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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해진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무 그늘 사이로 간간이 새어 드는 눈부신 햇빛을 느끼며 아무 곳에나 자리 잡고 앉아 빵 하나를 뜯어 먹고 있자니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매일 이렇게 평화롭기만 하면 소원이 없겠네.
딸기가 생으로 들어 있는 크림빵의 맛은 환상적이었다. 돈이 없어서 식비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보니 음식에 미련 같은 게 생겨 버린 해진이었다. 수중에 들어온 음식은 빼앗기지 않겠다는 집념이랄까. 그래도 맘에 든 사람에겐 잘 나눠 주곤 했다. 부모님이 늘 달고 살던 말이 나눔에 인색하지 말라는 것이었으니까.
“미련할 만큼 착하게 살더니 그리 일찍 가시면 어떡해…….”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런 죽음이라 충격은 더욱 컸다. 평소처럼 웃으며 나가셨던 두 분이 싸늘하게 식어 되돌아올 거란 생각 따위 한 적도 없던 게 당연했다. 지금은 머리가 컸다고 부모님을 생각하면 조금 먹먹한 기분과 안타까움만 느끼지만……. 이렇게 비현실적인 죽음과 다른 차원에 와도 멀쩡할 정도로 원래의 세계에 미련 남길 만한 존재나 의미가 없다는 건 좀 불쌍한 놈인 것 같기도 하고. 뭐…… 어딜 가든 잘 살면 장땡이지.
뻥 뚫린 하늘을 보며 상념의 꼬리를 물던 해진은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내렸다. 한국에서는 못 보던 풍경들을 보더니 잠깐 감수성이 폭발했나 보다. 우울한 생각은 훌렁 털어 버려야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다. 암, 그렇고말고.
“안녕하세요.”
“……?”
누워서 잠이나 자 볼까 하고 앉아 있던 땅바닥 주위를 툭툭 치며 고르는 그의 위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갑자기? 이 세계에서 자신에게 저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할 사람은 없다는 걸 아는 해진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웬 남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결 좋은 금발하며 선명한 연두색 눈동자, 고급스러운 옷이 딱 봐도 나 높은 사람이요, 하는 모습이다.
“어…… 안녕.”
건성으로 한 인사에 남자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해진의 또래이거나 몇 살 더 먹은 외모로 보이는데 신기하게도 썩 상큼한 미소다. 그러나 왠지 꺼려지는 기분에 그는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남자는 대충 걷는 것 같음에도 품위가 느껴지는 걸음으로 해진에게 가까이 오더니 아닌 척하며 탐색하듯 그의 몸을 위아래로 살폈다. 왠지 소름이 돋는 눈빛이었다. 종종 뛰어난 감을 발휘하곤 했던 해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탐색하듯 훑어봤다. 시선을 맞받아치며 너 수상하다? 하는 해진의 눈빛에 남자가 본심을 숨기듯 부드럽게 웃었다.
“여긴 황제 폐하의 허가가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는 정원인데……. 처음 보는 분이군요. 귀족가의 자제신가요?”
“……글쎄.”
황성이랍시고 어딜 가나 저 황제 폐하 소리가 안 들리는 곳이 없구나. 직위도 명분도 없는 해진이 말을 얼버무리자 남자의 눈이 일순 번뜩이며 빛났다. 쟨 뭐지. 남자는 이제 대놓고 수상한 미소를 짓더니 해진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우뚱했다.
“당신은 제 꿈에서 나타났나요?”
“엉?”
“어쩜 이렇게 제가 꿈꿔 오던 이상형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거죠?”
뭐래, 시발. 이 세계는 게이밖에 없는 건가. 아님 내가 여자로 보이는 건가. 이세계에서의 첫날임에도 만나는 놈들마다 족족 헛소리를 해 대는 것에 제대로 짜증이 나려 했다. 게다가 헛소리하는 놈들이 상판은 죄다 번드르르해서는. 가는 곳마다 지뢰나 밟아 대니 재수 지지리도 없다 생각한 해진은 벌떡 일어나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냈다. 그리고 소중한 음식 바구니를 챙긴 뒤 남자를 쫙 노려봐 주고 몸을 돌렸다.
