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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인터내셔널 그룹 (1)



윌리엄스 포트 시내로 들어선 카퍼레이드 행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어린 전사들의 퍼레이드를 반기며 응원해 주었다.

말 그대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행사가 끝날 무렵에 추산한 인원은 약 4만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Welcome!”

“Good luck! Korea!”

그리고 생각보다 높은 대한민국의 인기에 준혁을 비롯한 아이들은 조금 어리둥절해하기도 했다.

자국 대표인 미국 팀은 당연히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지만, 대한민국 팀도 많은 환호와 응원을 받은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동양의 신비한 기체조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이 된 점이 주효했다.

위아래로 깔끔하게 유니폼을 차려입은 대한민국 선수들은 밝은 표정으로 사람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응대해 주었다.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현지인과 관람객들은 사탕이나 작은 인형을 던지기도 하고, 장난감 야구공을 가져와 사인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야구 저지를 입은 어린 꼬마에게 사인을 해 주는 모습을 방송국 카메라나 사진작가들이 유심히 찍기도 했다.

그렇게 모두가 즐겁게 만끽한 카퍼레이드는 밤 10시 30분이 되며 화려한 막을 내렸고, 각국의 선수들과 현지인들은 각자의 숙소로 흩어졌다.



숙소에 도착한 대한민국 선수단.

펜션 형태의 숙소는 방 여섯 개와 커다란 거실, 그리고 식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자의 방에서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이들은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거실에 모여들었다.

“오늘 너무 재밌었어.”

“그러게. 사탕도 많이 받고, 사인도 해주고. 진짜 신났어.”

“여기 또 오고 싶을 듯.”

아이들이 재잘대는 가운데, 약간 분위기가 다른 민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난 약간 무서워.”

“응? 뭐가?”

“내일부터 경기 시작인데, 내가 잘해 낼 수 있을까?”

민수가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도 몰랐고, 다른 팀들도 엄청 세 보이더라고.”

며칠간 보아 온 다른 팀 선수들 중 일본 팀을 제외하곤 자신들보다 몸집이 작은 선수는 거의 없었다.

물론 신체가 전부는 아니지만, 스포츠에서 피지컬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가 없다.

그래서 민수가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뭐라고 할 수만은 없었다.

사실 다른 아이들도 말은 안 했지만 어느 정도는 가슴속 깊이 숨겨 놓은 생각이었으니까.

“난 미국에 다시 올 거야.”

“응?”

그때, 치열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U13으로 또 오려고?”

사실 세계 대회가 U12가 전부는 아니었다.

주목도가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그 이상 나이대의 대회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치열이 말하려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아니, 리틀 야구는 이번이 마지막이고…….”

잠시 말을 멈춘 치열이 다짐하듯 내뱉었다.

“메이저 리그.”

“헐, 진짜?”

“그건 좀 쉽지 않을 듯.”

“말대로 되면 대박이긴 한데.”

“치열이도 잘하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다수의 부정적인 대답과 약간의 긍정적인 대답들.

아이들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아직은 멀게 느껴지는 메이저 리그였다.

하지만 그동안 치열이 야구에 임하는 모습을 보면 확실한 계획이 있어 보이긴 했다.

벌써부터 과외라고 하면서 개인 트레이너까지 고용하고 있는 점을 보면 부모님의 지원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우습게 질 생각은 전혀 없어.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 아니야?”

“그렇지!”

“맞아! 나도 이기러 온 거라고!”

“난 엄마가 가라고 해서 왔는데?”

엄마를 유독 보고 싶어 하던 아이의 말에 모두가 야유를 쏟아 냈다.

그에 처음 말을 꺼낸 민수도 입을 열었다.

“물론 나도 무섭긴 하지만, 지고 싶다는 뜻은 아니야. 조금 떨리고 긴장이 될 뿐이지.”

“그렇다면 더욱 용기를 내야지.”

아이들을 쓱 둘러본 치열이 힐끔 준혁을 바라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다시 시선을 돌리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마침 준혁이 덕분에 컨디션도 올라왔잖아. 자신감을 가지고 하자. 우리는 한 번도 안 지고 전승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그렇지! 우리는 진 적이 없어!”

