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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두부 9화

1. 열일곱 봄 (9)





<2006. 04. 08. 토요일>

짝사랑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었다. 연두는 수호를 볼 때마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열두 살 때 아버지 방에서 제목이 쓰여 있지 않은 비디오테이프를 본 날처럼 정신을 못 차렸다.

수호가 옆자리라 좋았지만 무섭기도 했다. 혹시라도 제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들키진 않을까 연두는 내도록 마음을 졸였다.

수호가 웃을 때면 마음이 다 녹은 아이스크림이 되는 것 같았다. 수호가 두부야, 하고 자길 부를 때면 두부 한 모를 통째로 삼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수호의 눈을 쳐다볼 때도 있었다. 접혀 있는 오른쪽 쌍꺼풀이 얼마나 예쁜지 그 위에 입을 맞추는 망상도 했다.

매일이 솜사탕 위를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이 금방 지났다. 내일은 소풍날이었다. 연두는 수호의 사복 차림을 본다는 생각에 일요일 오전부터 실없이 웃고 다녔다.

연두는 사실 소풍을 가고 싶었던 적이 없다. 어차피 가 봐야 혼자 있었다. 김밥을 예쁘게 싸 줄 사람도 없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억지로 가다가 중학교부터는 아버지도 아프고 해서 자발적으로 안 갔다. 소풍을 안 가고 학교에 남아 보충을 듣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지금까지는 그랬는데, 열일곱 봄 소풍은 얼마나 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할매. 나, 혹시 돈 좀 주면 안 돼요?”

연두는 알바가 끝나고 고기 냄새를 교복에 잔뜩 묻혀 돌아왔다. 할매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주저하던 연두가 살며시 입을 뗐고, 손주를 기다리며 오밤중까지 패를 띠고 있던 할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 크도록 용돈 달란 소리를 한 번도 안 하던 손주였다.

“먼 돈아.”

“거시기, 패밀리 랜드로 소풍 간다 한디…….”

할매는 손주가 항상 짠했다. 자신이야 다 늙어빠졌고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지만, 불여시같은 자기 손주가 가난 때문에 일찍 철이 든 게 항상 마음에 걸렸다.

“쯧…… 얼마 한다든?”

“3만 원.”

“오메. 먼 놈의 소풍비가 그라고 비싸대.”

“아니여. 안 줘도 돼…….”

풀죽은 연두를 할매의 탁한 눈이 훑어 내렸다. 짠한 것……. 할매는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어 안쪽의 쌈지 주머니를 꺼냈다. 강가네로 시집 올 때 아저씨에게 선물 받은 주머니는 멀쩡한 곳보다 바느질로 기워 놓은 곳이 훨씬 많았다.

“아나.”

할매가 꼬깃꼬깃한 초록색 세종대왕 세 장을 꺼내 연두에게 쥐여 주었다. 연두는 얼마나 기뻤는지 할매를 껴안고 퍼석한 볼에 뽀뽀를 하고 난리였다. 할매는 “오메, 오메. 왜 이런다냐.” 하며 괜히 싫은 척을 했다.

월요일은 꿈에 그리던 소풍날이었다. 연두는 가진 옷 중 가장 깨끗한 옷을 골라 다림질을 하고, 신고 갈 운동화도 미리 깨끗이 닦아 놓았다.



<2006. 04. 09. 일요일>

연두는 주말 7시 반이면 마음이 급했고, 연두의 아버지는 일요일 오전이 되면 마음이 급했다. 일요일 아침 9시는 그가 예배당에 가는 시간이었다.

간암 3기 진단을 받은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아버지는 한 의사를 만났다.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꺼내 준 사람이었다. 항암도 수술도 받지 않고 그대로 죽으려던 그를 의사가 위로했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안 씨 성을 가진 남자는 자신과 총회장님을 믿고 따르기만 한다면, 암 덩어리 같은 하찮은 고난은 무소불위의 권세로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난과 고통으로 지쳐 있던 아버지는 그 의사를 맹목적으로 따랐다. 그의 말을 믿고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항암 치료를 받았다. 예배당에도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믿는 총회장님을 믿기 시작했다.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연두의 아버지에게 있어 총회장님은 말 그대로 신이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었다. 그의 능력은 보혜사 성령의 육으로 오신 총회장님만이 받을 수 있는 진정한 권능이었고, 아버지는 큰 은혜를 입어 간암을 선고받았음에도 벌써 3년이나 살아 있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연두의 아버지는 시체처럼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도 성경 구절을 줄줄 외웠다. 구절을 외우는 입에서는 역겨운 단내가 풀풀 풍겼다. 가족 중 딱 한 명만이라도 예배당에 함께 나가 기도로 봉사하면 이 썩어 죽을 암 덩어리도 사라질 텐데, 사탄 마귀와도 같은 가족들은 총회장님의 은혜를 거부했다.

주제도 모르는 것들.