요상한 짓을 하는 놈들이 다 겉만 멀쩡하니까 오히려 더 기분 나쁘다. 어차피 여기서 더 이상 갈 곳도 없겠다, 성 내부를 좀 둘러보다가 혹시 바닥에 보석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그거나 챙겨서 나가야겠다. 짧은 순간에 결정을 내린 해진은 정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갑자기 엄한 곳에서 불쾌한 감각이 느껴지지만 않았다면.
“…….”
설마, 착각이겠거니 했지만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손길은 대담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저놈이 남의 엉덩이를 떡처럼 주무르고 있는 거? 어느새 가까이 온 건지, 해진의 바로 뒤에서 겉모습만은 멀쩡한 변태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귀에 속삭인다.
“탄력 있는 엉덩이네요. 당장 발가벗겨서 내 물건을 쑤셔 넣고 싶어요.”
아……. 귀가 허무하게 순결을 잃었습니다. 허락해 줄래요? 따위의 말을 속삭이는 남자는 여전히 해진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변태도 이런 상변태가 없다. 자신에게 성추행을 시도하는 변태는 난생 처음 만나 본 해진은 잠깐 패닉에 빠졌다. 아까의 그 황제라는 남자도 입술 박치기를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변태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패닉에 빠질 시간도 주지 않으려는 건지, 엉덩이를 더듬는 것도 모자라다는 듯 슬슬 앞으로 움직이는 남자의 손길을 느끼고 해진은 몸을 휙 돌려 남자와 마주 섰다. 상큼하게 웃고 있는 눈에 깃든 것이 질척한 욕망이란 걸 이젠 확실히 알겠다. 자고로 아랫도리 주체 못 하는 놈들에겐.
―뻐억!!
불능이 되는 니킥을 선사해 줘야 한다. 얼굴이 퍼렇게 질려 몸을 숙이고 부들부들 떠는 남자에게 픽 비웃음을 보낸 해진은 그의 다리 사이로 날렸던 무릎을 내렸다.
“고자 새끼.”
자꾸 날 폭력적으로 만들지 말란 말이다. 대학 다닐 땐 편안하게 공부만 하며 지냈는데 왜 여기 놈들은 사람을 못 건드려서 안달인 걸까. ……맞는 걸 좋아하나? 흐음. 예상치 못한 충격에 몸이 굳어 버린 남자가 뒤에서 뭐라고 중얼거리든, 해진은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고 소중한 바구니를 다잡고 미련 없이 정원 밖으로 향했다. 황제도 때렸어, 귀족 같은 놈도 때렸어. 귀찮아지기 전에 성 밖으로 튀어야겠다.

* * *

황성은 그 이름이 아깝지 않게 멋졌다. 그런데 아쉽게도 해진이 원했던 바닥에 떨어져 있는 보석은 없었다. 벽까지도 반짝반짝하니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하나쯤은 툭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기대했는데……. 어쩐지 이 넓은 성에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더라니. 청소하는 시녀나 시종들이 주워 간 건가? 잽싼 것들.
해진은 아쉬움에 쩝 입맛을 다셨지만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성의 내부를 더 돌아다녔다. 종종 기사나 시녀들과 마주치긴 했지만 해진이 너무 당당하게 복도를 거닌 덕분에 되레 살짝 목례까지 하면서 지나갔다. 역시 사람은 당당해야 한다. 음. 웬만하면 이런 좋지 못한 곳을 돌아다니지 않고 성 밖으로 나갔겠지만 해진은 지금 자신이 빈털터리 신세라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 물론 밖으로 나가면 일자리를 구하긴 해야겠지만 이것도 기회라고 하면 기회인 것이니 뭐라도 하나 얻어서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 좀 주워 가쇼, 하면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보석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 왠지 아무 방에나 들어가면 하나 팔아먹고도 한참을 놀고먹을 가치의 물건이 떡하니 있을 것 같지만 그건 진짜 도둑질이라 찝찝하니까, 이왕이면 바닥에 떨어진 거 줍고는 시치미 뗄 생각이었는데……. 어쩌나. 진짜 도둑질이라도 해 버려?
