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화







밤 11시가 넘는 시각, 검은색 고급 세단이 멈추어 선 곳은 고풍스러운 건물 앞이었다. 차가 정차하자 뒷문이 열리고 짙은 차콜색 슈트를 입은 남자가 내려서 문을 잡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같이 올 사람은 많지 않습니까? 다음부터는 제발 저 좀 빼고 알아서 움직이십시오.”

억지로 끌려 나온 구태연 비서실장의 짜증스러운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블랙 슈트를 입은 남자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좋은 곳을 의리 없이 어떻게 나 혼자 가나? 우리 구 실장이랑 같이 가야지.”

키가 크고 군더더기 없이 탄탄해 보이는 남자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러자 피부가 창백하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미간을 잔뜩 구기며 투덜거렸다.

“이미 자료는 넘겨 드렸고, 미팅 장소까지 알려 드렸으면 나머지는 대표님이 알아서 하셔야죠. 세상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퇴근했는데 술 먹자고 부르는 직장 상사입니다.”

태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내밀어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방향을 제시했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서후 대표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보수도 후하고 일도 만족스러웠지만 이렇게 야밤에 불려 나오는 것만큼은 아직도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구 실장은 궁금하지 않아? 주화 건설의 박영훈 실장이 어떻게 하청 업체를 선정하는지 말이야.”

서후는 태연의 뚱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글쎄요.”

태연은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웃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살짝 웨이브진 검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반듯한 이마와 그 밑으로 짙은 눈썹과 풍부한 속눈썹 그늘 아래 풍부한 음영이 진 깊은 눈매가 즐겁다는 듯이 휘어져 있었다.

“굳이 없는 시간을 내서 남들이 하는 진상 짓까지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얼마든지 협조할 수 있지만, 현장에서 사실을 확인하는 건 대표님이 알아서 하시기로 한 사안이 아닙니까?”

차분하게 불만을 토해 내면서도 태연은 자연스럽게 그를 건물 내부로 안내했다. 그들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회원제 클럽 로비 앞에 서 있는 안내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유유자적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혹시 알아? 어쩌면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진상 짓을 보게 될지? 건설업계 쪽에서는 이미 유명 인사라고 하더군.”

뚱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태연을 향해 남자가 눈을 접고 매력적이게 웃었다.

“그러니까 구 실장,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이젠 얼굴 좀 펴지 그래?”

태연은 미간을 구기며 무테안경을 고쳐 썼다.

‘속지 말자.’

자신의 옆에서 유유자적하게 걷고 있는 남자는 필요하다고 마음만 먹으면 사람 속을 간단하게 휘저어 놓을 수 있는 인간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대표님이 뭐라고 그러시든 이런 식으로 따라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에이, 왜 이래? 우리 사이에.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사생활 침해는 못 참는다고 했잖습니까?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연애를 하십시오. 심심하다고 시도 때도 없이 절 불러내지 마시고.”

모처럼 일찍 퇴근해서 집에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태연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게임들과 미루어 두었던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주말을 알차게 보내려던 참이었다. 물론 다짜고짜 급하다는 서후의 연락을 받고 끌려나오기 전까지는 그럴 줄 알았다.

“난 말이야. 시시껄렁한 연애를 하느니 차라리 상큼하게 반응하는 구 실장과 같이 있는 것을 선택하겠어.”

어두운 실내로 들어서며 서후가 태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러시든가 말든가 앞으로 퇴근 후에는 저와 접촉하실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자리는 예약해 두신 겁니까?”

태연은 날카로운 눈으로 넓은 실내를 훑어보았다. 주화 건설의 박영훈 실장은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런 오픈형 클럽을 들락거리는 것일 테지.

“물론이지. 구 실장이 좋아하는 어둡고 으슥하면서 구경하기 딱 좋은 그런 곳으로 말이야.”

“대표님, 말은 바로 하도록 하죠. 그건 대표님 취향을 따라가다 보니까 그런 겁니다.”

“그런 거였나?”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 앞에 나타난 웨이터가 정중한 몸짓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오픈형인 홀에 스플릿 형식으로 배치한 자리로 인해 적당히 프라이빗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들이 편안하고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 앉자 웨이터가 테이블 옆으로 와 섰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각종 술과 잔들이 잘 세팅이 되어 있었다. 클라이언트들의 취향을 파악하고 있는 웨이터는 반짝이는 크리스털 잔 두 개를 바로 세운 후 얼음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탄산수 병을 집어 잔을 채운 후 조용히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여자라면 환장을 한다면서? 바이라는 말은 없었잖아?”

잔을 들어 한번 살펴본 서후는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그의 시선이 정중앙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 꽂혔다. 소파에 한쪽 팔을 길게 얹고 느른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인간이 박영훈 실장일 것이다.

서후의 턱짓에 태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정중앙에 있는 사람들을 자세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널찍한 소파에는 감청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술잔을 들고 그 옆으로 브라운 계열의 정장을 입은 남자가 두 손으로 술병을 든 채 반은 선 자세로 술을 따르고 있었다.

