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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님의 로맨스


1화



chapter 01


‘이놈의 연기가 왜 나한테만 오고 지랄이야…….’
이제 하다하다 고기 연기까지 자신을 무시하는 기분에 재경은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분명한 건 오늘 주최된 이 회식 자리의 주인공은 바로 ‘세련되면서도 편안한 옷을 만들자’라는 주제로 열린 ‘Travel Fashion’ 사내 마케팅 공모전 대상을 받으며 얻게 된 정규직으로, 수당도 받지 않고 야근을 자처하며 뼈 빠지게 일해 3년 만에 대리로 승진한 자신이었다.
하지만 동료들의 관심은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를 끝으로 언제나 그랬듯 시훈의 차지가 되었고 재경은 구석에 앉아 병풍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아휴, 눈 따가워!’
신경질이 묻어난 손부채질이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드는 연기를 피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도 재경은 멈추지 않았다.
매연 속에서 고통 받는 자신을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신경 써 주길 바랐지만 동료들의 과한 애정은 오롯이 시훈에게 쏠려 있었다.
그것은 흡사 빛을 쫓아다니는 모기와 달콤한 사탕에 모여드는 개미 떼 같은,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다는 당연한 원칙과도 같은 현상이었다.
‘강시훈, 강시훈! 저놈의 강시훈!’
후배가 보다 먼저 승진해 이제야 같은 직급이 된 것이 가뜩이나 눈에 거슬리는데, 더없이 특별한 오늘 같은 날마저 관심을 뺏기니 그야말로 원수도 저런 원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몇 개월 전, 이곳에서 시훈 또한 승진 축하 회식을 했었다. 그날 시훈은 주인공답게 선물까지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일만큼은 발생하지 않길 바랐던 재경이었기에 지금 이 상황은 매우 서럽고 또 억울했다.
매일 그런 관심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딱, 오늘 하루뿐인데…….
“시훈 씨! 저번 주 금요일에 동창회 있다고 그러지 않았어?”
“아, 네.”
“갔다 온 거야?”
“네, 뭐…….”
“시훈 씨, 고등학교 공학 나왔다고 그랬지? 그럼 혹시 첫사랑이랑 다시 재회한 거 아니야? 고등학교 때 풋풋한 첫사랑 같은 거 꼭 있잖아.”
“아니요. 그런 거 없었는데요. 전혀.”
입술 끝을 슬쩍 들어 올리고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 시훈의 모습에 여직원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탄성까지 내뱉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재경의 눈엔 기생오라비 같은 외모에 상대방을 같잖게 여기는 비소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뭐가 저리도 좋아 환장을 하는지……. 도통 풀려고 해도 풀어지지 않는 고난도의 문제였다.
“아휴, 우리 시훈 씨 여자 만나면 여기 좌절할 여직원들 엄청 많은 거 알지?”
‘좌절하게 될 엄청 많은 여자들 중 부디 나, 김재경은 빼 주시길!’
재경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그 말을 속으로 연신 외쳤다. 모두가 ‘Yes’라 할 때, 혼자 ‘No’를 외칠 만한 용기가 아직 그녀에겐 없었다.
재경은 외침 대신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어머, 겸손도 하다.”
“그러게. 이런 스펙과 훌륭한 외모를 두고 겸손하기가 쉽지 않은데. 아무튼 시훈 씨는 미워하려고 해도, 미워할 수가 없는 존재라니까.”
‘웃기고들 있다……. 저 무미건조한 표정이랑 무성의한 말투가 겸손에서 나오는 거라고? 단체로 맛탱이가 갔나?’
재경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는 앞에 놓여 있는 고기를 의미 없이 뒤집었다.
“어? 고기 탄다.”
그때 시훈이 집게를 들어 제 앞에 놓인 고기들을 뒤집었다.
저거 지금 뒤집으면 맛없을 텐데.
“어머! 정말, 시훈 씨 말대로 고기가 타고 있네!”
“얼른 먹자! 시훈 씨, 지금까지 고기 굽느라 많이 못 먹었지?”
“이제 집게 이리 줘. 내가 또 고기는 기똥차게 잘 구워!”
