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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야구의 정석 (2)



일단 준혁은 눈앞의 교본을 이용하기로 했다.

눈앞에 엄연한 교재가 있는데 활용 안 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닌가.

“그 책을 보면 아저씨한테 야구가 무엇인지 설명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비급을 보여 달라고? 그럴 수는 없다.”

준혁의 말에 기겁하며 비급을 등 뒤로 숨기는 이공자.

은근 소심하고 욕심 많은 모습에 준혁은 다시 웃음이 나며, 일단 살살 달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야구에 대해서 알려 드릴 수가 없어요. 저도 야구를 잘 아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 비급을 보면서 설명해야 됩니다.”

물론 대충은 알고 있지만 자신 있게 설명할 정도는 아니고, 아무래도 비급 안에 담긴 내용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공자를 살짝 속이기로 했다.

뭐, 이 정도는 속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망설이는 이공자.

“설마 저에게 그 책을 뺏길까 봐 걱정하시는 거예요? 저같이 힘도 없고 약한 꼬마한테?”

도발.

물론 너무 식상한 방식이라 먹힐 리 없지만, 그래도 준혁은 한번 시도해 봤다.

그리고… 제대로 먹혔다.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그래. 어디, 필요하다면 보거라. 네깟 놈이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근데 영화에서 보던 거랑 은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의 이공자는 좀 더 잔인하고 비열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성격이 급하고 무식할지언정 어딘가 순진한 느낌이 살살 들었다.

준혁은 일단 이공자가 건네준 비급을 받았다.

그런 후, 첫 장을 넘기자 들어오는 소제목.



『기본편』



“응?”

“왜? 뭐라고 적혀 있는 것이냐?”

“아저씨, 혹시 이 비급 말고 다른 비급이 또 있어요?”

난데없는 준혁의 물음에 이공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없는데. 그 한 권이 전부다. 왜 그러느냐?”

“그런가요? 일단 여기에는 기본편이라고 적혀 있어요. 그래서 혹시 응용편이라든가 심화편이라든가 하는 다음 권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 어디 보자.”

준혁이 들고 있는 비급 위로 고개를 내밀어 확인하는 이공자.

그의 눈에 네모반듯한 느낌의 글씨가 들어왔다.

사실 수도 없이 본 글자라 눈을 감고도 따라 그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역시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그렇군. 하지만 다른 책에 대한 내용은 듣지 못했다. 그 한 권뿐이라고 들었어.”

이공자의 말에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럼 일단 다음 장으로 넘어갈게요.”

준혁은 기본편이라고 적혀 있는 장을 넘겼다.

먼저 눈으로 대강 훑어보니 왼쪽 상단에 ‘야구란?’이라는 소제목이 나와 있고, 야구에 대한 기본 개념과 역사, 간단한 개요 등이 적혀 있었다.

“이 책은 차례가 없네요. 일단 지금 여기는…….”

설명을 하려다가 잠시 멈추는 준혁.

“…왜?”

둘의 얼굴이 묘하게 가까워지며 이공자의 숨결이 느껴졌다.

‘으, 이건 아니지.’

준혁이 얼른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이공자는 큰 덩치를 잔뜩 웅크린 채 책을 향해 온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좀 떨어져 주시겠어요? 제가 책을 볼 수 없잖아요.”

“응?”

그제야 자신의 실태를 인식한 이공자.

아무리 궁금증이 커서 그랬다지만, 명문세가의 자제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저씨를 위해서 제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방해하시면 안 되잖아요.”

“아, 알았다. 미안하군.”

이공자는 지금의 상황이 묘하게 거슬렸지만, 일단 주도권을 잡고 있는 쪽은 준혁이기에 가만히 참기로 했다.

사실 준혁이 이렇게 뻗댈 수 있는 것도 이 모든 게 꿈이라는 생각 때문에 가능했다.

평상시 약간 소심한 편인 준혁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자, 그럼 야구란 무엇인지 설명하는 부분이니까 알려 드릴게요. 그리고… 아, 쫌!”

“아아, 미안. 떨어질게. 미안하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이민 이공자.

