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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 3화





“일이 잘된다는 말은 들었어요. 바쁜 건 좋은 일이죠.”

“…….”

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못 한 척하는 걸까? 이쯤 되니 준서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바쁘고 피곤한 남자, 게다가 나이까지 많은 남자와 살게 되면 너도 덩달아 금방 지칠 거야. 조금 더 커서 네 또래 남자와 결혼해 맞춰 사는 게 어때?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가며 민아를 설득해 보려 애썼다. 나쁜데 나쁘지 않게, 음란한데 대놓고 음란해 보이지 않게.

하지만 다음에 나온 민아의 말이 그야말로 준서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준서 씨 혹시 성기능에 문제 있어요?”

“야!”

뭐, 뭐라고? 성기능에 문제가 있냐고?

얘 진짜 뭐지? 자신도 모르게 또 한 번 큰 소리를 낸 준서가 얼굴에 꽂힌 주변인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벌렁거리는 심장을 문질렀다. 채민아의 말이 가히 충격적이긴 했는지 한껏 빨라진 심장 박동 수는 정상으로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벌써 그런 고민을 하다니. 친척 언니가 비뇨기과 전문의여서 그런 이야기 많이 해 줬어요. 요즘 스트레스받는 젊은 남자들이…….”

준서가 뭘 하건 간에 제 할 말을 다 하던 채민아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민망한가? 그러기엔 너무 거리낌 없이 모든 걸 다 말하는 애니까 긴장감을 늦춰선 안 돼.

경계심을 바짝 세운 준서를 두고 민아는 아예 입술을 입 안에 바짝 말아 넣었다. 동시에 준서의 속도 바싹 타들어 갔다.

여자 비뇨기과 전문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지만 그 흔하지 않은 케이스에 채민아의 친척 언니가 포함될 줄은 몰랐다.

하긴, 얘를 만난 이후 뭐 하나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게 있겠냐만.

하지만 체념하긴 일렀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아직 해 본 적은 없지만 나는 섹스를 좋아할 것 같지 않거든요. 남들 다 보는 야동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평생 해 본 적 없는 걸 보면, 성욕이 있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나는 다 이해해요.”

“…….”

채민아는 이미 더 포기할 것도 없을 만큼 포기해 버린 그의 마음을 가뿐하게 밟고서 황당한 발언을 해 댔고, 준서는 벌어진 입 사이로 허탈한 바람 소리를 꺼내 놓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그는 결국 그녀의 말에 반박을 시작했다.

“힘없는 몸뚱이라고 했지, 성기능에 문제 있다고는 안 했어. 나 여전히 성욕은 엄청 왕성하고 아무 문제 없거든? 거봐. 너는 성욕이 없고, 나는 왕성하고. 우린 안 맞아.”

말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떻게든 채민아를 이겨 보겠다는 마음이 앞서 자신이 얼마나 유치한 소리를 지껄였는지.

“…….”

안 되겠다. 여기서 죽자.

준서는 할 수만 있다면 죽어 버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위아래 어금니 사이에 혀를 밀어 넣었다. 쪽팔리고 부끄럽고, 자신의 존재부터가 잘못되었다는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나선 안 될 일이었다. 이대로 채민아에게 넘어갔다간 정말로 결혼을 해야만 하는데, 그거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한 줄기 이성의 끈을 붙잡고 마음을 가다듬은 준서는 힘겹게 마지막 설득을 펼치려 했다.

“나랑 결혼해서 덕 볼 것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원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결혼을 하려고 하지? 네가 잃을 게 더 많아. 너 결혼이 쉬운 줄 아나 본데, 결혼은 집안과 집안이 만나서…….”

“준서 씨가 생각하는 결혼의 필수 조건은 뭔데요?”

온 힘을 쥐어짜 가며 차분하게 이어 가는 준서의 말을 민아가 또 딱 잘라 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에 받게 된 질문은 그가 곧바로 대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는 점이었다.

“사랑.”

준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친구들이 고리타분하다, 여전히 현실감이 없다 놀려도 준서에게 있어 결혼은 사랑의 결과물이었다. 사실 자신이 지금 민아의 앞에서 삽질을 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할 자신이 없어서.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받는 걸 원하지 않아서.

대답을 하면서도 민아의 비웃음을 살 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민아는 웃지 않았다.

“나도 같아요.”

도리어 그의 의견을 두둔했다.

“그럼 왜 나와 결혼하겠다고 하지? 너도 사랑이 전제 조건인 결혼을 원한다면, 나는 아니잖아.”

“왜 그렇게 생각하죠?”

“네가 날 언제 봤다고. 기껏해야 사진으로 봤을 테고, 그리고 오늘 본 게 처음일 텐데.”

다그치는 준서의 말에 눈을 깜빡이던 민아가 스르르 시선을 내리고 생각에 잠겼다. 길고 검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던 그때, 그녀가 말했다.

“……첫눈에 반한 걸로 해 두죠.”

짧은 침묵 끝에 나온 말에 준서의 눈이 커졌다. 어쩐지, 그녀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져서였다.

준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채민아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장난을 치거나 거짓을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예상하지 못한 말들로 사람을 당황하게 했을 뿐.

“정준서 씨, 힘 빼지 마세요. 나는 토요일 날, 그 자리에 나갈 거예요.”

결국 채민아가 쐐기를 박았다. 준서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02





민아를 만난 다음 날, 준서는 평소보다 한 시간 더 일찍 출근해서 일에 집중해 보려 노력했다. 그나마 열심히 일이라도 하면 생각을 거듭해도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이 깨끗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모든 건 실패로 돌아갔다. 출근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메모지 위에 ‘깽판, 섹스, 성기능, 비뇨기과,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들이 반복되어 적혀 있는 걸 발견한 준서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그러다 메모지를 벅벅 찢어 쓰레기통에 넣고는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과 차 키를 들고 일어났다.

