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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십수 년의 시간을 단숨에 거스르는 눈부신 미소에 인애는 잠시 머뭇거렸다. 정혼 이야기가 흘러나온 이후로 그가 인애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적은 없었다.

오랜만에 그와 근거리에서 마주한 탓에 착각한 것일까?

그의 미소가 왠지 모르게 친근하고 살갑게 느껴졌다.

착각이겠지.

기자가 붙은 줄 알고 긴장했다가, 10년 전 얼치기를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랜만이네요.”

인애는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망가졌네.”

그는 화면이 완전히 박살 난 휴대전화를 건네며 여상한 목소리를 냈다. 세월이 무색할 만큼 자연스러운 그의 태도는 인애를 더욱 당황스럽게 했다.

인애는 아무런 대꾸 없이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

“잘 지냈어?”

인애는 천천히 시선을 끌어 올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등 뒤로 다홍빛 노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배경이 가진 색감 탓인지 그의 질문이 어쩐지 따스하게 느껴졌다.

“네, 잘 지냈어요.”

하지만 형식적인 물음인 것 같아서, 인애는 그에 상응하는 형식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때론 공간을 둘러싼 색감이 분위기를 착각하게 만들기도 하는 법이니까. 아마도 세상을 따뜻하게 물들이는 노을빛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따뜻하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갤러리에서 일한다고?”

그의 어조에서 부정적인 분위기가 희미하게 묻어났다.

재벌가에 속해 있지만, 인애는 드물게 원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것은 자유를 뜻하기도 하지만 저들의 세계에는 낄 수 없다는 배척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들은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성안에서 생활했고, 전혀 이타적이지 않았다.

성 밖에서 생활하는 이들과 자신들은 다른 종이라고 생각하는 족속이다. 특히 자신들과 같은 성안에 머물면서 자유의 낭만에 물든 이들은 증오한다.

인애 같은 사람.

개성을 죽인 채로 부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마리오네트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재벌가 자제들과 달리, 인애는 스스로가 프리즘이라도 된 것처럼 총천연색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인애를 대할 때, 증오와 부러움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그는 재벌가에서 태어나 왜 그러고 사느냐는 한심함이 담긴 물음이 아닌, 원인을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섞인 물음을 던졌다.

“네, 갤러리스트로 일하고 있어요.”

인애는 의아한 마음을 숨기고 연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꾸했다. 심장은 빠르게 뛰어 댔고, 그만큼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우왕좌왕하며 속을 드러내던 10대 소녀는 타들어 가는 속내는 감추고, 우아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스물일곱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거 큐레이터랑 비슷한 건가?”

“큐레이터는 박물관 혹은 미술관에서 일하는 학예사고요. 갤러리스트는 갤러리에서 일하고요.”

“뭐가 달라?”

그의 물음에서 순수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큐레이터와 갤러리스트를 구분하지 못할 사람이 아닌데.

그가 내비치는 호기심의 방향이 어느 곳을 향해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인애는 솔직하게 답하는 쪽을 택했다.

“갤러리스트는 미술 시장을 움직이는 사람들이죠.”

시장을 움직인다는 것은 돈의 흐름에 따른다는 것이다.

“나랑 비슷한 일을 한다는 건가?”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그는 이설 그룹의 전무와 이설 자동차의 대표 이사직을 맡은 경영인이었고, 기업 경영의 목적은 이윤 추구다. 그러니 이윤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거냐고 묻는 거였다.

인애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의문이 떠올랐다. ‘비슷한’이라는 말이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불편했다.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죠.”

“시장을 움직이는 사람이라……. 시장은 돈으로 움직이는 거잖아, 그렇지?”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 같지는 않아서 인애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의 눈동자는 갈색과 진회색의 수채화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투명하면서도 깊었다. 엄격하고 진지해 보이지만, 순수한 소년미가 느껴지는 것은 저 눈동자 때문일 것이다.

“그럼 이해가 더 쉽겠네.”

그는 마치 인애에게 이해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이해할 수 없는데, 이해가 더 쉽다?

“가 봐야겠다. 또 보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물으려는 순간, 그가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가는 데까지 데려다주고 싶은데, 내가 회의가 있어서. 조심히 가.”

두 사람의 관계를 되짚어 보건대, 지나치게 다정한 작별 인사일 수도 있지만, 그저 예의상 꺼낸 말일 가능성이 더 컸다.

“저도 차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인애는 산뜻한 미소를 머금으며 선을 긋듯 대꾸했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좁혀진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또다시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

‘자는 사람 얼굴에 무슨 짓을 한 거야?’