잠깐 진지하게 고민한 해진은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작은 감탄사를 흘리며 고민을 끝냈다. 이럴 때 공간이동을 하면 되는구나. 편한 거 뒀다 뭐한다냐. 게다가 조건으로 이동하는 거니 지금 상황에 딱이네. 땅을 파고 들던 저승사자에 대한 호감도가 아주 조금 상승했다.
“그럼…….”
조건은 이 성에서 가장 비싼 것들이 모여 있는 방. 해진이 생각한 것은 금고나 보물 창고 같은, 성이라 하면 탁 떠오르는 것들이었다. 굳이 ‘방’이라고 한 이유는 애매하게 ‘공간’이라고 했다가 금고나 상자 같은 곳으로 이동되는 건 아닐까 하는 노파심에서였다. 아직 본인도 제대로 모르는 능력으로는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싼 것들이라 하면 보통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을 떠올릴 것이다. 순금으로 만든 잔이라든가, 액세서리라든가,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고대 유물이라든가. 물론 그런 걸 지키는 자들이 없을 리가 없지만, 대부분 밖에서 경비를 서지 보물이 있는 방 안까지 들어오진 않잖아? 어차피 내부로 이동될 테니 뭐― 하는 생각에 별 걱정 없이 떠올린 조건이었다. 그런데 왜, 시발…….
“누구냐!”
“침입자다!”
갑자기 나타났다, 마법을 쓰는 놈이다, 당장 잡아라 등등……. 해진은 거칠게 귓가를 때리는 소리들을 배경음 삼아 어이없는 표정으로 앞에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너 나랑 전생에 원수였냐? 가는 곳마다 이름으로라도 쫓아다니더니 이젠 실물이 다 보이네. 뭐, 네가 온 게 아니라 내가 온 거긴 하다만.
하얀 머리의 야수 같은 남자 즉― 황제는, 그 냉혹한 얼굴에 놀람이라는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 놓고 있다가 슥 손을 들어 소란스러운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당장에라도 해진을 찌를 것처럼 창과 칼을 들이대던 병사들도 그대로 멈춰라! 상태로 황제와 해진을 번갈아 가며 주시했다.
해진은 티 안 나게 눈을 굴려 주위를 둘러봤다. 직사각형의 기다란 탁자와 황제의 자리인 듯한 고풍스러운 의자가 상석에 놓인 게, 상황과 맞물려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회의장인 것 같았다. 게다가 갑자기 쑥 나타난 해진을 경계하느라 일어나 있는 사람들의 차림새나 반질반질한 얼굴은 척 봐도 귀족임을 알 수 있었다.
공간이동 이 새끼. 자아라도 있나. 왜 지멋대로 판단해서 날 이런 데로 이동시킨 거냐. 저들이 진짜 귀족이라면 하나하나가 보물에 비하고도 남을 가치를 지닌 인물들이겠다만……. 황제도 있으니 말 다 했지. 그런데 내가 언제 사람이랬냐고요. ……하아.
모든 사람들이 경계하며 해진을 응시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여유로운 낯의 황제는 피식 냉랭한 미소를 걸치고 해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상황에 관계없이 마음대로 신출귀몰할 수 있다고 해도 그전에 칼에 맞아 죽거나 하면 끝인 거다. 이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숱한 흉기들은 맘에 안 드는데. 지금 당장 나가 버릴까.
“지하 감옥 정도는 쉽게 탈출할 수준이란 건가?”
“……음.”
맞는데. 그걸 너한테 알려 줄 이유는 없다. 해진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감옥을 탈출할 능력은 있는 거라 판단했는지 눈에 이채를 띤 황제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역시 얼굴이 중요하다고, 남들이 지으면 비열하게만 보일 표정이 화보의 한 장면처럼 지독하게도 잘 어울렸다. 물론 해진은 별다른 감흥 없이 저놈이 왜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나 생각했을 뿐이다.
