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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전야제 (1)



퍼억!

가슴의 프로텍터를 때린 야구공이 바닥에 떨어졌다.

“윽!”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마음의 눈으로 공의 궤적을 예측하고, 빠른 손으로 공을 잡아채는 것이다!”

준혁에게 이공자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너클볼이잖아요!”

하지만 준혁도 지지 않고 분한 듯 소리를 질렀다.

제자의 반항에 이공자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니, 비급에도 없는 공을 갑자기 던지는 법이 어디 있어요!”

야구의 정석 기본편.

너클볼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실제로 던지는 법은 나와 있지 않았다.

하지만 괴물 같은 이공자는 지금 준혁에게 너클볼을 던지고 있었다.

“그럼 전력으로 패스트볼을 던져 줄까?”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물어보는 이공자.

지금 저 모습은 자상한 사부가 아니라 호승심이 넘치는 무사의 모습이었다.

“아,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기세에 밀린 준혁이 냉큼 꼬리를 말았다.

이공자가 전력으로 던지는 패스트볼은 정말이지 받고 싶지 않았다.

포수의 기본자세를 연습하고 이공자의 공을 처음 받던 날, 제대로 된 패스트볼을 던져 주겠다고 했다.

캐치볼은 항상 해 왔으니 별생각 없이 알았다고 쉽게 대답했는데…….

이공자의 공은 장난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야구장이 나타난 후, 항상 꺼져 있던 외야석의 전광판이 혼자서 켜졌겠는가.

팡파르 소리와 함께 전광판에 나타난 숫자는 시속 187㎞.

좌우에서 꽃가루가 날리고, 숫자 옆에는 ‘New’라는 글자가 새겨지기까지 했다.

나중에 이공자는 그 공이 완전하게 전력을 쏟은 것도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준혁이 공을 잡은 것이 아니라 벌리고 있던 미트 안으로 공이 빨려 들어왔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당연히 만화에서처럼 뒤로 넘어간 준혁은 그 뒤로 절대 전력으로 공을 던지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 이후로 속도를 조절해서 던지고는 있지만, 체인지업이라고 던지는 공조차 145㎞를 가볍게 넘겼다.

연습은 해야겠는데 패스트볼이 너무 빠르니, 온갖 변화구를 던지는데 그것도 절대 잡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 직구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직구라는 것은 없다.

패스트볼도 최대한 움직임을 배제하고 속도에 중점을 둔 공이지만, 분명 변화는 존재한다.

공이 지저분하다는 소리를 들을수록 그 움직임이 더 심한 것이고.

그런데 속도를 줄이고 공을 던지던 사부가 갑자기 손장난을 시작하자, 그때부터 공에서 온갖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 결과, 지금은 너클볼까지 던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역시 변화구가 나았다.

이공자가 전력으로 던지는 패스트볼이나 너클볼이나 잡기는 둘 다 어렵지만, 그래도 너클볼에 맞아 죽을 일은 없지 않은가.

일단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다.

준혁이 바닥의 공을 집어 사부에게 던져 주며 소리 질렀다.

“오케이! 볼 좋아요! 같은 공 한 번 더!”

소리를 지르며 투수의 기분을 업시켜 주는 것도 포수의 몫.

어디까지나 기본에 충실해야 했다.

“좋다. 한 번 더 간다, 제자야!”

둥실.

공의 실밥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회전 없이 날아오는 공.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 예측을 할 수 없었다.

허공에 그림을 그리며 방황하는 준혁의 미트 속으로…….

퍼억!

“아이고.”

아니, 앞으로 뻗은 미트 위로 날아간 공이 마스크 한가운데를 때린 후 굴러 떨어졌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



“얘들아, 준혁이 왔다!”

대만과의 결승전이 끝난 다음 날.

준혁이 오랜만에 등교를 하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준혁이 어제 대단하던데!”

“홈런도 치고, 퍼펙트게임도 하고.”

“이제 몸도 안 약한가 봐!”

“그러고 보니까 도대체 언제부터 야구를 한 거야?”

“나랑 같은 팀이라니까!”

한 아이가 준혁에게 질문을 하자, 철승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며 튀어나왔다.