가슴 떨리던 그 순간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을 때 짓는 표정일 것이다.

“운전을, 직접 해?”

한 박자 끊으며 묻는 그의 어조에서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기사도 없이 혼자 다니냐는 질문이었다.

“네, 제 월급이 기사 부릴 정도는 아니어서요.”

그가 한쪽 눈썹만 쳐올리며 인애를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고생이 많겠는데, 앞으로?”

그의 어조는 타인의 삶에 대한 막연한 짐작이 아닌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꽤 자세한 예측에 가까웠다.

“운전을 꽤 잘하는 편에 속해서, 고생이랄 건 없는데요?”

윤씨 집안 가계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신효와 결혼하기도 전에 다정한 형부 노릇을 하려는 것은 아닐 테고.

지나친 참견이 녹아 있는 그의 어조가 어쩐지 불편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내내 평정을 유지하던 인애는 딱딱한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그리고 문득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고백 한 번 한 게 무슨 중죄인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정글처럼 얽히고설켜서, 결혼하고도 다른 이성과의 관능적 관계를 끊지 못하는 습성을 지닌 이들이 많았다. 재벌가의 혼맥도는 결혼 당사자 간의 진정한 사랑이 아닌, 금전적 이득에 따라 움직이기에 그러한 관계들이 묵인되고,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인애는 뼛속까지 그들과 다른 사람이었기에 수치심과 묘한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 불순하고, 불건전한 관계가 난잡하게 이어지는 곳에서 순수했던 고백 한 번으로 주눅이 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의도를 알 수 없는 그의 친근한 태도가 거슬린 나머지, 과거의 일은 자연스레 흐릿해지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묘한 반감이 일기 시작했다.

“운전을 잘한다고?”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인애는 대답 대신 그를 빤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앞으로 나 노려볼 일 많을 것 같은데, 지금부터 그러면 힘 빠져서 고생스러울 거야.”

그렇지, 그가 모를 리 없지.

신효와 결혼하게 되면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될 거라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그렇죠? 그럼, 최휘욱 씨가 저한테 운전을 잘하냐, 이해가 더 쉬울 거다, 뭐 그런 말 하는 거 아이러니한 것도 아시겠네요?”

그가 피식 웃었다.

“최휘욱 씨?”

그가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단어인 것처럼 발음했다.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얼굴을 붉히던 시절만 해도 그를 꼬박꼬박 오빠라고 불렀었다.

“형부라고 불러 드려요?”

그는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내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또 보자.”

그는 ‘또 보자’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전형적인 작별 인사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가 떠난 자리엔 다홍빛 노을에 물든 세이지 향이 맴돌았다.



***



모퉁이 너머에서 조용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휘욱은 본능적인 불길함에 발걸음을 옮기면서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했다.

기자가 따라붙은 거면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얼마나 쥐여 줘야 할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엿듣고, 엿본 이의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자마자 발견한 사람을 마주했을 때, 휘욱은 하마터면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형부라고 불러 드려요?’

그녀는 고까운 질문을 맹랑하게 잘도 던졌다. 휘욱이 한정식집 앞에서 먼저 들여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보지 못한 것이 확실해 보였다.

의미심장한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데도, 그녀는 황망한 얼굴만 하고 있었다.

휘욱은 성큼성큼 걸어서 한정식집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안채에 모셨습니다.”

지배인이 다가와 정갈한 음성으로 휘욱을 안내했다. 안내에 따라 식사실 앞에 선 휘욱은 지배인을 향해 선선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식사는 30분 후에 한꺼번에 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30분간은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지배인은 믿음직한 얼굴로 긍정의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물러섰다. 마당 저편까지 멀어진 지배인의 뒷모습을 확인한 휘욱은 그제야 식사실 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기자가 붙은 것 같아서,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수행 비서, 운전기사도 모두 물리고 당사자들만이 은밀하게 만나는 자리였다.

“기자가 붙었다고?”

마주 앉은 윤동혁 교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안심하십시오. 기자는 아니었습니다.”

당신 딸이었다는 말을 하면, 윤 교수가 곧 기절할 것 같은 분위기여서 휘욱은 길고양이의 기척이었다는 말을 대신했다.

“사람 참, 길고양이한테도 신경 쓸 정도로 오늘 일이 신경 쓰이나 보군.”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휘욱은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대꾸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윤 교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연하게 우러난 작설차가 담긴 잔을 집어 들었다. 맑은 차를 한 모금 넘긴 윤 교수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가 원한다는 조건이 뭔가?”

윤 교수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진중했다. 휘욱은 감정 한 자락 묻어나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따님, 윤인애 양과의 결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