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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지역 예선 (1)



“제자 놈은 잘하고 있으려나?”

홀로 덕아웃에 앉아 있는 이공자는 제자 걱정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말아야 할 텐데, 허약한 제자 때문에 이게 웬 고생이더냐.”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이공자는 쉴 새 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문득 하늘을 보니 푸르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간다.

너무도 평화로운 모습과는 반대로 이공자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다.

“으음, 당최 앉아 있지를 못하겠군.”

다시 일어나서 서성거리다가 문득 덕아웃 뒤의 문이 보였다.

예전에도 한번 들어가 보기는 했지만, 별다를 게 없어 그리 신경 쓰지 않던 장소다.

그래도 가끔 냉장고에 있는 음료를 꺼내 마시는 것은 좋았지만.

하지만 오늘따라 왠지 신경이 쓰였다.

예전, 중원에 있을 때보다 많이 차분해지기는 했지만, 이공자의 성정은 원래 급한 편이었다.

결국 조급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성큼성큼 다가간 이공자는 벌컥 문을 열었다.

길게 뻗어 있는 복도에는 일정한 간격마다 문과 명찰이 달려 있었다.

물론 이공자가 읽을 수는 없었지만.



체력 단련실.

이 안에는 쇠로 된 이상한 기구들이 잔뜩 있다.

머리가 나쁘지 않은 이공자는 그것이 운동 기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나중에 준혁이 더 커서 필요해지면 수련에 활용할 예정이었다.



샤워실.

깨끗한 시설이 갖춰진 목욕탕.

언제나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곳이다.

준혁이 없을 때면 이공자도 가끔씩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처음 사용할 때는 많이 놀라긴 했지만, 익숙해지자 기분 내기에 좋았다.



로커룸.

말 그대로 로커룸이다.

하지만 준혁과 이공자 외의 사용자가 없기에 현재 전혀 사용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었다.



휴게실.

이곳은 휴식을 취하는 장소 같은데, 소파와 간이침대, 그리고 이공자로서는 알 수 없는 검은 직사각형 형태의 판자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평소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던 물건인데, 예민해져 있는 지금은 왠지 거슬렸다.

“이건 대체 뭐지?”

그동안은 사부로서의 위엄 때문에 차마 준혁에게 물어보진 못했지만, 오늘따라 너무도 눈에 밟혔다.

결국 검은 판자 가까이 다가간 이공자의 눈에 작은 막대기가 들어왔다.

그 위에는 단추 같은 것이 있었다.

“이건 뭐지?”

그것은 다름 아닌,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리모컨이었다.

가장 상단에는 빨간색 버튼이 덩그러니 달려 있고, 밑에는 ‘+’와 ‘-’ 부호가 그려진 버튼이 두 개씩 두 쌍, 그리고 다시 아래로 아라비아 숫자가 쓰여 있는 버튼이 있었다.

물론 용도를 알 수 없는 버튼들이 몇 개 더 있었다.

한참 동안 리모컨을 들여다보던 이공자는 빨간 단추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눌러 보라는 듯이.

그에 홀린 듯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갑자기 들려오는 환호성.

“아, 깜짝이야!”

이공자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검은 판자에서 빛이 쏟아져 나오더니,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웬 서양인들이 두 편으로 옷을 맞춰 입은 채 푸른 잔디밭 위를 달리고 있었다.

“무, 무엇이더냐? 색목인들이 왜 이 안에…….”

이해할 수 없는 장면에 잠시 당황하기도 했지만, 한참이 지나도 별다른 위험이 닥칠 것 같지는 않았다.

“흐음…….”

이공자가 한 발 앞으로 다가가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판자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고는 곧 그들이 입은 옷이 유니폼이며, 공을 차며 뛰어다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혹시 이게 준혁이가 말한 텔레비전이라는 것인가? 그리고 저것은… 축구?”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축구 시합을 시청하던 이공자는 이내 흥미가 사라진 듯 다시 리모컨을 들어 버튼을 눌렀다.

“오!”

채널이 바뀌고 새로 화면에 등장한 것은 이공자도 익숙한 장소, 바로 야구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색목인들만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엄청난 거구들이 모여서 공을 던지고 치는 광경.

바로 메이저 리그 중계였다.

“역시 색목인들이 덩치는 좋군.”

이공자는 다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웬 막대기로 바닥에 놓인 작은 공을 치는 장면이 나왔다.

당연히 이공자의 흥미를 끌기에는 부족했기에 이공자는 연신 버튼을 누르며 채널을 바꾸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공자의 눈을 끄는 장면이 들어왔다.

두 남자가 피를 흘리며 서로를 때리는 것이었다.

