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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본능 9화

2. 진강우(9)





내뱉는 말마다 다 맞는 말이라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씁쓸히 미소 지었다. 맞아.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들은 건 나였지. 그는 언제나 유능하고 멋진 사람이었으니까. 누구보다도 강했던 진강우에게 유일한 상처를 남긴 사람이 바로 나였다.

“죄송해요. 제가 가족이 동생밖에 없어서 충격이 컸었나 봐요.”

다 핑계였다. 정확히는 내가 멋대로 과거를 틀어 버린 부분 때문에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던 동생이 아예 사망해 버려서 단순히 놀란 거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말해 봤자 그가 믿을 리는 없을 테고. 졸지에 희생양이 되어 버린 동생이 아주 약간은 불쌍했고,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긋지긋한 생활고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정말 쓰레기 같은 발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마음은 정말로 진심이었으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최대한 덤덤히 말하던 내게 진강우는 참으로 조심스러웠고 다정했다.

“가족이 동생뿐이었다니. 실례인 줄은 알지만, 혹시 부모님은 안 계신 건가요.”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그것도 동생 생일날에 함께 외식하러 나갔다가 일어난 교통사고로요.”

“……그랬군요.”

나는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부모라는 사람들이 죽었어도 별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어린 동생 하나를 혼자서 감수하고 돌봐야 한다는 사실이 그저 막막하고 힘들었다. 떠오르던 고통의 순간을 잊으려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 내게 진강우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심차연 씨와 동생분은 운이 좋았던…….”

“아뇨.”

“…….”

고개를 살짝 저었다. 운이 좋고 나쁘고 할 것도 없었다. 운이 좋았던 건…….

“저는 그 자리에 없었어요. 왜냐면 부모님이 저를 무척이나 싫어하셔서 저 혼자 집에 남아 있었거든요.”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도 목숨만은 부지한 동생만 운이 좋았던 것이다. 나는 애초에 외식을 나가는 그 차량에 탑승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침대에 앉아서 배 위쪽까지 덮은 이불만 바라보던 나는 느릿한 시선으로 진강우를 응시했다. 놀란 표정을 한 그의 모습이 시선 끝에 닿았다. 무뚝뚝해도 상냥한 그의 모습은 불안함에 떠는 내게 많은 위로를 주었다.

진강우는 당황스러워하며 시선을 내리깔기 바빴다. 이런 거로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데. 괜히 나 또한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제가 괜한 걸 물어봤네요. 주제넘게 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정말 괜찮아요. 전혀 기분 나쁘지도 않았고요. 동생 장례도 다 도와주셨는데, 궁금해하는 건 당연하죠. 오히려 제가 더 미안해요. 강우 씨를 당황스럽게 한 것 같아서…….”

나에게 진강우가 돌아갈 집이라는 건, 그가 유일하게 내 삶을 지켜 주었고 보살펴 줬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커서 그런지, 항상 애정이 고팠고 작은 친절함에도 구원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는 회귀 전 내게 진강우라는 인물을 잊고 평범하게 살라 했지만, 나에게 평범함은 늘 진강우라는 사람이 곁에 있는 생활 그 자체였다. 지금 나는 그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수 있었다. 그냥 내 옆에서 살아서 웃어 주기만 한다면. 숨을 쉬며 한 하늘 아래 함께하는 것만이라도 가능하다면.

지금의 심차연이라는 사람에겐 이것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다.



***



병원에서 갇혀 지낸 지도 어느덧 나흘이 훌쩍 지났다. 진강우는 여전히 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나는 이런 생활에 상당히 만족해하며 얼빠진 상태로 지냈다.

나는 회귀 전 파트너인 진강우와 동거를 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야 뒤늦게 깨달았다.

가령, 그가 매운 것을 생각보다 잘 먹는다는 부분과 더불어 귀 뒤쪽에는 붉은 점이 있다는 것 또한,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의 붉은 점은 어렸을 적 주사기를 가지고 놀다가 주삿바늘에 찔려서 생긴 흔적이라는 게 특이했다. 병원 놀이를 하고 싶었는데, 현실성이 부족한 듯해서 실제 주사기를 다루다가 그랬다는 사실이 너무 우습고 귀여웠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령.

“저도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지 꽤 오래되어서 누군가와 이 정도로 같이 생활한 건 저도 오랜만이네요.”

“아, 그랬구나. 몰랐어요.”

“모를 수밖에 없죠. 제가 따로 이야기하질 않았으니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죠.”

“그건 그렇네요.”

예전에 한 번쯤은 진강우의 부모님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긴 했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가 언뜻 말해 줬던 기억이다. 너무 짧게 말해 주고 넘어갔기에 금세 잊어버렸었는데, 그래도 나는 그가 부모님이 아닌 다른 가족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적어도 함께 지낼 가족은 있겠거니 했었는데 아니었구나. 이로써 그가 혼자서 지냈다는 사실은 이번에서야 제대로 듣게 된 셈이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까, 그도 여태껏 혼자서 많이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머물렀다. 마음 한구석이 뭉근하게 응어리가 진 것 같았다.

나는 열심히 물리 치료를 하고 난 뒤, 여전히 병실 침대에서만 생활했다. 지금도 적당히 병실 안을 배회하듯 반복적으로 돌아다니다가 침대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이런 내 곁에는 늘 진강우가 함께했고, 종종 쓸쓸하지 않게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건네면서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문뜩 원래부터 그가 이렇게 섬세했던 사람이었나 생각해 보았다. 우리 둘은 워낙 첫 만남을 비즈니스적인 관계로 시작해서 그런지 딱히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었다. 오늘 일과를 나누려고 하면, 누군가는 먼저 곯아떨어지곤 했으니까. 하루 동안 꼬박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피로감이 극심했으니 어쩔 수 없던 부분이었다.