황제는 자신을 보호하듯 주위를 둘러싼 병사들을 제치고 해진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삐뚜름하면서도 유혹하는 듯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해진에게 손을 뻗었다. 허나 그 순간, 회의실의 문 앞에 포진해 있는 기사들의 사이를 제치고 불쑥 쳐들어온 뭔가가 싸하게 굳어 있던 분위기를 깨트렸다.
“폐하!!”
마치 잘못된 행실을 지적하는 충신처럼 엄중하고도 당당하게 소리친 남자는, 결 좋은 금발의 소유자였다.
“저 변태 새끼…….”
이건 정말 반사적인 중얼거림이다. 본능이다, 본능. 가까이에 있어서 해진의 말을 그대로 들은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곧 난입한 남자에게로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울던 애가 놀라서 기절할 정도로 매서운 눈빛이었다.
“헤르슈텐 공작. 지각인 주제에 사뭇 당당하군 그래.”
“죄송합니다. 그런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거든요.”
공작? 공작이면 귀족 중에서 제일 높은 그거 아닌가? 원래 있던 곳과는 완전히 다른 이세계에서도 전의 지식이 적용될지는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다 비슷할 것 같다. 그런데 저런 놈이 공작……. 해진은 이 나라의 암울한 미래에 잠깐 탄식했다. 금발의 남자는 숱한 사람들의 시선에도 특유의 여유로움을 잊지 않고 거침없이 해진에게로 다가왔다. 정확히 자신에게로 향하는 변태의 걸음에 해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왜 여기로 오는 건데.
변태는 회복력도 빠른지 거시기에 니킥 먹여 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매우 멀쩡해 보였다. 그리고 그 금발머리 진짜 안 어울린다, 변태 새끼야. 답지 않게 왜 반짝반짝 빛나는 거야. 당장 음지로 돌아가 버려.
“이 무례한 것들 저리 치우고.”
그는 해진을 향해 있는 무기들의 날카로운 끝을 툭툭 밀치며 마치 중재라도 하는 것처럼 황제와 해진의 사이에 섰다. 그 행동에 약간 움찔한 기사들은 그래도 황제의 명이 절대적이란 것을 잊지 않고 여전히 무기를 세우고 있었다. 귀족들은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창백한 안색으로 황제와 공작을 번갈아 보았다. 평소에도 서로 살벌한 말만 주고받으며 귀족들의 피를 말리더니 이번에는 웬 낯선 남자 하나까지 사이에 둔 채 대치하고 있다.
“감히 내 앞을 막아서는 것이냐.”
황제가 으르렁거리듯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 경고성 짙은 말에 해진을 등지고 선 금발의 공작도 장난기를 지우고 나름 진지한 투로 맞섰다. 그래도 상황에 비해 가볍기는 매한가지였다.
“저의 것이 흉측하고 위험한 쇠붙이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저도 모르게 나서 버렸지 뭡니까.”
“뭐가 너의 것이라는 거냐.”
“물론…….”
잠시 말을 멈춘 공작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어느새 뒤로 슬금슬금 빠지고 있던 해진의 어깨를 덥석 잡아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겼다. 귀찮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는 해진을 보면서도 빙글빙글 웃는 낯을 한 공작은 억센 힘으로 그를 잡아 두고 황제를 쳐다봤다.
“이 청년 말입니다. 제가 침 발라 놨거든요.”
이제 내 것입니다, 라고 덧붙인 그에게, 황제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치더니 불쑥 다가와서는 해진의 허리를 팔로 감아 꽉 옭아맸다. 졸지에 커다란 남자들 사이에 갇힌 꼴이 된 해진은 더욱 미간을 구겼다. 시발. 내가 토스트 사이에 낑긴 소시지냐.
“헛소리를 하는군. 이건 내 침대에서 발견했다. 네가 아니라 내 것이야.”
“……침대?”