결국 한차례 핀잔을 듣고 난 뒤에야 제대로 된 설명이 이어졌다.

“야구는 한편에 아홉 명의 사람이 서로…….”



“…이상 여기까지가 야구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었습니다. 다 이해하셨죠?”

“응? 그, 그래. 그런 것 같구나.”

“흠, 저도 완전히 이해했어요.”

준혁과 뿌듯하다는 듯 말을 마친 순간, 갑자기 서책에서 불이 타올랐다.

“으악!”

“엇! 이게 왜 이러느냐?”

준혁은 너무 놀라 주저 없이 책을 던져 버리며 뒤로 물러났다.

툭.

“야, 이놈아! 그걸 함부로 던지면 어떻게 하느냐?”

그에 당황한 이공자는 부리나케 달려가 망가지지는 않았는지 조심스레 비급을 들어 올렸다.

다행히 불은 금방 꺼져 큰 이상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비급을 잠시 살펴보던 이공자가 준혁에게 책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 우리가 읽던 부분이 사라진 것이 맞지?”

“그, 그런 것 같아요.”

준혁이 놀라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생긴 거지? 아, 혹시 저희가 그 부분을 다 익혀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어? 그렇군. 그런 거야. 하하하! 드디어 이 비급의 비밀이 하나둘 밝혀지는구나.”

이공자가 보기에도 준혁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몇 백 년 묵은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 비급의 내용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다면!’

마음이 급해진 이공자가 고개를 돌려 준혁을 바라보며 재촉했다.

“자!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자, 꼬마야!”

어엇?

한데 그 순간, 이공자의 눈에 준혁이 스르르 쓰러지려는 것이 보였다.

“꼬, 꼬마야! 왜 그러느냐?”

얼른 다가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쓰러지려는 준혁의 어깨를 붙잡은 이공자는 눈이 감기려는 준혁을 바라보며 걱정되는 듯 물었다.

“너, 너무… 졸려요. 잠을 참을 수가 어, 없…어…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늘어뜨리며 잠에 빠져드는 준혁.

동시에 이공자의 손아귀에서 준혁이 사라졌다.

“뭐야! 어디로 사라진 거야!”

홀로 남겨진 빈 공간에 당황한 이공자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



“하암~ 잘 잤다.”

커튼 사이로 밝은 빛이 스며 들어오고 있다.

“으응?”

평상시처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준혁은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생생한 꿈이 있다니.

기억을 되짚어 보니, 마냥 꿈이라고만 치부하기엔 뭔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준혁이 아직 안 일어났니? 얼른 나와서 아침 먹고 학교 가야지.”

그때, 부엌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준혁은 일단 꿈에 대한 것은 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와 얼핏 부엌을 살펴보니, 역시나 아직 식탁 위는 깨끗했다.



***



눈앞에서 꼬마가 사라졌다.

이공자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비급을 얻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절벽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급을 잡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처음 아무도 없는 새하얀 공간에 떨어졌을 때,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조용히 저승사자를 기다리는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공자는 인내했다.

괜히 소란을 피웠다가는 어떤 불이익이 생길지 몰라 조용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우연히 비급이 눈에 들어왔다.

“허, 저것이 나를 따라온 것인가? 혹 죽음에 대한 선물인가?”

이공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비급을 집어 들었다.

비급의 존재는 가문 안에서도 극비였기 때문에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도무지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은 어찌어찌 전해 들었다.

하지만 비급을 회수한다면 형님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란 희망에 물불 가리지 않고 몸을 날렸다.

비록 이렇게 죽어 버리고 말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혹시나 내용을 알 수 있을까 하여 비급을 펼쳐 보았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이대로 저승사자를 만나 모든 것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다렸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타나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몇 백 년의 시간이 흐르고,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순간.

비급을 해석하는 꼬마가 나타났다.



꼬마가 말해 준 야구라는 것.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그런 것을 왜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다 익히고 나면 혹시 무슨 변화가 나타날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비록 꼬마의 모습이 사라지긴 했지만,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마냥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와, 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전날 본 꼬마가 어느새 다시 나타났다.

반가웠다.

굉장히 반가웠다.