그러자 질문을 한 아이가 철승이에게 다시 물었다.

“근데 너는 왜 안 나가?”

“아, 그러니까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끼워 달라고 하는 건데.”

철승이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후회하는 말을 늘어놓자, 준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털보 감독님이 너 공부 때문에 야구 그만뒀다고 하던데?”

“응, 그랬지. 그런데…….”

“그런데?”

“결국 야구도 제대로 못 하고 공부도 못 하네. 젠장.”

철승이의 신세 한탄에 주위로 몰려든 아이들이 크게 웃었다.

“하하! 철승이랑 공부는 어울리지 않지.”

“그래. 매일 축구에, 야구에, 농구에……. 운동만 하는 것 같아.”

“맞아. 그래서 야구 그만두지 않으려고. 고등학교에 가서 계속할 거야.”

철승이가 다짐하듯 말하고는 준혁이를 바라봤다.

“그러니 꼭 같은 고등학교로 가자, 준혁아.”

“응?”

“리틀 야구는 어차피 중학교 지나면 끝이야. 사실 지금도 늦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기회가 있지.”

사실 초등학교까지 리틀 야구를 하거나 야구부에 있던 아이들 대부분은 중학 야구부로 진학을 하게 되니, 철승이나 준혁은 이미 늦은 편이었다.

물론 주니어 부에서 고등학교 야구부로 진학하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그야말로 가뭄의 콩 나듯 드물었다.

“그래? 무슨 기회?”

“너!”

“응? 나?”

“준혁이, 네가 세계 대회가 끝나고 돌아오면 주목을 받을 거란 말이야. 그러면 고등학교에서 아마 스카웃 제의가 오겠지. 그럼 나는 너의 전용 포수로 묻어가는 거야.”

“뭐야, 그게? 결국 꼽사리잖아!”

철승이의 앙큼한 꼼수에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아이들도 크게 웃었다.

준혁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웃었다.

“누구나 처음엔 그럴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그 계획대로 너는 나랑 야구를 하게 될 거야.”

유난히 반짝거리는 철승이의 눈을 보며 준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철승이의 다짐이 이루어질 것인지는 과연 두고 볼 일이었다.



***



철승이의 예상은 정확했다.

이번 대회 최우수 선수로 뽑힌 준혁은 이미 다른 야구부 감독들의 시야에 들어가게 되었고, 서서히 영입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남준혁 학생 어머님 되시나요?]

“네. 그런데 누구시죠?”

[아, 저는 지금 중학교에서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는데, 혹시 준혁 군이 세계 대회 이후에 어떻게 할지 궁금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아, 지금은 아직 결정된 것은 없는데요.”

[잘됐네요. 혹시 전학을 하실 계획이 있으시다면 저희 학교로 오시는 것은 어떤지, 고려 좀 해 주십사 연락드렸고요, 만약에 오시게 된다면 이러저러한 혜택들이…….]

이와 비슷한 전화가 하루가 멀다 하고 미래와 일권에게 걸려온 것이다.

게다가 번호는 어떻게들 알고 이렇게 연락을 하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여보?”

“글쎄, 일단 준혁이가 하고 싶다는 대로 해 주고는 싶은데, 뭐가 좋을지 몰라서 걱정이네.”

미래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일권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자기야, 민수 엄마한테 한번 물어볼까?”

“그 말 많으시던 분?”

“응. 이런 거 잘 알고 있는 것 같던데. 그리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도 했고.”

“그래? 세계 대회가 끝나려면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다음에 만나면 한번 물어보자.”

“응. 그래요.”

준혁의 진로는 아직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중학교에 진한해 이제 고작 한 학기밖에 다니지 않았는데 전학을 시킨다는 것도 그렇고, 야구로 완전히 진로를 정한 것도 아니어서 선뜻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분명히 소질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은 점도 있었다.

삐리릭.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왔습니다!”

“우리 아가, 왔어?”

온통 흙투성이가 된 유니폼을 입고 거실로 들어온 준혁이 눈썹을 찌푸렸다.

“엄마는 언제까지 내가 아가야? 중학교 간 지도 벌써 반년이 넘었는데.”

“그러게. 자기는 언제까지 준혁이를 애 취급할 거야, 도대체?”