“맞아. 질 생각도 없다고!”

“민수야, 힘 좀 내봐. 네가 우리 안방마님인데, 그러고 있으면 안 된단 말이야.”

“그래, 민수야. 힘내. 우리도 도와줄게.”

모두가 힘을 내라며 민수를 응원했다.

아니, 어쩌면 민수를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민수가 아이들의 응원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대회 전날 약한 소리나 해서 미안해. 하지만 힘을 낼게. 우리 우승하자.”

“좋아! 우승이다!”

“그래, 해 보자!”

“응. 사실 엄마가 꼭 우승하고 오라고 했어.”

아이들이 큰 소리로 떠들어 댈 때, 털보 코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우승하자, 이놈들아. 그러려면 이제 들어가서 자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시간이 몇 시냐?”

행사가 늦게 끝나서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거실로 나온 털보 코치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자,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자자.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하고.”

“네, 코치님!”

씩씩하게 대답한 아이들이 각자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준혁도 방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는데, 털보 코치가 잠시 불러 세웠다.

“준혁아.”

“네?”

“넌 어떠니?”

“뭐가요?”

“치열이는 메이저 리그를 가고 싶다고 하는데, 준혁이 너는 어떻게 하고 싶냐고.”

갑작스런 털보 코치의 질문에 준혁은 잠시 머뭇거렸다.

사실 그에 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는 야구가 재밌어지기도 하고, 앞으로도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울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이공자와 야구를 하는 것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마당에 야구가 아닌 일을 하는 것도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은 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

“네. 그런데 이번 대회 기간 동안 한번 생각해 보려고요.”

“그것도 좋겠구나. 그래,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네, 코치님.”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하고. 알았지?”

“네, 코치… 아니, 감독님.”

준혁이 꾸벅 인사를 한 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치열이 열린 문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왔냐?”

여느 때처럼 휴게실에서 격투기를 보고 있는 이공자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준혁을 맞아 주었다.

“네, 사부.”

왠지 평소와 다르게 준혁의 목소리가 묘하게 가라앉은 것을 알아차린 이공자가 물었다.

“왠지 생각이 많은 것 같구나.”

역시나 사부답다는 생각에 준혁이 얼른 대답했다.

“네, 사부.”

“내일이 대회 시작이지?”

“네.”

“그래서 휴식 시간을 많이 주는 거고?”

“네.”

“그게 문제다.”

“네?”

“몸이 편하니까 잡생각이 들고, 잡생각이 드니까 쓸데없이 머리만 복잡해지지. 가자, 오늘 내가 빡세게 굴려 주마.”

“네?”

“넌 항상 불리하면 ‘네, 네’거리더라. 나와라. 더는 ‘네’ 소리도 못 하게 해 주마.”

“아…….”

“아는 무슨. 시끄럽고, 나와라.”

이공자가 몸을 일으켜 뒤도 안 돌아보고 휴게실을 나가 버렸다.

준혁은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뒤를 쫓아갔다.

“사부, 같이 가요!”



***



드디어 리틀 리그 월드시리즈 개막의 날이 밝았다.

오늘도 새로 생긴 루틴대로 숙소 앞 잔디밭에서 아침 운동을 한 대한민국 선수단은 곧장 아침을 먹은 후 복장과 장비를 챙겨 버스에 올라탔다.

잠시 후, 이들이 도착한 곳은 하워드 J. 라매드 스타디움, 바로 오늘 개막식이 열리는 장소였다.

대회 기간 동안 윌리엄스 포트에서는 두 개의 경기장이 사용된다.

그중 하워드 J. 라매드 스타디움에서는 미국 그룹, 또 다른 경기장인 발렌티어 스타디움에서는 월드 그룹의 경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다시 이곳에서 대망의 최종 결승전, 월드시리즈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어제 카퍼레이드에 참가한 랜디 존슨의 시구와 함께 시작된 개막식은 16개 팀의 선수와 관계자들, 그리고 수많은 야구팬들이 모여 성대하게 진행됐다.

