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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두부 5화

1. 열일곱 봄 (5)





“맞다. 아침에 얘기 못 했는데. 어제 너 알바 가고 김혁이 네 자리 앉았어.”

연두는 수호의 말이 끝날 때까지 수호의 입술에 눈을 맞추고 기다렸다.

“근데 걔가 네 책상 뒤지길래 내가 못 하게 했다? 나 잘했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연두는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수호는 그런 자신의 짝을 쳐다봤다. 눈알 굴리는 소리가 수호에게까지 들렸다.

연두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내뱉은 말은 고작, 이게 다였다.

“……뒤져도 가져갈 것도 없어.”

차라리 잘했다고나 할걸. 뱉어 놓고 보니 엉망이었다. 어제 PC방에 괜히 간 거다. 수호도 실망했을 게 분명했다. 못난 마음이 수호에게도 다 비춰 보였을 거라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실망하는 꼴이라니. 연두는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왜 이렇게 대화를 못 할까. 집에서 할매랑은 하루 종일도 얘기할 수 있는데. 속상한 마음에 연두는 빳빳한 음악 표지를 손으로 꾹꾹 눌러 폈다. 뚝 끊겨 버린 대화 때문에 이제 수호가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제게 말을 걸지 않을 것 같았다.

“두부야, 난 너 같은 애들이 좋아.”

“뭐?”

두부야, 하는 소리도 긴가민가했고, 그다음 말도 긴가민가했다. 잘못 들은 것 같았다.

“조용한 애들 있잖아.”

“나 원래는 말 많은데…….”

잘못 들은 게 맞나 보다. 조용한 애들을 너 같은 애들로 잘 못 들은 모양이었다. 연두는 적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두는 할매랑 있을 때는 말이 많았다. 사투리도 하고 애교도 많이 부렸다. 할매는 욕을 하면서도 “내 강아지.” 하면서 연두의 궁둥이를 두드렸다. 가끔은 자발없다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

“아니, 말 많은 거 말고. 행동? 뭐 그런 거.”

“내가 행동이 조용하니?”

수호를 잔뜩 의식한 연두가 누가 잘 쓰지도 않는 표준어를 입으로 말했다. 그러자 수호가 씩 웃었다.

“귀엽긴 한데, 너 엄청 어색해.”

라고 말하며 두부의 볼을 꼬집었다. 등을 처음 가렸을 때에도 뒤통수를 가릴 때에도 벌겋던 귓바퀴가 터질 듯 달아올랐다.

음악 시간에는 교가를 먼저 배웠다. 유달산 정기가 어쩌고 하는 부분이 엄청나게 높았다. 연두는 입만 벙긋거렸는데 수호는 노래도 참 잘했다. 서른세 명이나 되는 애들 중에 최수호 목소리가 제일 좋았다. 왜 못하는 게 없을까.

신기했다. 엄친아는 최수호를 보고 만든 말인 것 같았다.



***



짝이 바뀐 덕분에 쉬는 시간 내 혼자였다.

4반 진오가 평화를 보러 왔다가 온 김에 연두에게 9천 원을 뺏었다. 손님에게 받은 팁 중 PC방비를 뺀 나머지 돈 전부였다. 무슨 일로 돈을 다 갖고 있냐며 머리를 기분 나쁘게 밀었다. 마고 간디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점심도 연두 혼자 먹었다. 하필 된장찌개에 콩밥이었다. 콩을 골라내다가 지나가던 김혁에게 욕을 얻어먹었다. 그렇게 편식을 하니까 비실비실한 거라며 김혁이 쓸데없는 오지랖을 떨었다. 누가 먹기 싫어서 안 먹는 줄 아는지.

점심 식사 후 5교시는 담임 선생님의 과목인 영어였다. 담임은 발음이 안 좋았다. 누가 들어도 콩글리시였고 주입식 교육의 표본이었다. ‘조비뒤, 일동앞’을 반복하는 담임 덕분에 꾸벅꾸벅 잠이 쏟아졌다. 옆자리 평화는 이미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선생님, 수호 대갈통 때문에 칠판 안 보이는데요!”

연두는 ‘수호’ 소리에 잠이 깼다.

“수호야, 키 좀 줄여라잉. 니 뒤에 안 보인다 안 하냐.”

“아, 넵! 최선을 다해 줄여 보겠습니다! 발뒤꿈치를 좀 자를까요?”

수호의 말에 애들이 책상을 두드리고 난리가 났다. 소란스러움에 평화도 잠에서 깼다. 담임 선생님은 반을 한 바퀴 넓게 훑어보았다.

“아야! 거기 뒤에 쪼매난 애!”

누굴 말하는지 몰랐다. 연두는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대답하려고 준비를 했다.

“아가, 평화야. 이평화야! 왜 못 들은 척하냐. 느그 선생 시방 니 부른다잉. 이평화.”

알고 보니 쪼매난 애는 담임이 벨로시랩터를 부르는 소리였다.

“아, 쌤! 저 키 안 작은디?”

“지랄하네. 번호가 키 순이믄 이 반서 니가 1번이여.”

5교시가 끝나자마자 수호는 평화와 자리를 바꿨다. 이번에 연두는 표정을 감히 숨길 수 없었다. 올라가는 입꼬리가 완전히 통제 불능이었다. 수호는 자기를 보고 웃는 연두를 보고 놀란 표정을 했다. 일주일 만에 처음 보는 웃는 얼굴이었다.

“두부야, 또 짝이네.”

다정한 수호는 연두를 따라 똑같이 웃어 줬다.