끼기긱. 공작의 얼굴이 해진을 향한다. 여전히 속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묘하게 굳어진 표정에서 그의 시커먼 본성이 느껴지는 듯했다. 가증스럽게 고개를 갸우뚱한 그는 웃고 있음에도 살벌한 기색으로 해진에게 말했다.
“다른 남자의 침대에 올라가다니, 따끔하게 벌을 줘야겠네요.”
“그냥 네가 꺼지면 된다.”
“호오? 폐하, 자꾸 그러시면 저 확 귀족파로 가 버립니다?”
“귀족파 놈들 단체로 투신자살할 말은 자제하지 그래.”
“지금 저 무시합니까?”
둘이 과연 주종관계가 맞는 건지, 서로를 물어뜯는 말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귀족파? 그럼 저 변태가 지금은 황제파라는 건가. 저렇게 물고 뜯고 하는 관계에? 아, 이도저도 아닌 중립일 수도 있겠군. 뭐…… 나랑은 상관없지. 해진은 으르렁거리며 짖어 대는 두 인간에게 보이도록 무언가를 쥔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야.”
그 시건방진 부름에 기사와 귀족들이 기겁을 하든 말든, 오히려 태연한 당사자인 황제와 공작의 고개가 해진에게 향했다. 왼손에는 묵직하게 차 있는 돈주머니, 오른손에는 황제의 허리춤에 장식되어 있던 커다란 보석.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물건들이 난데없이 나타나자 둘의 시선이 한동안 해진의 손 위에 머물렀다. 순순히 자신에게 향한 시선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해진은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잘 쓸게.”
니들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고 해라. 난 내 갈 길 갈 테니. 이건 위자료라 생각하고. 남자가 좋은 거면 지들끼리 붙어먹음 딱이겠고만 왜 날 사이에 끼우고 그런다냐, 귀찮게. 단체로 약이라도 빨았나. 두 남자의 표정이 오묘해지는 것에 관심도 없는 해진은 미련 없이 성 밖으로 이동했다. 뒤에 남겨진 자들이 어떤 난리를 치든, 그것 역시 관심 밖의 일이었다.

* * *

“음. 좋군.”
수도의 후미진 골목엔 갑자기 나타난 해진을 보고 놀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런 골목을 보니 원래 살던 세계랑 별다른 점을 못 느끼겠다고 생각한 해진은 두 손에 들린 묵직한 무게감을 자랑하는 것들을 살펴봤다. 공작에게서 낚아 온 주머니엔 역시나 이곳의 화폐인 듯한 금화들이 들어차 있었고 황제의 허리 장식에서 빼 온 영롱한 붉은 보석은 척 봐도 나 최고급이요― 하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보석은 섣불리 환전했다가 역으로 추적당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음을 잘 알고 있는 해진은 보석을 품에 잘 넣었다. 당장은 돈주머니가 있으니 괜찮을 거다. 그럼 이제 뭘 한다. 당장 지낼 곳이 급하니 숙소나 잡아 볼까. 음. 그게 우선인 것 같다. 생각했으니 곧장 실행에 옮겨야지.
해진은 조용한 골목에서 나와 사람들이 꽤나 지나다니는 거리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침대와 달 그림이 그려진 건물로 들어갔다. 골목을 나와 보니 역시 지구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관광은 뒤로 미루고, 우선 자리 좀 잡아 놓고 여유롭게 둘러볼 생각이었다. 잠깐 훑어본 것임에도 꽤나 마음에 드는 풍경에 해진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해진은 돈을 좀 모으면 배낭여행이나 해 볼까, 속으로 계획을 짜며 그럭저럭 깨끗한 여관의 카운터로 가서 금화를 하나 건넸다.
“하루 숙박이요.”
“예예. 여기 7실버입니다~”
금화를 하나 냈더니 은화 일곱 개를 거슬러 준다. 그럼 아마 10실버가 1골드이고 숙박은 하루에 3실버인가. 설마 애매하게 1골드에 20실버. 그런 건 아니겠지? 뭐, 그러면 그런 거고……. 그는 은화를 대충 주머니에 던져 넣고 급사가 안내해 주는 2층으로 올라갔다.