“어디 가?”

준서가 사장직을 맡고 있는 <소운>의 초창기 멤버이자 준서의 대학 선배이기도 한 조중권이 모니터에 박고 있던 시선을 준서에게 옮겼다. 어젯밤 동창 모임이 있다더니 제대로 술독에 빠졌다 나온 걸까? 붉게 충혈된 두 눈과 거칠어진 중권의 얼굴이 준서의 눈에 들어왔다. 채민아 생각으로 밤을 꼴딱 새운 자신의 꼴도 별반 다르진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준서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한 번 더 봐야겠어.”

“누구? 그 여대생?”

피곤함이 짙게 드리워진 중권의 눈이 찰나 반짝 빛났다. 뭔가 더 묻고 싶어진 중권이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르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준서는 틈을 주지 않았다.

“다녀올게.”

중권에게 붙잡혀 봐야 어제 뻗친 망신살을 곱씹는 일 말고는 할 게 없다 여긴 준서가 휘리릭 회사를 빠져나왔다.

“야, 너 언제 와?”

등 뒤에서 중권이 불러 세웠으나 지금 일보다 더 급한 게 있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서야 민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4학년 2학기이니만큼 민아의 시간표는 널널했다. 월요일, 목요일에 각각 하나씩의 수업만 이수하면 졸업이 되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화요일이니 그녀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을 듯했다.

그나저나 의대 6년을 다닌 것도 아닌데 스물다섯 살에 졸업반이라니. 재수를 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2년이나 휴학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채민아라는 여자는 긴 휴학 기간을 어떻게 보낸 것일까? 얄팍한 호기심은 ‘여보세요?’라는 민아의 목소리에 곧바로 잊히고 말았다.

“어디야?”

― 토요일에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서 S백화점에 왔어요. 친구가 아기를 낳아서 출산 축하 선물도 살 겸.

다짜고짜 어디냐고 묻는 준서의 말에 민아가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녀의 성실한 대답이 되레 준서의 화를 돋웠다.

어제 분명히 말했다. 네 인생을 위해서 나를 피해 가라고.

물론 예측 불가인 민아의 대답에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르게 말이 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머리가 있는 사람이면 다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준서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민아는 막무가내였다. 그리고 조금도 굽히지 않은 자신의 뜻을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 상견례 때 입을 옷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왔다고 담담하게 대답해서 사람을 기막히게 만들었다.

“거기 있어. 내가 갈게.”

기어를 움직이는 손놀림은 거칠었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발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백화점에 도착한 준서가 민아에게 다시 전화를 하자 ‘7층에 있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층별 안내를 보니 유아용품 매장이 있는 층이었다.

준서는 친구 아기의 선물을 사려 한다는 민아의 말을 다시 곱씹었다. 요즘 스물다섯 살에 결혼하는 일이 어디 그렇게 흔한가? 속도위반을 하지 않고서야 결혼을 하기엔 확실히 빠른 나이였다. 주변에 그런 친구가 있으니 민아가 자신과의 결혼에 큰 거부감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또 기분이 상했다.

유유상종이라…….

어쨌거나 그는 그녀를 쉽게 찾아냈다. 7층을 쓱 도는 차에 민아가 보였는데, 그녀는 주르르 정렬된 카 시트 사이에서 직원의 설명을 듣는 중이었다.

누가 봐도 민아는 잘사는 집 딸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어제 봤던 원피스 차림과는 다르게 평범해 보이는 하얀 블라우스에 스키니한 청바지, 그리고 하얀 스니커즈를 신고 에코 백을 멘 수수한 차림을 하고 있는데도 존재감에서 유복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능구렁이 같은 백화점 점원은 그런 민아를 붙잡고 적극적으로 영업 전략을 펼치는 중이었다.

“이 모델이 괜찮은 편인데요, 살 때는 비싸다 느껴져도 여기 추가로 부착된 시트들을 하나씩 떼어 내 가며 아이 키가 120센티가 될 때까지 사용하실 수 있어요. 가죽도 좀 만져 보세요. 아주 최고급 사양입니다. 마침 딱 한 개 남았는데, 다시 주문하면 수입하는 데 두 달은 걸려요.”

당장이라도 이 카 시트를 사지 않으면 손해라는 영업 전략에 혀를 차면서도 준서 또한 목을 쭉 빼서 카 시트의 가격을 확인했다.

헐, 200만 원? 뭐야, 애가 차에서 타는 의자가 왜 저렇게 비싸?

당장은 민아를 부를 타이밍이 아니었기에 호기심에 이끌려 보게 된 가격표가 준서의 눈이 커지게 만들었다.

가격에 깜짝 놀란 준서와는 달리, 민아는 관심이 있다는 듯 카 시트를 쓰다듬어 보고 있었다. 꼼꼼하게 쿠션감을 확인하고, 점원에게 뭔가를 물어보기도 했다.

얼마나 친한 친구이기에 저렇게 비싼 선물을 생각하는 걸까?

제아무리 부잣집 딸이라지만 200만 원이라는 큰돈을 눈 한 번 깜짝 않고 마주하는 민아의 태도가 거슬렸다. 준서는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저렇게 씀씀이가 큰 애랑 어떻게 결혼을 해?

‘부잣집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산 인생이긴 했지만, 그의 부모님은 자식들이 돈을 헤프게 쓰며 사는 걸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준서도 스무 살 이후로는 용돈을 스스로 벌어 썼고 어지간한 일은 자신의 경제적 능력 안에서 해결하는 걸 당연시해 왔기에, 부모의 재력에 의지해 돈을 낭비하는 부류를 크게 달가워하지 않았다.

민아에 대한 반감이 점점 커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