터 불쑥 내밀었다.
“저기, 이거…… 공 탐정사무소에서 전해 달라는 물건이에요.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며 두 손으로 정중하게 내미는 상자를 남자가 받아 들자, 할 일을 끝냈다는 안도감이 마음 한구석에 편안하게 찾아들었다. 이제 얼른 이 자리를 뜨는 일만 남았다. 이만 가 보겠다는 말을 막 꺼내려는데 남자가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 놓고 천천히 일어섰다.
“태건웁니다.”
“……네?”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남자가 내민 손엔 명함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아아, 이름이었구나. 태건우. 검은 바탕에 금빛으로 선명하게 새겨진 남자의 이름 세 글자가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일의 특성상 회사 밖의 사람들과 접촉할 일이 별로 없었던 하율에게 명함을 주고받는 일은 조금 생소한 경험이었다. 명함을 받고 멍하니 있다가 문득 자신도 명함을 건네야 할 것 같아 뒤늦게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공 소장님 따님이시라고요.”
“아아, 네. 공하율입니다.”
지갑 한구석에서 겨우 찾아낸 꼬깃꼬깃한 명함을 건네며 하율은 어색하게 웃었다. 입사하면서 바로 회사에서 만들어 준 명함이었지만, 실제로 주고받은 일은 처음이라 어딘지 멋쩍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회사로 다시 들어가 봐야 해서요.”
빨리 이 불편한 만남을 끝내고 싶은 마음에 얼른 작별을 고하자 남자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기분이 나쁘다는 뜻인 것 같기도 했다.
“식사하고 가시죠. 기다리느라 저도 아직입니다만.”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마치 너 때문에 아직도 굶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차마 그냥 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배가 고픈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눈길에 회사까지 운전하고 가려면 지금 출발해도 11시가 다 될 것 같아 망설여졌다.
“전해 주신 물건도 확인을 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리 주문해 두었으니 음식이 곧 나올 겁니다.”
하율은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남자는 벌써 얘기가 다 끝났다는 듯 자리에 앉아 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녀는 남자를 마주 보기가 멋쩍어서 상자에 시선을 두었다. 상자에서 나온 물건들은 두툼한 서류 뭉치와 사진 몇 장, 그리고 USB가 전부였다. 무슨 일인지 내용물을 확인하는 남자의 눈매는 몹시 날카로워져 있었다.

노트북에 꽂은 USB에서 뭔가를 계속 확인하느라 남자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어색함을 피하느라 계속 음식을 집어 들다 보니 결국 그 많은 접시를 다 비운 건 하율이었다.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와 과일까지 다 먹도록 심각한 얼굴의 남자는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밥도 안 먹고 몰두하는 걸까. 남자에게 좀 먹으라고 권할 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찾아왔지만 이미 상은 깨끗이 비워진 후였다.
“저기, 물건 다 확인하셨으면 저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망설이다 어색하게 꺼내는 그녀의 말에 그제야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마치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듯한 분위기에 조금 민망해졌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공 소장님께 감사하다고 꼭 전해 주십시오.”
“네. 식사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남자는 아직 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간단히 인사를 건넨 하율은 조용히 방을 나왔다.

***

밖은 몹시 추웠다. 눈은 아까보다 훨씬 많이 쌓여 있었고, 하늘이 뚫린 것처럼 펑펑 내리는 함박눈은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도 벌써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대충 눈을 털어 내고 차에 올라탄 그녀는 운전석에 앉기 바쁘게 시동을 걸었다.
지금 가도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내일 아침까지 리뷰서 초안을 제출하려면 회사에서 밤을 꼬박 새야 할 것 같았다. 근데, 이게 왜…….
무슨 일인지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아 하율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열 번이 넘게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 소용없었다. 고장이라도 난 걸까.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해 이것저것 확인해 본 결과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된 상황인 듯했다. 아무래도 주차하면서 미등을 끄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참 만에 보험회사의 전화번호를 찾아 긴급출동을 요청했지만 빨리 처리되기는 힘들 것 같았다. 날씨가 궂은 데다 외진 곳이라 오는 데 한 시간도 넘게 걸린다고 했다.
긴급출동 요원이 올 때까지 그래도 따뜻한 데서 기다리는 게 낫겠다 싶어서, 차에서 내려 식당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길 때였다.
“공하율 씨?”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하율은 깜짝 놀랐다. 시선을 돌려 보니 아까의 그 남자가 주차장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조금 민망했다. 그렇게 바쁜 척 나오고서 아직도 주차장에 있는 게 이상해 보일 것도 같았다.
“아직 안 갔습니까?”
남자가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게……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어서요. 보험회사에 연락했는데 오려면 한참 걸린다고 해서 식당에서 좀 기다리려고…….”
“어느 찹니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물었다.
“네? 저기…….”