복층 형식의 넓은 여관은 1층을 식당, 2층을 숙소로 운영하고 있는 듯했다. 해진은 배정받은 방을 둘러보며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잠깐 고민했다. 어릴 적 겉핥기로 봤던 한 판타지 소설에서는 다른 세계로 날아간 소년이 대륙 최고의 검객이 되어 어쩌고저쩌고 했지만 해진으로선 그런 귀찮은 일은 질색이었다. 일단 여기저기 다니면서 이 세계에 대해 파악하고 이왕이면 쓸 만한 일거리도 구해 볼 생각이었다. 장기적인 계획으로는 돈을 모아서 늙기 전에 방방곡곡 여행도 해 보고, 그러다가 끌리는 나라나 마을을 만나면 그곳에 정착해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좋아. 완벽한 인생 설계다. 조금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단정한 얼굴에 만족스런 웃음이 떠올랐다. 그전에 일단, 뭘 하든 간에 건강한 몸을 위해 잘 먹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해진은 푸에르가 준 바구니를 정리하기로 했다. 잘 분리해서 보관할 건 여관 주인에게 부탁을…….
“…….”
아, 젠장. 내 바구니. 빈손으로 허망하게 선 해진은 자신이 언제 그 소중한 바구니를 놓아 버렸나 기억을 되살렸다. 계속 잘 잡고 있었으니 아마도, 그 두 놈의 물건을 슬쩍할 때 잠깐 내려 둔다는 게 그대로 두고 온 모양이다. 해진은 쯧 혀를 차고 회의장에 덩그러니 버려졌을 바구니를 떠올렸다. 흐음, 방심하다 먹튀 당한 그 녀석들이 바구니를 고이 놔두진 않았을 테고. 내다 버렸든 시종에게 시켜 갖다 치워 놓으라고 했든 간에 빠르게 가서 보고 오는 건 괜찮겠지. 설마 범인은 반드시 돌아온다, 라며 바구니 둘러싼 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겠어. 혹시 진짜 그러고 있어도 상관없고 뭐.
망설임은 잠깐이었다. 굉장히 편리하고 유용한 능력이 있는데 뭘 고민하랴. 해진은 망설임 없이 바구니가 있을 곳으로 이동했다. 몇 번 써 봤더니 그새 익숙해져서 처음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한 그가 느낀 것은, 이 세계 녀석들이 의외로 뻔한 행동을 한다는 것 정도였다.
“역시, 나타났다!”
“어서 주문을 시전해!”
“…….”
자꾸 이렇게 공간이동 할 때마다 고막을 찢어 버릴 듯 시끄럽게 굴면 트라우마라도 생길 것 같잖아. 아니 그전에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예측한 대로 행동하지 말라고…….
느릿하게 고개를 숙인 해진의 눈에 원래의 모습 그대로인 바구니가 보였다. 바구니가 있는 것을 보면 제대로 이동한 것 같은데 아까와는 장소가 달랐다. 그리고 해진을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리며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으면서도 다짜고짜 칼은 안 날아 오는구나― 하며, 태평하게 생각한 그는 말없이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여전히 윤기가 줄줄 흐르는 게 ‘어서 날 먹어 줘요!’하고 보채는 것 같았다. 소중한 식량들 같으니라고.
“자, 어떤가. 죄인이여! 마력을 차단하는 마법진에 꼼짝없이 갇혔으니, 넌 더 이상 약삭빠르게 도망갈 수 없다!”
“엉?”
마력? 그게 뭐 어쨌다고. 해진은 자신을 둘러싸듯 서 있는 사람들을 느리게 훑어봤다. 어째 다들 자신감이 넘치는 당당한 얼굴이었는데 그중엔 넌 이제 끝이다, 하는 좀 험악한 표정들도 있었다. 황제랑 공작 좀 때리고 주머니 좀 털었다고 완전 공공의 적이 됐다. 보아 하니 왕권이 하늘을 찌르는 모양이었다. 해진이 한 짓 정도면 사형감이라 해도 당연한 결과일 테지만 해진은 그저 억울했다. 글쎄, 난 정당방위라니까 그러네? 힘없는 소시민이라고 이렇게 무시하면 되나.
