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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 방학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겨울 방학만 오매불망 기다려. 봄 방학도 있고, 여름 방학도 있고, 겨울 방학도 있는데 왜 가을 방학은 없을까?”

어느새 녹아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튜브 아이스크림을 있는 힘껏 쭉, 쭉 빨아 당기며 친구가 햇님을 향해 금세 앓는 소리를 했다.

“학교 나오기가 그렇게 싫어?”

“그럼 싫지. 좋아?”

“뭐……. 난 딱히 나쁘진 않은데.”

가볍게 한 대꾸치고는 너무나 진심이었다. 때문에 햇님의 대답을 들은 친구가 놀란 눈을 하며 곧장 목소리를 높였다.

“나쁘지 않다고?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지, 응?”

“난 학교 계속 나오는 거 괜찮아.”

“와, 이제 나쁘지 않다는 걸 넘어서 학교 나오는 게 괜찮다고? 대체 왜?”

“음…… 학교도 따분하고 지루하긴 한데 방학이 난 더 지루해. 재미도 없고, 딱히 할 일도 없고. 그래서 방학 언제 끝나나, 언제 끝나지? 하면서 개학할 날만을 오히려 기다려.”

“특이하다, 진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친구는 햇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방학 타령만 하면서 방학은 대체 언제 오지, 언제 오지, 혹은 방학 중이면 제발 끝나지 마라, 끝나지 마라, 만 반복하는 데 비해 햇님의 반응은 좀처럼 전례에 없는, 그러니까 아이들 사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등교하자마자 식단표를 펼쳐 보고 기다렸던 점심을 지나 시작하는 5교시 수업은 거의 잠에 빠지게 하는 마약과도 같았다. 수업을 담당하는 교과목 선생마저도 식후의 그 나른함을 못 이긴다고나 할까.

“자, 다들 졸음도 깰 겸 돌아가면서 문제 한번 풀어 보자.”

연습 문제를 칠판으로 옮기는 짧은 판서를 마치고 교과서를 든 수학 과목 담당이 쭈욱 한 번씩 반 아이들을 훑어보았다가 출석부로 시선을 옮겼다. 하필 수학이라니. 담당 선생의 시선에 다들 알게 모르게 긴장을 품고 있었다. 아마 오늘 날짜가 며칠인지에 따라 시작될 번호가 정해지나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늘은 날도 화창하니 좋구나. 어, 여기 딱 걸맞은 이름이 있네. 모햇님? 햇님이가 1번 풀고, 햇님이 뒤에 있는 번호대로 2번, 3번, 4번, 5번 풀어. 풀이 과정도 쓰는 거 잊지 말고.”

나른한 졸음을 만끽하기 딱 좋았다.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서 구태여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려 하지 않은 채 고개를 꾸벅꾸벅 앞으로 하려던 찰나, 제 이름을 저보다 먼저 들은 짝이 구색으로 펼쳐 놓은 햇님의 교과서 위를 손가락을 모아 가볍게 탁, 탁 쳤다.

“햇님아.”

“……?”

“너 나와서 풀래.”

“아…….”

소곤소곤 낮은 목소리라 단번에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 분위기를 보아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몇 번이지, 어디에 있는 문제지? 그러고서 서둘러 짝이 샤프로 가리키는 곳으로 제 교과서에 똑같이 시선을 급히 옮겼다. 1번 문제. 아, 다른 과목들도 고만고만했지만 유독 수학엔 젬병인데 하필. 이런 게 제일 싫어. 공개적으로 해 보라 시키는 거. 지들이 풀지 왜 학생들을 시켜, 매번.

“야. 이거 어떻게 푸는 거야? 너 풀었어?”

“아니, 나도 풀고 있는 중이야.”

“아, 어떡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때문에 주변의 아이들을 모두 쿡, 쿡 찔러 물어봤지만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학 좀 한다는 친구도 하필 다른 분단에 앉아 있어서 이 곤란을 어떻게 타개할지 몰랐다.

“다들 왜 이렇게 느려? 어? 그러게 꾸벅꾸벅 졸지 말고 착실하게 수업 들었어 봐. 나와서 척척 풀지.”