평범한 연인으로 만났다면 피곤한 임무를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지금에 와서 이런 부분은 참으로 아쉬웠다.

회귀 후, 그에 대해서 경험하지 못했던 부분을 알게 되다 보니 가 아닌, <인간 진강우>와 더 친밀해진 기분이었다.

지금도 진강우는 큰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그의 취미가 독서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현재의 진강우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를 이질감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지금에서야 알 것 같았다.

‘에스퍼 때랑은 확실히 달라. 체구도 그렇고 여러 가지가 좀…….’

그의 몸은 근육도 많고 일반적인 사람보다는 덩치도 있는 편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단단함은 부족해 보였다. 이것 또한 에스퍼로 발현하기 전이라서 그런가 싶은 추측만이 머물 뿐이었다. 게다가 얼굴 또한 에스퍼로 활동했을 때와는 다르게 선이 부드럽고 각진 곳 없이 매끄러웠다. 내가 알던 이목구비보단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전체적으로 흐릿한 외형이 재미있어서 괜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혹여라도 그가 들을세라 고개를 푹 묻고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누가 그랬던가. 눈치 빠른 사람 앞에선 그 어떠한 행동을 해도 단박에 들통날 거라고.

“특별히 심차연 씨가 웃는 얼굴이 예쁘니까 봐주는 겁니다.”

“네?!”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니, 그는 딱딱한 커버로 된 책을 덮고 회귀 전보다 상대적으로 순한 인상을 내보이며 말했다.

“앞으로 웃으려면 손으로 가리지 말고 웃으시는 건 어때요? 그편이 덜 기분 나쁘기도 하고 훨씬 마음에 드는데.”

“아…… 혹시 기분 나빴어요? 미안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마음에도 없는 사과였다. 퉁명스럽지만 나에게는 좋은 말만 해 주던 그에 대한 일종의 배려일 뿐이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하시면, 종종 보이는 슬픈 표정 좀 그만 짓든가. 요즘 부쩍 생각도 많아 보이던데 그러다가 금방 지쳐서 번아웃 와요. 조심하세요.”

“네…….”

정말 예나 지금이나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아, 이건 정말이지 성격이구나, 성격이야,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날카로운 그의 지적에 내 양심은 아플 정도로 쿡쿡 찔렸다.

꽉 메는 목을 적당히 가다듬고 뻘쭘한 상황을 가급적이나마 피해 보려고 노력했다. 시간을 보아하니 때마침 뉴스 외에도 여러 가지 정보 프로그램이 방영될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넋을 놓으며 가만히 있기보단 다른 목소리가 들리면 잡생각 정도는 지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텔레비전이라도 볼래요?”

진강우가 알겠다고 고개 좀 끄덕여 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그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굳이 봐야 해요? 요즘 세상에 흉흉해서 봐도 건강에 좋진 않을 텐데. 그리고 최근에 이슈가 그다지…… 아니, 뭐 혹시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라도 있어요?”

“아…….”

민망함에 두 볼이 터질 듯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딱히 보고 싶은 채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에게 정적이 흐르는 난감한 상황을 피해 가려고 수 쓰고 있던 행동을 들킨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 방금 뭐 말하려다가 그만둔 거 아닌가.

내가 멋쩍게 웃으며 실없는 웃음을 흘리자 진강우가 내 손에 들린 검은색 리모컨을 가볍게 뺏어 들며 되물었다.

“그래서 뭐가 보고 싶어요?”

“그, 그게…… 뉴, 뉴스?”

하, 진짜. 뉴스는 무슨. 나는 회귀 전에도 뉴스는 곧 죽어도 잘 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시간을 보아하니 그가 즐겨 보던 뉴스 프로그램이 방영할 시간이라는 걸 떠올리곤,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뇌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내뱉은 것이었으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미소를 유지한 채로, 입매 끝에 간신히 힘을 주었다. 아아, 하지만 안 하던 짓을 해서 그런지 결국 쥐가 난 듯했다. 안면에 경련이 일듯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렸고, 이 때문에 속도 울렁거리고 불편했다.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걸까.

“경제나 정치 같은 건 꼭 안 볼 것같이 생겼는데 그건 또 아닌가 보네요.”

“아, 네. 저 생각보다 사회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아요. 아마도…….”

사실 관심은커녕 회귀 전부터도 아무것도 몰라서 파트너였던 진강우에게 구박 아닌 구박을 받았더랬다. 싫어도 정부에서 주는 급여를 받고 일하는 가이드라면 세상 돌아가는 실정은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그 말에 틀린 점은 없었으니, 입을 대번 내놓고 억지로라도 그의 품에 안겨서 텔레비전을 시청했었다. 그가…… 진강우가 이런 나를 바라보며 눈치도 보고 미안해했었는데.

‘심차연. 그렇게 보기 싫어? 표정이 아주 죽을상이네.’

응, 엄청 싫었어. 당신이 보라고 떠밀었으니까 미움받기 싫어서 봤을 뿐이라고.

‘조금 있으면 끝나. 어제 우리가 해결한 임무에 대한 칭찬 보도니까 봐 두면서 자신감이라도 키워 놓는 게 좋을 거야. 나도 네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고, 그러니까 정말 잘했어. 심차연.’

달콤한 말을 건넨 그가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내가 슬며시 상처 난 진강우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니,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된 파동이 느껴졌다. 당신도 행복하구나. 나 또한 마찬가지야.

‘싫어하는 장면이 나오면 눈이라도 손으로 가려 줄게. 네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줄 테니까, 기분 풀어. 응?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