“정말이지, 잡기 힘든 야생마군 그래.”
“야생마가 뭡니까. 들고양이처럼 귀여운 애칭도 있는데.”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두 남자가 해진이 들으라는 듯이 대놓고 중얼거렸다. 정작 본인들은 저리도 태연한데 주위에서 더 난리다.
“폐하, 죄인은 이제 꿈쩍할 수 없으니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수고했다.”
자신감에 찬 얼굴로 고한 남자에게 짤막한 치하를 한 황제는 먹잇감을 코앞에 둔 사자처럼 느긋한 걸음으로 해진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해진은 입을 달싹였다. 아니 그러니까,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던 건데…….
“……지랄하네.”
순식간에 바뀐 해진의 시야에는 아까 잡아 놓은 여관방이 보였다. 손을 들어 보니 바구니도 무사했다. 그는 테이블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벽 쪽에 세워져 있는 전신 거울을 들여다봤다. 남자치고 좀 하얘서 맘에 안 드는 피부에 약하게 갈색 빛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이랑 눈동자. 아무리 뜯어봐도 원래의 얼굴에서 변한 게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변태가, 그것도 남자가 붙어서는 더듬는 거지? 이 세계의 미적 기준에선 이게 만만한 인상인가. 하지만 거울을 통해 보이는 해진의 눈은 길게 찢어진 것도 모자라 슬쩍 치켜 올라가 있어서 맘먹고 인상 쓰면 성격이 좀 더러워 보이기도 했다. 황성이랑 밖의 거리에 멀쩡하게 돌아다니던 여자들을 보면 원래의 세계랑 별다를 것도 없으니 해진이 여자로 보이는 것도 아닐 것이다.
“……흠.”
그러고 보니 아까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계속 못 움직인다느니, 도망갈 수 없다느니 헛소리를 했었다. 아무래도 이 세계 애들 좀 이상한 것 같다.


02 사람 주워 봤어요?

일단 하룻밤을 푹 쉰 해진은 여관 주인에게 은화 세 개를 건네며 하루 더 숙박할 거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거리를 둘러보며 이 세계에 대한 정보라도 모아 볼 생각이었다. 돈주머니엔 숙박비를 계산하고 남은 은화 4개와 금화 17개가 들어 있다. 이곳의 화폐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한국에선 여관 숙박비가 3만 원 정도니까 1실버를 만 원이라고 치면 10실버 즉 1골드는 10만 원 정도일 것이다. 그럼 이 주머니엔 원래 180만 원이 들어 있었다는 것인데…….
“백팔십이라…….”
빡세게 알바 뛰어서 받는 한 달 월급이랑 비슷하네? 물론 계산이 확실한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오차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숙박비로 계산한 거니 대강 맞을 거고, 아마 180골드면 최소 백오십은 넘는 가치일 거다. 별 기대 안 했는데 상당한 액수가 들어 있다는 걸 확인한 해진은 품에 넣어 둔 보석의 값어치도 예상보다 훨씬 높은 건 아닐까 생각하며 일단 걸음을 옮겼다.
이래서 도둑들이 있는 거구나. 뼈 빠지게 일하지 않아도 남의 물건 슬쩍하면 돈이 데굴데굴 굴러 들어오잖아. 물론 민증에 빨간 줄 그을 각오가 있어야겠지만……. 음, 이곳에서 절도죄는 어떻게 처벌하려나. 막 살벌하게 손목이라도 자르는 건 아니겠지?
“…….”
어쨌든 공작이라면 돈이 넘쳐 나는 부자일 테니까 이 정도는 성추행 위자료로 써도 된다며 혼자서 판단한 해진은 미약한 양심의 찔림도 떨쳐 버렸다. 게다가 아무런 경계심 없이 주머니에 덜렁덜렁 들고 다니기까지 했으니 돈주머니를 잃었다고 통곡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차원이동한 김에 얼굴에 철판이나 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