이공자는 꼬마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잠을 깨우기 위해 어제처럼 발을 들었다가 살며시 다시 내렸다.

“음, 그래도 계속 발로 깨우긴 그렇지.”

전날, 단칼에 베어 버리려고 한 것은 어느새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이공자였다.

이공자는 준혁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레 흔들었다.

“꼬마야, 일어나라. 이제 일어날 시간이다.”

“으응…….”

좀체 눈을 뜨지 않고 뒤척이기만 하는 모습에 이공자는 좀 더 힘을 주어 준혁을 흔들었다.

“얘야, 일어나라.”

“아! 또 뭐야…요?”

짜증을 내려던 준혁의 눈에 이공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뭐야? 이 아저씨, 기분 나빠.’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이공자의 모습에 준혁은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던 말이 흘러나왔다.

“또 이 아저씨 꿈이네. 아, 기분 안 좋아. 몸이 허해졌나?”

급기에 손으로 이마를 만지면서 자신의 몸을 살폈다.

이공자는 기가 막혔다.

누가 감히 자신의 앞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했는데, 눈앞의 꼬마는 아예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반가운 것은 반가운 것이고, 부아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이런 놈을 반가워했다는 사실조차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네 이놈!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는 이공자의 모습에 준혁은 그제야 움찔 놀랐다.

꿈이라는 생각에 겁 없이 깐족거리기는 했으나, 원체 기가 약한 편이라 이내 꼬리를 내렸다.

“…죄송해요, 이공자님. 그냥 생각만 한다는 것이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와 버렸어요.”

하지만 준혁의 말을 들은 이공자는 자신을 놀린다는 생각에 오히려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태가 나쁘게 흘러간다는 것을 눈치챈 준혁이 빠르게 다음 말을 이었다.

“자자, 비급 어디 갔어요? 해석해 드릴 테니, 어서 익히셔야지요.”

“흥!”

“우리 진도가 너무 늦어요. 빨리 가져오세요. 어서!”

“…알았다. 잠시 기다려라. 가져올 테니.”

좋아, 자연스러웠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준혁에게 이공자가 비급을 내밀었다.

“여기 있다, 꼬마야.”

“네. 그럼 야구의 개념에 관해서는 어제 배웠으니, 오늘은 그다음 장을 볼게요.”

“잠깐. 궁금한 것이 있다.”

준혁이 책장을 넘기려 할 때, 이공자가 잠시 말을 끊으며 물었다.

“우리 문파, 아니, 우리 팀이라 했지? 암튼 공이라고 불리는 암기를 우리 편과 주고받는 동안 상대팀이 그것을 못 잡게 몽둥이로 방해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 뭐, 그런 것 같네요.”

자기 마음대로 룰을 이해해 버린 이공자의 말에 이런 식으로도 클리어가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일단 넘어가자.

“그리고 몽둥이로 암기를 때려냈을 때, 그것을 다시 우리 편 아홉 명 중 한 명이라도 잡으면 죽는다고 했고.”

“그렇지요.”

“너무 불공평하지 않느냐?”

“네?”

“사방도 아니고… 한 방향으로만 쳤을 때, 그것을 못 잡는 멍청이가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특히 이 비급을 익힌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이공자는 처음 같은 인원수로 대결을 벌인다는 점에서 생각보다 공평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듣고 보니 이상했다.

9대 9의 싸움이 아니고, 9대 1의 싸움이었다.

이건 수비하는 쪽이 유리해도 너무 유리했다.

특히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이라면 더 그렇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알 리가 없는 준혁은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음, 우리가 개략적인 부분만 읽어서 그럴 거예요. 일단 다음 편을 더 보면서 이야기해 보죠. 마침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다행히도 다음 챕터는 야구의 전체적인 룰에 관한 설명이었다.

준혁이 책장을 펼치며 제목을 읽었다.

“야구의 룰과 기초 이해.”

그 말을 하는 순간, 갑자기 책에서 밝은 빛이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이, 이게 다 무엇이냐?”

“이것은!”

아무것도 없이 두 사람만 덩그러니 있던 하얀 공간에 아름답고 거대한 야구장이 생겨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