보닛이 열린 두 대의 차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트렁크에서 점프선을 꺼내 자신의 차와 그녀의 차에 연결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하율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장비가 있는 줄도 몰랐기에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장비도 장비지만 대수롭지 않게 장비를 다루는 남자가 그녀의 눈에는 무척이나 경이로웠다.
“금방 되니까 내 차에 잠깐 앉아 있어요.”
남자의 목소리는 식당에서 들었을 때나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만 하율의 귀에는 어쩐지 아까보다 훨씬 친절하게 들렸다. 제 차 때문에 고생하는 남자를 밖에 세워 두고 혼자 차 안에 있으려니 염치가 없는 것 같았지만, 추위에 몹시 약한 그녀는 남자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조수석에 앉아서 둘러본 남자의 차는 몹시 깔끔하고 쾌적했다. 늘 담뱃재나 먼지가 폴폴 날리는 아버지의 차와는 차원이 달랐다. 흔한 장식 하나 달려 있지 않은 내부는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잠시 뒤 남자가 차 문을 열고 들어와 운전석에 앉자 하율은 조금 놀랐다. 키가 큰 그가 바로 옆에 있으니 갑자기 차가 꽉 찬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워낙 가까운 거리라, 바깥에 있다 들어온 그에게서 차가운 기운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은은한 머스크향과 차가운 바람 냄새가 어우러져 남자에게선 몹시 좋은 냄새가 났다.
시동을 건 후에 계기판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를 하율은 저도 모르게 훔쳐보고 말았다. 바로 옆에서 보는 남자의 모습은 아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눈을 잔뜩 맞아 살짝 젖은 앞머리가 오뚝한 콧날 위로 흘러내려 굉장히 근사해 보였다. 원래도 잘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뭐랄까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이제 시동 걸어 봐요.”
“네, 네?”
갑자기 남자가 입을 열자, 훔쳐보고 있던 것을 들킨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하율 씨 차, 이제 시동 걸릴 겁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괜스레 부끄러워진 하율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얼른 차에서 내려 제 차로 옮겨 탔다.
차는 정말로 마법처럼 시동이 걸렸다. 기뻐서 환호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갑자기 그가 굉장히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건 아마도 그녀가 자동차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초보 운전자인 탓일 거다.
“저기요, 시동 걸렸어요! 너무 감사합니다.”
창문을 열고 신이 나서 외치자, 남자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그럼 조심해서 가요.”
그의 차와 연결된 점프선을 빼고 보닛까지 꼼꼼하게 닫아 준 남자가 작별을 고하자 그녀는 조금 아쉬워졌다. 이제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이라는 게 어쩐지 서운했다.
그는 바로 차에 타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차가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얗게 내리는 눈 속에 그림처럼 서 있는 그를 사이드미러로 곁눈질하며, 하율은 천천히 차를 몰기 시작했다. 남자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녀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보라를 헤치며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내내 웃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 조심해서 가요.」

남자의 목소리가 잔상처럼 남아 계속 귓가를 울렸다.
태건우. 인상적인 눈매와 함께 이름 세 글자가 또렷이 가슴에 남았다.
아마도 그녀는 눈 오는 날을 몹시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2. 뜻밖의 재회(1)


“그래, 어떻더냐, 태 상무는?”
아버지가 저녁을 먹다 말고 지나가듯 물어오자, 하율은 한입 가득 집어넣었던 상추쌈이 목에 걸리는 것 같았다. 계속 부산에 계시다가 오늘에야 올라오신 아버지는 열흘이나 지난 일을 이제야 묻고 계셨다.
“그냥…… 그렇죠 뭐. 물건 잘 전해 줬다고 문자 드렸었잖아요. 밥도 잘 얻어먹고요.”
어떻냐는 광범위한 질문이 무얼 물으시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상무라는 직함을 붙여서 부르니 그가 더욱 먼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날 회사로 돌아가자마자 궁금한 마음에 지갑에 넣어 둔 그의 명함부터 꺼내 봤었다. 업무상 만나는 사람들마다 건네는 별 의미 없는 작은 종이겠지만, 그것이 그녀에겐 지극히 개인적으로 소중하게 느껴졌었다.
딱히 뭘 기대했다기보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었는데, 명함을 꺼내 든 순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받을 땐 경황이 없어 제대로 못 봤었나 보다. 태건우라는 이름 아래에 작은 글씨로 ‘상무이사’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명함 상단에 로고와 함께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회사 이름은 천강건설, 국내 5대 그룹 중 하나인 천강그룹의 주력 계열사였다.
그렇게 젊은 사람이 대기업의 상무라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천강그룹의 총수가 태 씨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흔하지 않은 성씨니 혹 일가친척이라도 되는 걸까. 궁금하다고 느꼈던 순간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여 인터넷을 검색하고 있었다.
결과는 금방 나왔다. 태건우는 대한민국이 다 아는 천강그룹의 총수, 태준걸 회장의 손자였다.
아아, 유명한 사람이었구나.
그가 자신과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는 것이 대충 짐작되자, 살짝 설레었던 마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보통 사람이었어도 뭘 어쩔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별말은 없었고?”
아버지가 삼겹살을 상추에 싸서 건네주고 계셨다. 딸 바보인 아버지는 지금도 자신의 딸이 세상 최고로 귀한 줄 아는 분이다. 세상 둘뿐인 부녀라 그건 그녀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쌈을 받아 옆에 놓고서 그녀도 상추에 삼겹살과 마늘을 듬뿍 얹었다.
“네. 그냥 조심해서 가라고…… 아빠한테 감사하다고 전해 달랬어요.”
큼지막하게 싼 상추쌈을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리며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아버지는 기분 좋게 웃으며 커다란 쌈을 우걱우걱 씹어 드셨다.
“알았다. 내가 따로 연락해 보마.”
“네.”
설거지를 하면서 창밖을 내다보니, 무릎을 넘길 정도로 높게 쌓였던 그날의 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저 고마웠던 기억 정도로 묻어 두었던 일이 아버지가 묻는 바람에 다시 새록새록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날의 그는 전혀 곱게 자란 재벌집 도련님처럼 보이지 않았었다. 그 추운 날, 쏟아져 내리는 눈으로 옷이 다 젖어 가는데도 처음 본 사람을 위해 능숙하게 차를 정비해 주던 모습은 그녀가 생각했던 금수저 청년들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다. 어쩌면 저도 모르는 새 있는 집 자제들에 대한 편견을 깊게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할 때마다 회사 건너편에 있는 천강 빌딩이 눈에 들어오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에게 그녀는 이제 만날 일도 없는, 그저 심부름 한 번으로 스쳐 간 사람일 뿐이니까.