시훈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에 사람들은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괜찮은데…….”
“나도 괜찮아!”
“그래, 시훈 씨. 원희 씨 보고 구우라고 하고 시훈 씨는 나랑 한잔해.”
옆에 앉아 있는 팀장이 술병을 들자 재경도 바짝 군기 든 자세로 슬그머니 빈 잔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팀장은 야속하게도 시훈의 잔만 채워 주고는 재경에게서 등을 돌렸다.
머쓱해진 재경은 아무도 모르게 쓴웃음을 내뱉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시훈 씨, 안 피곤해?”
“괜찮습니다.”
“젊어서 그런가 체력도 좋아. 아니, 근데 이렇게 바쁜 와중에 몸은 대체 어떻게 관리하는 거야?”
팀장이 시훈의 팔을 허락도 없이 주무르며 감탄했다.
“어디요? 저도 만져 봐도 돼요?”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여사원들이 아직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은 시훈의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머, 진짜 완전 단단하다.”
모두들 입만 열면 시훈을 칭찬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누가누가 더 칭찬을 잘하나 대결이라도 펼치는 것처럼, 폭설과 장마가 쏟아지는 것처럼 과했다.
신입 시절, 혼나는 일이 많았던 재경은 칭찬 한마디에 목말라 있던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쓰라린 가슴으로 또 한 잔의 술을 쭉 들이켰다.
‘쓰다, 써!’
그녀는 입안에 감도는 쓴 알코올에 미간을 찌푸리며 젓가락을 들었다.
“…….”
먹을 수도 없을 만큼 말라비틀어진 고기 몇 조각이 볼품없이 불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고기가 어째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경은 입맛을 다시며 시훈의 앞에서 맛있게 구워지고 있는 고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부사장님도 시훈 씨를 참 좋아하는 것 같아. 부사장님하고 많이 친하지?”
“아니요. 안 친합니다.”
“그래? 결재 받으러 갈 때마다 부사장님이 시훈 씨에 대해 많이 물어보던데. 어떻게 하면 부사장님한테 예쁨 받을 수 있는지 비결 좀 가르쳐 줘.”
“글쎄요.”
시훈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팀장이 얼굴을 익살스럽게 찌푸렸다.
“욕심쟁이!”
“팀장님은 아직도 그걸 모르세요? 눈 정화죠. 부사장님도 눈 정화가 되니까, 시훈 씨를 예뻐라 하시는 거예요.”
“그런가? 하하하! 그럼 내가 부사장님한테 예쁨 받는 건 평생 꿈도 못 꿀 건가?”
팀장의 호탕한 웃음을 안주 삼아 재경은 스스로 채운 술을 또다시 쭉 들이켰다.
남자건 여자건 직책을 불문하고 모두 시훈을 보기만 해도 ‘눈 정화’가 된다고 떠들어 댔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말에 재경이 처음부터 공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 역시 2년 전에 입사한 시훈을 처음 봤을 때 혼이 빠진 채 ‘와……’ 하며 탄성을 내뱉었으니 말이다.
훤칠한 외모와 185cm의 끝내주는 비율, 다부진 잔 근육이 배어 있는 몸매, 그리고 중저음의 바리톤 음색을 가지고 있는 남자.
그는 여자라는 성(性)을 지니고 있다면 누구든지 사랑에 빠져 버리게 할 남자였다.
시훈이 다른 남자들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우월한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유난히 특출 난 업무 능력이었는데, 남들은 일주일 꼬박 밤을 새워도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그는 3일 만에 완벽하게 해내곤 했다.
그 덕에 남들은 입사한 지 1년이 넘어서 다는 주임을 그는 입사 3개월 만에 달고, 3년이 걸리는 대리를 1년 만에 다는 기적을 보여 주었다.
그러다 보니 시훈의 바로 윗선배인 재경은 언제나 그와 비교가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막내인 그가 하던 일을 다시 자신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재경 씨, 이거 아직도 몰라? 시훈 씨는 벌써 다 알고 있던데…….”
“재경 씨 PPT는 매번 왜 이래? 시훈 씨 거랑 너무 비교돼! 모르면 좀 물어보고, 못하겠으면 노력이라도 해 봐!”
“시훈 씨는 지금 이 일 해야 되니까 커피는 재경 씨가 타 오도록 해요.”