“오호, 무술인가? 이런 것도 나오는군. 나중에 제대로 봐야겠다.”

이공자는 잠시 곱씹더니, 이내 다른 채널로 넘어갔다.

“엇?”

그러다가 놀란 듯 손을 멈추었다.

아까 전 메이저 리그 중계 채널처럼 화면에서는 야구 경기가 보여지고 있는데, 그 대상이 어린아이들이었다.

게다가 마침 타석에 서 있는 아이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는데, 이공자도 잘 아는 얼굴… 바로 준혁이었다.

“저건? 제자 놈? 아니,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이공자는 놀라움과 함께 반가운 마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준혁이, 이놈아! 나 사부다!”



***



뉴질랜드와의 첫 시합.

1번 타자로 나선 준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심판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마운드로 시선을 돌리자, 뉴질랜드 팀의 투수가 준혁을 마주 봤다.

그런데 도저히 같은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나이를 속인 것인가? 아프리카는 가끔 그런다던데…….’

물론 이는 준혁의 착각에 불과했다.

현재 대한민국 중1의 평균 신장은 대략 159㎝.

또래보다 다소 작은 준혁은 155㎝였지만, 상대 팀 투수는 적어도 20㎝는 더 커 보였다.

게다가 리틀 야구 특성상 투수와의 거리가 조금 더 짧기에 더욱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곧 심판의 신호가 떨어지고, 마운드의 거구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와인드업을 한 후, 온 힘을 다해 공을 던졌다.

퍽!

포수의 미트에 날아와 박히는 공을 보고 준혁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준혁의 반응을 확인한 투수의 입가에 슬쩍 웃음이 걸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준혁은 잠시 타임을 부르더니, 타석 밖으로 나와 방망이를 휘둘러 보았다.

생각하고 있던 타이밍을 다시 수정한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런 점을 알아차리지 못한 포수가 타석에 들어선 준혁에게 황당한 말을 건넸다.

“우리 투수 공 빠르지? 웬만해선 치기 힘들걸?”

물론 영어라서 준혁은 알아듣지 못했다.

“뭐래?”

하지만 왠지 비웃는 느낌만큼은 제대로 받았다.

‘이놈도 맘에 안 드네.’

다시 투수를 바라보는 준혁.

아마도 자신의 공에 자신이 있으니 다시 한번 빠른 공을 던지려고 하겠지.

서서히 와인드업을 하는 투수의 모습에 준혁은 마음속으로 타이밍을 쟀다.

마침내 투수가 힘껏 공을 뿌리자, 겁이 없는 건지, 자신이 넘치는 건지, 조금 전의 코스 그대로 들어온다.

준혁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체의 힘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상체만으로 공을 던지는 멍청이 같으니라고. 우리 사부한테 배웠으면 넌 이미 맞아 죽었을 거다!’

순간, 준혁의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 둘, 하나 쉬고… 원래의 타이밍보다 한 박자가 추가됐다.

‘느려! 느려도 너무 느려!’

공이 홈 플레이트에 도착할 무렵, 차분하게 기다리며 공을 노려보던 준혁이 눈을 빛냈다.

셋!

빠르게 돌아가는 배트와 함께…….

까앙!

자신 있게 웃던 투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투수의 머리 위를 지나 쭉쭉 날아가는 하얀 야구공.

모두의 시선이 공을 따라 담장 밖으로 넘어갔다.

이번 대회의 첫 홈런!

“와아아!”

대한민국의 덕아웃에서 예상치 못한 준혁의 홈런에 힘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뭐야?! 홈런이다!”

“와! 대박! 달려라!”

관중석에서 응원하던 부모님과 관계자들에게서도 탄성과 환호성이 흘러나왔다.

“여보, 준혁이가 홈런 쳤어! 역시 내 아들!”

“꺄아! 남준혁! 우리 아들 최고다!”

흥분한 일권과 미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로 부둥켜안으며 소리를 질러 댔다.

주위의 다른 학부모들도 함께 환호성을 내지르며 대한민국 선발팀의 선취점을 기뻐해 주었다.

“역시 우리 아들이 최고야. 그렇지, 여보?”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는 일권이 베이스를 돌고 있는 준혁을 보며 물었지만, 미래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보, 응?”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있는 미래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일권도 코끝이 찡해 왔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는가.

몸이 약한 아들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마냥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온 미래였다.

태어났을 당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던 준혁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랬던 아들이 지금 저 앞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그라운드를 돌고 있다.

결국 기쁨과 슬픔이 함께 뒤섞인 눈물이 미래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울지 마, 여보. 이제 준혁이는 아프지 않을 거야.”