***

오랜만에 회식이 잡혔다. 그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왔던 신게임의 CBT를 이틀 앞둔 날이었다. CBT는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뜻하는 게임계의 약어로, 새로운 게임을 정식으로 출시하기 전에 지원자들을 모집해서 비공개로 진행하는 테스트였다. 일단 CBT 기간이 시작되면 회사가 정신없이 바빠질 것이기에, 그전에 사기진작을 위해 마련된 특별 회식이었다.
회사 사람들과 어울려 밖으로 나오면서 하율은 건너편의 천강빌딩에 저도 모르게 눈길을 주고 말았다. 신축빌딩의 위쪽에 커다랗게 설치된 전광판에서 파란색의 천강그룹 로고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냥 회사 가까이에, 눈에 잘 띄는 데 있으니까 눈길이 가는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하율은 걸음을 빨리해 얼른 여직원들 무리에 섞여 들었다.
“하율 씨, 이번에도 한 건 했다며?”
아트팀의 신 팀장이 환하게 웃으며 하율의 어깨를 툭툭 쳤다. 트렌치코트가 몹시 잘 어울리는 그녀는 게임의 캐릭터와 배경 원화를 책임지는 아트디렉터로, 하율이 꿈꾸는 세련되고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의 표상이었다.
입사한 지 3개월밖에 안 되는 막내였기에, 하율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긴장되어 겨우 입을 떼었다.
“한 건이라뇨. 뭐가…….”
“희한한 버그들 찾아내서 개발팀이 아주 뒤집어졌었다면서 뭘 모르는 척이야.”
테스트 리뷰서에 사소한 오류까지 전부 적어 내는 그녀를 개발팀에서 골칫거리로 부른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래도 나중에 게임 출시되고 나서 유저들한테 오류 지적받고 불만 접수되는 망신보다는 나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게 아니었나. 신 팀장이 무슨 의미로 얘기를 꺼내는지 몰라 하율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아, 아이템 복제되는 거요. 중요한 건 아닌데 혹시라도 출시되고 나서 문제될까 봐…….”
“잘했어!”
갑자기 신 팀장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아오, 개발팀장, 그렇게 잘난 척 허세 부리더니 쌤통이라고.”
“맞아요. 어느 유저가 그런 듣보잡 플레이로 아이템을 복제하겠냐며 툴툴거리다가 부사장님한테 한 소리 들었잖아요. 처음에 여자가 무슨 테스터냐고 하율 씨 무시하고 막 그랬었어요. 원래도 QA팀 자체를 좀 무시했고요. 진짜 더 당해 봐야 되는데.”
개발팀의 윤 대리도 끼어들었다. 신 팀장과 윤 대리가 죽이 맞아 개발팀의 백 팀장을 거하게 성토해 댔다. 다른 여직원들도 대화에 합세해 회식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율이 속한 QA팀은 개발 중인 게임을 테스트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개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테스트해서 오류나 밸런스 불균형 등 여러 문제를 찾아내어 게임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을 하는데, 간혹 프라이드가 높은 개발자들의 경우는 자신들이 개발한 게임에서 오류를 찾아내는 QA를 그닥 달가워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율 씨, 다음번엔 더 화끈한 걸로 부탁해. 내가 그 자식 꼭 회사에서 쫓아내고 만다. 화이팅!”
완벽한 커리어우먼의 표상이던 신 팀장에게서 걸걸한 말들이 튀어나오자 하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