그래, 후배가 바쁘다면 성과가 없기에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선배가 잡일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재경이 열이 받은 이유는 선배들이 시키는 심부름이나 정수기 물통을 가는 것, 커피, 청소, 복사 등등의 일을 할 때에 그는 막내로서 도와주기는커녕 자신을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잡다한 일은 당연히 재경의 몫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어디 그것뿐이랴?
모지란 자격지심일 수도 있겠지만 회의 때마다 묘하게 자신의 아이디어에만 태클을 걸고넘어지는 시훈이었다.

“그것보다 이렇게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출시하기엔 어렵지 않나요? 상품 가격을 낮춰서 10대나 대학생들을 고객으로 맞이하자는 이번 프로젝트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단 소비자가격에 비해서 원가가 너무 높아요. 그 부분까지 감안을 하셨어야죠.”


그는 재경의 아이디어가 괜찮다고 호응했던 부장과 팀장의 입에서 기어코 ‘그렇지, 역시 시훈 씨 의견이 낫다!’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
그래, 거기까지도 백번 양보해서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실력이나 능력도 안 되면서 남을 시기, 질투하는 모자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말 참을 수 없는 게 딱 하나 있었다. 그건 시훈이 말끝마다 붙이는 ‘재경 씨’라는 호칭이었다.
엄연히 먼저 입사한 선배이고 ‘주임’이라는 직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경 씨라니, 재경 씨라니!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재경은 술을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회식이니 자신이 돈을 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고, 내일은 주말이라 출근할 걱정도 없으니 마음껏 마셔서 확 취해 버리리라!
재경은 마지막 잔을 비우고 종업원을 불러 소주를 추가 주문했다.
“재경 씨,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소주병 뒤를 팔꿈치로 톡톡 치고 있는 재경의 모습이 생소했는지 앞에 앉아 있는 최 과장이 물었다.
“괜찮아요. 저 아직 안 취했어요.”
“적당히 마셔.”
“네.”
재경에게 잠깐 닿았던 관심은 이내 다시 시훈에게로 향했다.
어린 시절부터 소심하고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탓에, 재경은 언제나 조용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우연히 만난 동창에게 자신이 같은 학교를 나왔다고 하면 백이면 백, ‘네가 그 학교 출신이라고?’ 하며 의아해할 정도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지 않는 일은 매우 익숙했지만 그 익숙함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었다.
재경은 투명한 소주잔에 달콤하지 않은 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여전히 자신에겐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수다를 안주 삼아 시원하게 그것을 들이켰다.

“아휴, 재경 씨는 무슨 술을 이렇게나 많이 마신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끝이 없는 톱니바퀴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던 재경이 비틀거리는 몸으로 위태롭게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알코올이라는 나락에 빠져 자꾸만 주저앉으려는 그녀를 간신히 부축하던 여직원은 멀리서 담배를 피우며 이쪽은 등한시하고 있는 남직원들을 신경질적으로 노려보았다.
“다들 그러고만 있지 말고 빨리 택시 좀 잡아 줘! 김재경 씨 많이 취했단 말이야! 진짜, 인간들이! 아휴! 힘들어 죽겠……!”
여직원은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술을 이기지 못한 재경이 결국 바닥에 나자빠졌나 싶어 아래를 살펴보는데, 언제 저기까지 갔는지 멀찍이서 재경을 택시에 조심스럽게 태우고 있는 시훈의 뒷모습이 보였다.
시훈은 이 사람, 저 사람한테서 술을 꽤 많이 받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말짱해 보일 정도로.
“시훈 씨…….”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재경을 택시에 태운 시훈이 뒷좌석 문을 닫으며 인사를 건네자, 여직원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머, 시훈 씨! 지금 들어가게요?”
“네.”
“우리 2차로 사거리에 있는 바(Bar)에 가기로 했는데, 시훈 씨가 그때 거기 분위기 좋다고 했잖아요.”
“좀 많이 취하신 것 같아서요.”
시훈이 널브러져 있는 재경을 눈빛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러자 직원들의 시선이 그제야 그녀에게로 향했다.
“어머, 주임님 왜 저렇게 취했대? 그럼 설마 김 주임님…… 아니, 김 대리님이랑 같이 가시는 거예요?”
“네. 같은 동네거든요. 데려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아…… 김 대리님도 청담동 쪽에 사셨구나. 전혀 몰랐네. 주희 씨는 알았어?”
“아니요. 저도 몰랐어요. 청담동에 사시는지…….”
주희를 비롯한 다른 여직원들이 서로 눈짓을 하며 얼굴을 쌜쭉거렸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는 여직원들을 뒤로하고 시훈은 택시 조수석에 냉큼 올라탔다. 창문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직원들의 과한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짜증도 났던 그는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는 재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