의자를 빼내어 다리를 꼬고 앉은 선생이 재빨리 문제를 풀지 못하는 아이들을 한심하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그러는 사이 쭈뼛쭈뼛 하나, 둘 앞으로 나가 제게 할당된 문제를 풀기 시작했고 햇님도 겨우 다른 친구에게 얻은 해답으로 칠판에 풀이 과정과 답을 옮겨 적었다.

“진짜 제일 싫어, 제일.”

몰려오던 잠도 덕분에 다 달아나 버렸다. 날짜 때문에 번호가 걸린 것도 아닌 날씨 때문에 제가 걸린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예컨대 이처럼 문제를 풀어 보라거나 영어 문단 해석을 해 보라거나 퍽 가벼운 경우는 그냥 본문을 읽어 보라는 정도 등등. 날이 흐리면 흐린 대로, 좋으면 또 좋은 대로 선생들은 제 이름을 가져다 붙였고 또 다른 경우는 이름이 예쁘다는 이유로 저를 이렇게, 저렇게 시키기 일쑤였다.



‘모햇님? 이름 예쁘다, 햇님이. 좋겠다, 햇님이 너는. 이름도 예뻐서.’



늘 듣는 이름에 대한 칭찬이 칭찬 같지 않았다. 저는 단 한 번도 제 이름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이름과 달리 항상 흐리기만 한데 좋기는 개뿔. 이름도 햇님이 뭐야, 햇님이. 빌어먹을 이름이야, 하필.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나는 타종이 울리니 반은 금세 어수선해졌다. 햇님도 그 틈에서 느릿느릿 제 책가방을 챙겼다. 다들 학교에서의 일과를 모두 마쳐서 신이 나는 얼굴이었지만 햇님만은 그렇지 않았다. 속에선 언제나 그렇듯 똑같은 문장을 읊었다.

아, 집에 가기 싫다. 그것도 너무.

그렇다고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반에서 함께 어울리는 친구라곤 딱 하난데 학교를 마치곤 항상 일정이 있었다. 해가 바뀌어 반이 달라져 사귀는 새 친구가 생겨도 매한가지였다. 항목은 달라도 분류는 대부분 같았다. 학원 또는 과외.

“주영아 너 오늘 학원 빠지면 안 돼?”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제부터 선행반이라 엄마가 엄청 검사해. 걸리면 끝장이야.”

“아……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죽을상을 하는 친구의 표정을 보며 햇님은 다른 의미로 시무룩해졌다. 학원 같은 곳이라도 좋으니까 저도 그런 도피처가 있었으면 좋겠다.

“미안해. 아! 대신 이번 주말에 햇님이 네 집 놀러 갈까?”

“……어? 우리 집?”

“응.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너희 집에 놀러 가 본 적 없는 것 같아. 우리 집은 몇 번 와 봤잖아. 만화책 빌려 가지고 이번엔 네 집에서 놀자! 나 토요일엔 학원 다섯 시면 마쳐. 어때? 아니면 일요일도 좋고!”

꼭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것처럼 친구의 눈은 반짝거렸지만 햇님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로 느릿하게 저었다.

“음…… 그럼 그냥 밖에서 놀자. 토요일, 일요일 난 다 좋아. 그런데 집은 안 돼.”

“안 돼? 왜?”

“그냥…… 어, 실은 우리 엄마가 안 좋아하셔. 집에 누구 데리고 오고 이런 거…….”

“아…… 진짜? 어머니가 안 좋아하신다면 뭐…….”

“응. 다음에 엄마한테 미리 물어보고 가능할 때 초대할게.”

“알았어, 될 때 얘기해 주기. 꼭이다? 아, 나 학원 차 타야 하는데 늦겠다. 먼저 갈게, 내일 봐!”

반에는 이미 몇 남지 않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썰렁했다. 뒤늦게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 친구는 헐레벌떡 손 안녕을 하며 다급하게 계단 쪽으로 타다다 뛰어갔다. 햇님은 친구가 사라지는 쪽으로 저도 대충 손을 흔들곤 양손으로 등에 멘 가방끈을 짧게 잡았다.