그나마 내가 기도하고 헌금을 해서 이만큼 살고 있는 거지, 내가 아니었으면 이미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졌을 기생충 같은 것들. 그는 속으로 생각하며 말씀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자신의 어미는 한 번인가 함께 갔다가 영 못 쓰겠다며 따라오지 않았다. 1920년에 태어나 아흔이 다 되어 가는 노모는 고된 인생으로 노망이 든 게 분명했다. 불손한 신자를 데려가 봐야 총회장님의 노기만 돋울 것 같았다. 그래서 일찍이 포기하고 자식새끼라고 하나 있는 연두를 데려가려고 했더니 노모가 하루라도 애 좀 쉬게 놔두라며 손사래를 쳤다.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노모가 죽으면 그때라도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래. 그 둘은 그렇다 쳐도 보도방에서 만난 연두 애미는 천벌을 받을 년이었다. 제 서방이 죽든 말든 몸이나 파느라 예배당에도 안 나오는 빌어먹을 년.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쳐 자고 있는 연두의 엄마를 보고 그는 창자 깊은 곳에서 소리를 끌어올려 씨벌년, 하고 욕을 뱉었다. 그리고 그는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양복을 꿰입고 두둑한 헌금 봉투를 가지고 집을 나섰다.



***



연두의 심장이 콩콩 뛰었다. 연두는 고이고이 아껴 두었던 용돈으로 미용실에 다녀왔다. 자꾸 앞머리가 짧아지는 바람에 거울에 비치는 제 얼굴이 어색했는데, 미용실 아줌마가 인물이 훤하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해 줘서 기분은 좋았다. 마지막에는 고데기까지 해 주었다. 머리가 차분해지니 좀 잘생겨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멋을 부리는 김에 렌즈도 껴 보고 싶었다. 들뜬 마음에 안경점에도 잠깐 들렀는데 렌즈는 너무 비싸서 엄두가 안 났다. 결국 빈손으로 뒤돌아 나왔다.

집에 돌아오자 할매가 머리가 동그라니 예쁘다며 자꾸 쓰다듬었다. 어쩐 일로 일찍 일어난 자신의 엄마도 예쁘다며 엉덩이를 몇 번 두들겨 줬다.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옷도 골랐고, 신발도 닦았고, 짧은 머리도 보다 보니 괜찮았다. 엄마랑 할매랑 연두랑 셋이 나란히 앉아서 김밥도 말았다. 아버지 드릴 두 줄은 상에 올려놓고, 내일 가져갈 김밥 재료는 냉장고에 미리 준비해서 넣어 놨다.

앞으로 열두 시간 후면 소풍이었다.

엄마가 김밥으로 배를 채운 후 화장을 하고 빼딱 구두를 신었다. 저녁이었고 출근을 하기 위해 이제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밖에서 문이 열렸다.

눈은 노랗고 얼굴은 벌건 아버지였다. 술냄새가 진동을 했고, 엄마의 눈이 공포로 물드는 건 아주 순식간이었다.

“이 시벌 년!”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은 아버지가 엄마의 뺨을 갈겼다. 구두를 신고 있던 엄마가 힘없이 현관에 철푸덕 쓰러졌다. 어디서 나온 용기였을까. 아마 최수호에게서 비롯된 용기였을 거다. 연두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빠에게 욕을 했다.

“씨발! 엄마 때리지 마.”

“뭐라고? 강연두, 니 시방 뭐라 그랬냐?”

“엄마 때리지 말라고!”

수호처럼 많은 사람들의 구타를 막아 줄 순 없어도 아버지 하나는 막아 주고 싶었다. 옅은 눈썹을 찡그리며 일어나는 예쁜 서양 아줌마를 단 한 번이라도 지켜 주고 싶었다. 자기를 감싸던 최수호처럼.

“니가 느그 아부지한테 쳐 맞은지 오래 됐제잉!”

한 사람 정도는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완벽한 착각이었다. 두꺼운 손바닥이 연두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하고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신이 희끄무레했다. 얼마나 맞았는지,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기억이 안 났다. 폭력이 햇발처럼 연두의 몸에 쏟아졌다. 맞을 때마다 눈앞에 불이 번쩍번쩍했다.

그 와중에 엄마를 때리지 못하게 하려고 엄마의 등을 감싸 안은 바람에 연두는 두 사람 몫을 맞았다. 할매가 니 새끼 죽는다며 소리소리 지르며 울었다. 배 한가운데를 맞았을 때는 오줌까지 찔끔 나왔다.

그렇게 한 시간이 족히 넘게 맞았다. 연두는 이러다 정말 죽을까 봐 무서웠다. 결국 아버지의 정강이를 붙잡고 있는 힘껏 깨물었다. 아버지의 바지에 피가 밸 정도로 세게 깨물었고 덕분에 아버지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연두는 발에 채이는 신발 중 아무거나 하나 골라 신고 집에서 뛰쳐나왔다.

높디높은 달동네의 돌계단을 정신없이 뛰어 내려갔다. 뒤에서 개 같은 새끼, 개쌍놈의 새끼라며 욕을 하는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 미친 듯이 뛰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발을 헛디뎌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했다. 아픈 걸 느낄 겨를도 없었다. 발을 멈추면 아버지가 쫓아와 이번에는 정말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미친 듯이 뛰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도 독하게 발을 디뎠다. 뒤도 안 보고 계속해서 달렸다. 폐가 찢어지는 것같이 아파도 그냥 막 뛰었다. 어디로 얼마나 뛰는지도 몰랐다. 무작정 뛰다가 딱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멈췄다.

“헉, 하윽……. 하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