그런 미래를 일권이 가만히 안아 주었다.

“응, 안 울어. 기뻐해야지. 좋아서 그래.”

미래가 일권의 티셔츠에 얼굴을 닦았다.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걸 닦으면…….”

“내가 산 옷이잖아. 닥쳐.”

“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리.

두 부부는 기분 좋게 웃으며 준혁의 홈런을 기뻐했다.



***



“훗, 녀석, 제법이군.”

이공자가 준혁의 홈런 장면을 보며 대견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오늘은 칭찬을 해 줘야겠네.”

기쁜 모습으로 그라운드를 돌고 있는 준혁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저런 느린 공을 보고도 자신의 타이밍을 바로 수정하다니. 수련의 효과가 좋았어.”

홈런은 당연한 결과였다.

만약 치지 못했다면 수련의 강도를 올리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위기에서 벗어난 준혁이었다.

[대한민국의 첫 타석을 홈런으로 장식한 남준혁 선수!]

[네. 제법 빠른 공이었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스윙을 했어요. 대단한 선수예요.]

[정말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되네요. 이렇게 한 점 앞서 가는 대한민국입니다!]

보통 리틀 야구 같은 시합은 중계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대회의 경우, 한국 내에서 치러지는 대회이기에 한 케이블 방송사에서 중계를 맡아 지금처럼 방송이 가능한 것이었다.

아나운서와 해설자의 목소리를 듣던 이공자가 중얼거렸다.

“저게 빠른 공이라니, 아무리 애들이라고 해도 너무 추켜세워 주는데.”

이공자는 눈높이 교육이라는 것을 몰랐다.



***



덕아웃으로 들어온 준혁에게 코치진과 선수들이 달려들어 축하를 해 주었다.

“짱이다, 준혁아!”

“아싸! 쟤네들 별거 아니잖아!”

투수의 큰 덩치에 약간 눌려 있던 아이들이지만, 준혁의 홈런으로 자신감이 생긴 듯했다.

“잘했다, 준혁아. 저 투수도 나름 잘하는 선수라던데 시작이 좋네.”

감독도 다가와 준혁을 격려해 주었다.

팔꿈치 보호대를 분리하고 있던 준혁은 자신의 감상을 밝혔다.

“저놈, 보기보다 공이 느려요. 별거 아닌 것 같아요.”

“응? 그래?”

“더군다나 나무도 아니고 알루미늄 배트인데, 전혀 문제가 안 돼요.”

‘아닌데, 빠른데…….’

준혁의 말에 감독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그대로 믿어 버렸다.

별것 아닌 투수.

대회 첫 경기라는 중압감에 약간 위축된 아이들의 마음이 풀어졌다.

그 효과로 1회부터 대한민국의 타선이 폭발했다.



첫 타석부터 홈런을 맞은 뉴질랜드의 투수는 멘탈이 흔들려 버렸다.

덕분에 한국 팀은 다음 두 타자의 연속 볼넷과 4번 타자의 적시타로 2점을 추가했다.

그 이후, 투수가 다시 심기일전하여 타자 한 명을 잡아냈지만, 이미 점수 차는 3점으로 벌어진 뒤였다.

결국 1회에 투구 수가 40개에 가까워지자, 뉴질랜드의 코치진은 투수를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투수를 모레 경기에는 다시 마운드에 올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리틀 야구의 투구 수 제한 때문인데, 아직 어린 선수들을 엄격하게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규정에 따른 조처였다.

하지만 다음 투수도 역시 점수를 허용했고, 결국 7점을 따내면서 대한민국의 1회 공격이 마무리됐다.

첫 회부터 빅 이닝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드디어 공수 교대와 함께 대한민국의 1회 말 수비가 시작됐다.

“자, 가자!”

파이팅을 외치며 그라운드로 달려 나가는 아이들 사이로 자신의 글러브를 챙긴 준혁도 마운드에 올라섰다.



***



“좋아, 이제 내 제자가 던지겠군. 진짜 투수가 무엇인지 보여 줘라.”

중얼거리던 이공자는 목이 타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 구석으로 갔다.

그러고는 하얀색 네모 상자를 열자 차가운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어휴, 차라리 내가 직접 하는 것이 낫지, 제자 놈 하는 것을 보려니 불안해서 목이 타는군.”

역시 이공자에게는 바라보고 응원하는 것이 더욱 힘든 듯했다.

익숙한 듯 냉장고에서 차가운 콜라 캔을 꺼낸 이공자가 한 모금을 마신 후, 다시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왔다.

“자, 제대로 실력을 보여 줘라, 제자야.”

마운드에 올라선 준혁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