“술잔을 든 사람이 주화 건설의 박영훈 실장 그리고 술을 따르고 있는 사람은 금영 건축 설계 사무소의 김제균 소장입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어느 소속인지 모르겠지만, 여성이 확실합니다.”

태연은 예리한 촉과 믿을 수 있는 눈썰미를 가진 자였다. 그의 말에 서후가 흥미로운 듯 눈을 빛냈다.

“이런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군. 취향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닐 텐데 말이지.”

화기애애해 보이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앉아 있는 사람의 몸은 확실히 가늘었다. 갸름한 얼굴에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여자는 눈처럼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넥타이와 슈트를 입고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여자가 몸을 뒤로 빼는 것과 동시에 영훈이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긴 했지만, 여자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렇게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내면 더 찝쩍거릴 타입일 텐데, 박영훈 실장이라는 사람은.”

서후는 거의 반 이상 마신 잔을 내려놓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단순히 예쁘장하게 생긴 호스트나 호스티스를 꾸며 놓은 건가 싶었는데,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를 들어 보니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선배. 이러지 좀 마시죠.”

“우리 후배가 술을 많이 마셨나 보다. 하늘 같은 선배한테 짜증도 내고 말이야. 야, 인마! 너 그러는 거 아니다. 아쉬운 놈이 어디 겁대가리도 없이 말이야.”

영훈이 옆으로 바싹 붙어 앉자 유진은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떨어져 앉았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넙데데한 영훈이 어찌나 빨리 몸을 다시 붙여오는지 그녀는 그저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영훈 선배, 이쯤에서 그만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여자면 환장을 하는 인간이라도 이젠 대기업의 실장 타이틀을 달았으니 조금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학부 때나 개차반이었지, 사회 나와서도 그럴까 싶었는데 역시 그는 한결같았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멀쩡한 것 같던 영훈은 이젠 후배인 그녀에게 대놓고 능글맞게 웃으며 수작을 걸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전화를 걸어 선후배를 따지며 불러낼 때부터 의심해 봤어야 할 일이었다. 이 정신 나간 인간은 하청을 주겠다는 허접한 명분으로 불러내서는 그녀를 접대부 취급하고 있었다. 지금이 시대가 어느 때인데.

“유진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네오 리조트 리모델링 건이 네 손에 떨어질 수도 있는 아주 중대한 자리라고. 이 자리가! 어때? 진짜 재미있지 않냐?”

유진은 덥고 습한 바람에 눅눅해진 귀를 손으로 문지르며 옆으로 자리를 조금 더 옮겼다.

“아니요. 전 하나도 재미가 없는데요?”

맞은편에 앉아 있는 김제균 소장이 매서운 눈초리로 유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김 소장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정작 입의 혀처럼 굴며 자신보다 어린 영훈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것은 김 소장인데, 아직까지 계약 건에 대해서는 일절 확답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었다. 김 소장이 건설 현장 일을 따내면 제 회사에도 일이 넘어오겠지만 계약은 이렇게 진행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진이 유쾌한 기분이냐고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사실 대학교 선배만 아니었어도, 벌써 탁자 위에 있는 맥주잔으로 영훈의 뒤통수를 가격했을 것이다.

“영훈 선배. 저 지금 기분 엄청나게 더러우니까 이 손 좀 치우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볼록 튀어 나온 이마, 눈썹 정리를 하지 않아도 어여쁘게 휘어진 눈썹 밑으로 쌍꺼풀이 없는 눈이 고집스럽게 앞만 보고 있었다. 꽉 다물고 있는 입술 사이로 한 자 한 자 끊어 말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영훈은 반쯤 풀린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이제 대놓고 유진의 허벅지를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단순하고 인내심 없던 꼬맹이 후배님께서 나름 사회물 좀 먹었다고 참기도 하고 말이지. 너 참 많이 컸다. 많이 컸어. 으이구, 넌 누굴 닮아 이렇게 귀여운 거냐.”

유진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겨우 풀고는 영훈의 손을 꼭 잡아 그의 허벅지 위로 억지로 올려놓았다.

“영훈 선배, 그렇게 허벅지를 주무르고 싶으시면 이제부터 선배 거 실컷 주무르시고요. 정 우리 회사와 계약을 하고 싶으면 담당자와 연락해서 말씀하세요. 전 공사 현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계약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

영훈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손을 꽉 붙들고 있는 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군대를 제대하고 3학년으로 복학하면서 유진과 같이 건축학과를 다녔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는 한결같이 먼 후배였다.

조그마한 리모델링 회사에 다닌다길래 기껏 도와주려고 불렀더니, 고마워하기는커녕 되레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리조트 인테리어 계약 건만 따내도 얼마가 남는 장사인지는 김 소장이 입에 침이 마르게 설명해댔다.

그러니 이쯤이면 아무리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빈말이라도 해야 정상이었다. 강릉에 있는 ‘네오 리조트’ 공사 자체가 워낙 크기 때문에 건축 자재 업체와 가구 업체 그리고 조경에 이르기까지 영훈에게 연줄을 닿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이 이미 차고도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