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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가 앞에 놓인 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무심코 한 모금 머금었다 쓴맛에 놀랐다. 와인은 포도주스와 다르구나. 새삼스레 깨달은 사실에 감탄하다 이쪽을 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다정한 시선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어색해?”

화려한 조명과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클래식 음악. 절도 있게 실내를 오가는 웨이터들.

“처음, 이라서요.”

어린 시절 보았던 드라마 속에나 있을 법한 풍경이었다. 이런 공간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너무 부담 갖지 마.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했어도 결국엔 밥 먹는 곳일 뿐이니까.”

스테이크가 나왔다. 메뉴판을 앞에 두고 고민하던 나를 위해 그가 골라 준 메뉴였다. 웨이터가 떠나간 후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지만 망설여졌다. 돈가스처럼 먹으면 되는 걸까. 고민을 알아챈 건지 그가 먼저 시범을 보이듯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괜찮지?”

태어나 처음 먹어 본 스테이크는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맛있어요. 내 대답에 그가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식사 내내 그는 가볍고 유쾌한 화제들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말하는 것이 서툰 나는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고 가벼이 웃으며 그의 노력에 보답했다. 식사 후엔 예쁘게 장식된 아이스크림이 후식으로 나왔다. 그의 앞에는 커피 한 잔이 놓였다.

“디저트가 너무 달진 않아?”

“맛있어요.”

손바닥만 한 그릇에 담긴 아이스크림이 거의 사라져 갈 때쯤 남자가 물었다.

“궁금하진 않니? 내가 왜 널 여기 데려왔는지.”

궁금했지만 물을 마음은 없었다. 어쨌거나 그에겐 나를 이곳으로 데려올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내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묻지 않는구나.”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아냐, 내가 미안해. 꼭 투정 부리는 것처럼 굴었네. 그런 뜻은 아니었어. 네가 말수가 적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역시 이상한 사람.

많은 남자들을 상대했다. 사무적으로 몸을 섞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드물게 연인이 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남자들의 눈빛은 잘 알았다. 하지만 나를 보는 남자의 눈빛엔 좀 더 둥글고 따뜻한, 어딘가 애틋함마저 섞인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더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이겠지만.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보답을 하고 싶었어. 그런데 도무지 네 나이대의 여자애들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더라고. 왠지 넌 선물같이 형태가 남는 건 싫어할 것 같고 밥이 가장 무난할 것 같았어.”

몸을 주고 돈을 받는다. 그뿐이었는데 그는 무슨 도움을 받았다는 걸까.

“혼자 산다고 했지?”

“고양이가 한 마리 있어요.”

“고양이? 고양이도 길렀어?”

“일 년 정도 됐어요.”

“이름이 뭔데?”

“조루요.”

푸흑. 주위의 시선이 그와 내게로 꽂혔다. 커피를 뿜어낸 그의 얼굴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달아올랐다. 웨이터가 다가오자 그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 그…… 고양이 이름이…….”

“조루요.”

“그래, 그렇구나. 미안. 그게…… 그, 비뇨기과 쪽 질병하고 이름이 같아서 말이지.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분명 다른 의미가 있을 텐데.”

“그 뜻이 맞아요.”

“……하필 왜?”

잠시 고민했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정말로 말하는 것이 서툴렀다.

“예전에 알고 지냈던 손님의 부인이 키우던 고양이예요. 부부 사이가 별로 안 좋았는데 어느 날 고양이를 데려오더니 그렇게 불렀대요.”

“그 아저씨가 그거……여서?”

“네. 근데 얼마 안 가서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을 멈추자 그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언의 재촉에 다시금 말을 이었다.

작년 여름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시간에도 한낮의 열기가 남아 금세 땀이 났다. 공원을 가로질러 다른 남자와의 약속 장소로 가던 길에 바스락대는 소리를 들었다. 사용하는 이가 없는지 수풀이 우거진 벤치 뒤편으로 무엇인가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멈추어 서서 살펴보려는 순간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남자를 보았다. 평소엔 이목 때문에 나를 못 본 척했을 그가 반가운 얼굴을 하며 다가왔다.

‘그년이 암으로 죽었어. 너무 늦게 발견해서 손써 볼 틈도 없었어.’

더없이 개운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돈도 못 벌고 밤일도 못 하는 병신이라 그리 욕하더니 세상은 공평해. 덕분에 보험금도 타고 그 괭이 새끼까지 치워 버릴 수 있으니 아주 살맛이 나. 그년 살아 있는 동안 그 노란 눈깔을 파 버리고 싶어 어찌나 손이 근질거리던지.’