<2006. 03. 12. 일요일>

어제까지는 학교와 알바를 오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요일은 유일하게 연두가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날이었다. 집안일을 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일 축에도 못 꼈다.

탁, 탁, 탁! 고물 가스레인지는 몇 번의 점화음을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불이 붙었다. 2구 가스레인지에 비해 비대한 곰솥 냄비의 균형을 잡으려 이리저리 조절하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아가. 불 조심해라잉.”

“할매는……. 내가 아가여?”

“그람, 아가제. 아야. 불 올린 김에 밥도 좀 안쳐라잉.”

재작년 이맘때쯤 지금처럼 목욕물을 끓이다 냄비가 엎어지는 바람에 연두의 허벅다리에는 흉한 화상 자국이 남았다. 응급실에서 입원을 하라고 했는데 돈이 없어서 소독만 했다. 덧나진 않아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허벅지 위의 피부가 쭈글쭈글하게 접히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창백한 얼굴, 여우 눈깔, 화상 자국……. 연두의 몸에는 보기 싫은 것도 참 많았다.

그래서 작년까지만 해도 할매가 불 옆으로는 가지도 못하게 했는데, 허리가 안 좋던 할매가 곰솥을 올리다 끝내 허리를 삐었다. 덕분에 집안 살림은 작년 말부터 다시 연두의 몫이 되었다.

좁아터진 싱크대 위로 언제 또 올라온 건지 바퀴벌레 한 마리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연두는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꾹 눌러 죽였다. 한두 마리씩 벌레가 올라오는 걸 보니 진짜 봄이 오긴 할 모양이었다.

압력 밥솥에 쌀을 붓고 수도꼭지를 돌리자 꼴꼴 하는 빈 소리가 흘렀다. 유달동에서도 고지대에 속하는 판잣집은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었다. 연두가 짧은 손가락으로 싱크대 위를 탁, 탁, 탁 세 번 두드리고 나자 수도꼭지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솥에 물이 차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검은 점 같은 쌀벌레가 떴다. 저번에 할매와 함께 햇볕에 펼쳐 놓고 벌레를 잡았는데 언제 또 알을 깠는지 모르겠다. 쌀에서 벌레를 고르는 손길이 분주했다. 물 양을 눈대중으로 맞추고 압력 밥솥을 남은 화구 위에 올렸다. 좁디좁은 가스레인지는 냄비와 밥솥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손에 묻은 물기를 바지에 슥슥 비벼 닦은 연두가 할매의 옆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할매는 패를 띠고 있었다. 아직 네 줄이나 남았는데 맞는 짝이 없어 손 안에 든 패만 줄어들고 있었다. 손 안에 든 패가 없어지고 나니 할매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아따. 또 배레 부렀네잉.”

“할매. 갑오띠기 고만하고 물 끓는 동안 나랑 하토나 치게.”

“뭔 놈의 머시매가 이라고 하토 치기를 좋아하까. 니 나중에 뭐 될라고 그라냐?”

“하토를 좋아하는 게 아니고, 할매 심심하까 봐 그러지.”

“하이고, 육갑을 떠네. 불여시 같은 것이. 할매 쓰봉서 십 원짜리 갖고 온나.”

연두를 향해 애정 어린 욕설을 뱉은 할매가 남색 몸빼바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할매의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동전을 한 움큼 꺼냈다. 하얗고 마른 손아귀에는 다 쓴 버스표, 이제는 쓰지도 않는 일 원짜리 동전, 출처를 알 수 없는 깨진 단추까지 담겼다. 연두의 할매, 박명자 씨의 하얀 머리카락도 한 가닥 덤으로 딸려 올라왔다.

“오늘 할매 돈 다 따 묵어야지.”

연두는 장난을 치며 할매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백발이 성성한 할매는 이놈 새끼, 하며 연두의 코를 손으로 콱 쥐었다 금방 놓았다. 어머니를 닮아 하얗고 오뚝한 코에 금세 빨갛게 피가 몰렸다.

착착, 소리를 내며 화투 패가 주름진 손 안에서 섞인다. 연두는 제 손을 쳐다봤다. 선을 잡은 사람이 패를 섞어야 하는데 연두는 패를 못 섞었다. 섞어도 어설펐다. 남자치고는 한참 작은 손 때문이었다. 아마 또래 여자애와 비교를 해도 작을 것 같았다.

쥐방울만 한 손 역시 연두의 마음에 들지 않는 곳 중 하나였다.

“아따! 많이 났다. 일이삼, 송동월…….”

“니는 나중에 타짜나 하믄 쓰겄다. 이 염병할 놈의 머시매야.”

할매의 툴툴대는 소리 너머로 치이익, 하고 압력 밥솥이 성을 냈다. 연두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화투 몇 판 만에 시간이 금방 흘렀다. 목욕물 역시 절절 끓고 있는 모양이었다.

“할매, 그거 다 섞어 불지 마.”

연두는 연달아 점수를 잃다 겨우 한 판 많이 난 게 아쉬워 할매에게 당부를 하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검지로 압력 추를 내리자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희뿌연 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 소리에 할매가 화투 패를 섞어 파투를 내놓는 소리가 묻혀 사라졌다. 연두는 세모눈을 하고 할매를 쳐다봤다.

어느새 7시 반이었다. 연두는 뒤뚱거리며 양손으로 곰솥을 화장실로 옮겼다. 얼마나 오래 썼는지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한 빨간 고무 다라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수증기에 차디찬 화장실이 금방 후끈해졌다. 연두의 안경에 뿌연 김이 서렸다. 안경을 벗자 시야가 금방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