제 집에 놀러 오고 싶다고 말한 친구는 방금 저와 얘기를 나눴던 친구 말고도 몇몇 있었다. 으레 지금 또래들은 다 그러하니까. 이 친구 집에서 놀아 보고, 저 친구 집에서 놀아 보고. 그런 재미가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저는 극도로 제 집으로 누구를 데려오거나 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렇다고 여태껏 아예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가 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딱 한 번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때는 제가 처음 초등학교를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정확히는 뭐가 뭔지 모를 시절. 못산다는 개념이 덜 자리 잡혔을 때.



‘우리 오늘 햇님이 집에 놀러 가자!’



갑자기 생긴 학교란 환경에 그저 신이 났다. 새 친구들도 좋았고 교과서 같은 것들도 모두 신기했다. 정글짐과 하늘 다리를 오가며 땀이 쏙 빠지도록 놀고 있었을 무렵 같이 있던 무리 중 한 명이 대뜸 제 집으로 놀러 가자며 선동을 했다. 그에 다른 아이들도 모두 하나같이 반색하는 얼굴로 저를 쳐다보았다.



‘가자! 햇님이 집!’

‘응응. 나도 햇님이 집에 가서 놀고 싶어!’

‘정말?’

‘응!’

‘나도, 나도!’



너도나도 제 집에 놀러 가고 싶다면서 양쪽으로 팔짱을 껴 오는데 순간 무슨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모두들 제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니 어깨도 으쓱 올라가고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가자. 우리 집!’

‘와아!’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이끌었다. 골목 굽이굽이를 조막만 한 발들로 아장아장 걸었고 중간중간 밭은 숨을 헉, 헉 하고 내뱉었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몇몇은 처음 보는 낯선 동네가 조금은 신기한 듯 보이기도 했다.



‘여기야, 우리 집!’

‘여기가 햇님이 집이야?’

‘응!’



천장이 한없이 낮고 기울어져 가는 집이 그 당시엔 부끄럽다고 생각해 보지 못했다. 다들 이런 곳에 사는 줄 알았다. 다들 비슷비슷하게, 저처럼.



‘방이 하나뿐이야?’

‘응.’

‘햇님이 방은 따로 없어?’

‘응.’

‘아…….’

‘우리 집은 내 방이랑 동생 방도 따로 있는데.’

‘나도. 방 다 따로 있어!’

‘진짜?’



저들이 사는 집과 다른 구조에 의아해하는 눈동자였지만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독 한 아이는 달랐다. 나중에야 그 아이가 사는 동네가 남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때문에 비교가 돼도 너무 되고, 차이가 나도 너무 심하게 나는 제 집이 그 아이에겐 놀림거리의 대상이 되기 딱 좋았다. 뭉개기 좋은, 깔보기 좋은.

집이 좀 작아서 그렇지 장난감도 있었고 색칠 놀이할 것들도 있었다. 죄 누군가가 쓰다 만 장난감들에 조금은 꾀죄죄한 인형들이었지만 저는 그래도 나름 잘 가지고 놀았다. 그것들이 그나마 또래도 별로 없는 이 산꼭대기 동네에서 저와 시간을 보내 줄 유일한 친구들이기 때문이었다. 함께 온 아이들도 그것들을 내어 오는 저의 모습에 별 반감을 가지지 않았다. 그 아이를 제외하고선.



‘이거 왜 이렇게 더러워? 이 인형은 너무 못생겼어. 장난감이 이것뿐이야? 요술봉이나 블록 같은 건 없어?’

‘이게 단데…….’

‘으, 우리 집엔 인형들 이것보다 훨씬 많고 블록도 있고 마트놀이도 있어. 이만큼 큰 거.’



한 명이 그렇게 말을 하자 아이들이 하나, 둘 저들이 들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으며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맞아, 인형이 너무 못생겼어. 지저분해.’

‘냄새도 나.’

‘으, 냄새. 햇님이 장난감은 다 못생겼어.’

‘우리 집 가자. 햇님이 집 재미없어.’



둘러앉은 지 20분도 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한 아이가 자기네 집으로 가자는 말에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을 하나, 둘 놓았다. 그러고선 미련 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어린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나, 나도 갈래.’

‘햇님이도?’

‘응. 나도 너희 집 갈래.’

‘음……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