나도 모르게 발톱에 긁힌 자국으로 가득한 그의 손등과 팔목에 눈길이 갔다. 시선을 눈치챈 그가 아득 이를 갈더니 작은 방울을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확 목을 졸라서 풀숲에 던지려 했는데 이 약은 새끼가 도망을 가 버렸네? 빨리 찾아내서 숨통이 끊어지는 꼴을 봐야 하는데 말이야. 혹시 못 봤어?’

‘……저쪽으로, 뭐가 뛰어가는 것 같긴 했는데.’

가늘게 뜬 눈으로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던 그가 낮게 욕을 뇌까렸다. 네놈이 꼭꼭 숨는다고 못 찾을 줄 알고. 바닥에 버려진 방울이 구둣발에 짓이겨졌다. 고맙다 말한 그가 등을 돌려 멀어졌다.

잠시 후 벤치 뒤쪽에서 희미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지나쳤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뭐가?”

“왜 절 따라온 걸까요.”

모텔을 나와 어둑해진 거리를 걷는데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갈비뼈가 도드라질 만큼 비쩍 마른 고양이가 인도 한편에서 울고 있었다. 헐렁한 목걸이엔 방울 장식이 있었을 흔적만이 흉하게 남은 채였다. 외면하고 돌아섰지만 부서질 듯 애처로운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고 따라왔다.

“조, 아니 그 고양이는 잘 있어? 건강해?”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양부족 상태였던 조루는 보기 좋게 살이 오른 고양이가 되었다. 둥글게 몸을 말아 잠든 조루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을 푸근하게 했다.

“그 고양이가 보는 눈이 있네. 자길 돌봐 줄 사람을 잘 찾았어.”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의 눈가에 웃음이 고였다.

“서유는 상냥하거든. 무심한 것 같은데, 그래도 다 받아 준다?”

오늘도 봐 봐, 싫었을 텐데도 이렇게 나와 있잖아. 그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아저씨가 더 상냥해요.”

“그런 말은 나 같은 놈한테 쓰는 말이 아니지. 난 나쁜 놈이야. 아니, 정확히는 못난 놈. 소중한 사람들을 상처 입히기만 하는, 그런 못난 놈.”

그는 필사적으로 웃으려 했지만 더는 눈가에 다정한 주름이 잡히지 않았다.



쾅쾅.

요란한 소리에 나도 모르게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쾅쾅.

잠에 취해 있던 조루가 놀란 듯 커다랗게 꼬리를 부풀렸다.

“누구세요?”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 한밤중이었다. 이대로라면 이웃들이 모두 깰 것 같았다. 잠금장치를 풀자마자 바깥쪽에서 문을 확 열어젖혔다. 서늘한 공기가 열린 문을 타고 끼쳐 들었다.

“누구?”

검은 인영이 들어옴과 동시에 문이 닫혔다. 어둠 속에서 새파란 안광이 번뜩였다. 적개심으로 가득한 눈동자가 이쪽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누구…….”

“별것 아니잖아.”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낮고 음울했다.

“죽고 못 살 정도로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고.”

한 마디 한 마디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말투가 눈빛만큼이나 시렸다.

“몸매도…… 별로.”

평가하는 듯한 시선이 위아래로 나를 훑었다.

“이딴 보잘것없는 몸뚱이 하나 가지고 이 남자 저 남자, 다 만나고 다니는 거야?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전…….”

“웃음 팔고 몸 팔아서 쉽게 돈 버는 인생, 행복하냐? 만족해? 너는, 너는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 네가 하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건지, 그저 너 하나 편히 살겠다고 하고 다니는 그 짓거리가 얼마나 추잡한 건지 생각해 본 적도 없지?”

한 걸음씩 다가오는 남자를 피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왜, 무서워? 너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 봐?”

“…….”

“안 만져. 안 건드려. 너같이 더러운 쓰레기에게 손댈 마음 따윈 추호도 없어.”

혀가 굳어 버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남자의 움켜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너 같은 거, 정말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주먹으로 내리친 벽에서 쿵, 소리가 났다. 놀라 눈을 감았다 뜨자 베일 듯 서늘한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내 손으로 죽이고 싶은데, 참아. 왜냐면 너 같은 인간의 피를 손에 묻히는 것도 역겨우니까. 하지만 다음번엔 모르지. 경고하는데, 더 이상 설치지 마. 더러운 몸뚱이 들고 돌아다닐 생각 하지 말란 말이야.”

한참이나 말없이 노려보던 남자가 돌아섰다.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죽어 버려.

씹어뱉듯 토해 낸 남자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