옆에서 일권이 준혁을 거들며 괜히 시비를 걸어 대자 미래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나, 준혁이만 애 취급하는 거 아닌데? 우리 집에 애 둘이잖아. 몰랐나?”

“하하하! 그럼 내가 애 맞네. 일단 씻고 올게.”

본전도 못 찾은 일권을 보고 웃던 준혁이 화장실 앞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흙투성이 유니폼 상의를 벗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일권과 미래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오!”

“우리 준혁이, 등에 붙은 그것이 혹시 근육이라는 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르고 앙상했는데, 어느새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 그래? 등에도 근육이 좀 생겼나? 히힛.”

준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미래가 그런 준혁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일권에게 말했다.

“꿈만 같아. 언제나 약한 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저렇게 커 버리다니.”

“자기가 고생 많이 했지. 이제는 건강하게 잘살 일만 남았어.”

“그래. 너무 다행이다.”

일권이 슬쩍 어깨에 팔을 두르자, 미래는 머리를 기대며 포근하게 안겼다.

두 사람의 귓가로 준혁이 씻는 소리가 마치 기분 좋게 들려왔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국가대표팀은 주말뿐만 아니라 평일 밤에도 틈틈이 연습을 이어 갔고, 각 학교가 방학에 접어든 이후에는 평일 낮에도 구슬땀을 흘리며 특훈을 진행했다.

훈련 외에도 다른 리틀 야구팀과 연습 경기도 이루어졌고, 털보 코치가 감독으로 있는 주니어 부와도 경기를 진행하며 실력과 컨디션을 다져 나갔다.

특히 출발 일주일 전부터는 합숙 훈련을 시작해 최종적으로 점검을 마쳤다.

그런 과정들을 거치며 팀원들은 향상된 야구 실력만큼 더욱 친밀해졌고, 우승을 위한 다짐을 되새기며 하나의 팀이 되어 갔다.

걱정스럽던 치열의 부상은 검사 결과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고, 휴식과 물리치료를 통해 곧 완치되어 훈련에 합류했다.

물론 무리할 경우 재발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코치진도 그만큼 신경 써서 관리를 했다.

준혁도 이공자와 함께 세계 대회를 위한 연습을 시작하였는데, 일단 가장 먼저 한 일은 투구 거리를 줄여서 리틀 야구에 맞게 영점을 다시 잡은 것이었다.

꿈속의 구장은 리틀 야구와 달리 정식 규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예선에서도 잘하긴 했지만, 큰 싸움에서는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제일 중요한 것은 기본이며 기초다. 일단은 이 거리를 너의 몸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 제일 먼저다.”

“네, 싸부.”

마운드를 옮길 수는 없기에 이공자가 공을 받는 포수 자리를 옮기는 수밖에 옮겼다.

그 상태로 매일 50개씩 공을 던졌다.

제일 일반적인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커브와 체인지업을 중점적으로 던지며 구종을 점검했고, 투구 폼까지 확인했다.

“커브를 던질 때 팔의 각도가 달라진다. 떠올라야 하는 것은 공이지, 네 팔이 아니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

“넵! 싸부!”

“특히 체인지업의 자세를 신경 써라. 도대체 그동안 뭘 배운 거야! 이럴 거면 미국에 가지 말고 그냥 여기서 취미로 던지든가!”

“죄송합니다, 싸부! 미국은 꼭 가고 싶습니다!”

자신보다 더 열의를 보이는 사부의 모습에 준혁은 더욱 열심히 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항상 훈련이 끝나면 마사지로 뭉친 근육과 관절, 인대 등을 풀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너무 좋아요. 잠이 오네요, 사부.”

매트에 엎드려 있던 준혁이 이공자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귓가에 들려오는 시끄러운 목소리.

“육지다!”

“오오! 여기가 미국이야?”

“드디어 도착이다!”

준혁은 웅성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분명 잠들기 전에는 바다가 보였는데…….’

준혁이 몸을 일으켜 비행기 창문 밖을 바라보니, 하얀 구름 밑으로 파란 바다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리고 시선을 앞쪽으로 돌리니, 바다와 맞닿아 있는 육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이다!”

준혁도 다른 아이들처럼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