그리고 오후 1시.

마침내 대한민국 팀과 퀴라소 팀의 첫 번째 경기로 월드시리즈의 서막이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윌리엄스 포트에 위치한 발렌티어 스타디움입니다. 드디어 리틀 리그 월드시리즈가 개막이 되었는데요, 오늘 그 첫 번째 경기로 대한민국과 퀴라소, 퀴라소와 대한민국의 경기가 펼쳐지겠습니다.]

[네. 그동안 대한민국 선수단이 수많은 화제를 몰고 왔는데요, 오늘 첫 경기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많은 팬들의 관심이 아주 대단해요.]

[현지에 와서 보니 생각보다 인기가 많더라고요. 우리 해설자님께서도 직접 선수들을 만나 보셨다고요?]

중계진도 직접 윌리엄스 포트로 와 현장 중계의 생동감을 보여 주었다.

[네. 화제가 된 아침 운동 시간에 가 보았는데요, 그 열기가 정말 뜨거웠습니다.]

[기체조 얘기가 나왔으니 남준혁 선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요, 마침 오늘 선발입니다. 좋은 성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기체조와 관련이 있을까요?]

[하하, 아마 연관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특출난 효과가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몰랐을 리가 없지요. 심신을 단련하고 몸을 풀어 주는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그렇군요. 아, 말씀드리는 순간, 남준혁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왔습니다.]

[코치가 와서 체크를 하고 내려가네요. 곧 연습구를 던진 후 시합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마운드에 선 준혁이 로진백을 집어 들었다.

세계 대회 첫 경기의 선발이라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리며 약간 긴장감이 느껴졌다.

수많은 야구팬들이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

‘잘할 수 있을까?’

잠시 잡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려 하자, 사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 닥치고! 생각하지 말고! 일단 움직여라! 그러면 긴장감도 지나갈 것이고, 두려움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지옥 훈련.

체력도, 유연성도, 그리고 야구를 위한 것도 아닌, 단지 머릿속을 비우기 위한 훈련이었다.

실제 체력이 소모되지 않아 망정이지, 현실이었다면 그대로 짐을 싸야 할 정도였다.

새롭게 마음을 다잡은 준혁이 와인드업 자세를 취한 후, 연습구를 던졌다.

펑!

“좋아! 계속 이렇게만 던져!”

공을 받은 민수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준혁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공을 던질 때마다 몸의 긴장감이 풀어지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펑!

“오케이! 좋아!”

마지막 연습구를 잡은 민수가 소리를 지르며 1루수에게 공을 던졌다.

시크한 표정으로 준혁의 연습구를 유심히 바라보던 치열이 공을 잡아 2루수를 호명하며 힘차게 던졌다.

대한민국 팀의 붙박이 2루수 김예성.

유난히도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예성이지만, 그런 마마보이 기질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든든한 센터 라인을 지키고 있다.

무엇보다 실책이 적고, 센스 있는 플레이를 자주 보여 준다.

오늘 경기에서 3루수로 선발 출장한 이성철.

멀티 능력을 가진 성철은 포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다.

그의 다재다능함은 대한민국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다만, 어딘가 살짝 맹한 구석이 있는 것이 단점.

성철이 좌익수에게 공을 던지려는 순간, 심판이 제지했다.

표정에서 ‘이해하겠는데 적당히 하자’라는 뜻이 절절이 전해져 왔다.

[가볍게 긴장을 풀 겸 내야수들이 돌린 공이 다시 남준혁 선수에게 돌아왔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선수들의 의지를 모은 공이라고 한다면 너무 오글거릴 것 같습니다만, 선수단 분위기가 하나로 모아진 것 같다는 느낌은 드네요. 허허허.]

리포터의 말마따나 준혁은 왠지 모르게 공에서 뜨거운 느낌이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앞만 보고 달릴 시간이다.

“자, 가자!”

준혁이 투수판에 발을 대고 와인드업 자세를 취하자 민수의 미트가 움직였다.

서서히 기본부터!

준혁이 힘차게 발을 뻗으며 오른팔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