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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두부 3화

1. 열일곱 봄 (3)





연두는 잠깐 멍했다. 눈 색이 예쁘다고 말해 준 건 전학생이 처음이었다. 손자라면 껌뻑 죽는 할매도 눈을 보면 꼭 불여시 눈깔 같다며 핀잔을 주곤 했다. 가족도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눈이 나빠져 안경을 쓰면서부터는 그런 소리를 덜 듣긴 했지만, 안경을 쓰기 전에 수없이 들었던 ‘징그럽다’는 소리를 수호의 목소리가 덮었다.

당황하는 바람에 수호의 눈을 한참 쳐다봤다. 수호의 눈꺼풀에는 오른쪽에만 쌍꺼풀이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쪽이었다. 눈이 짝짝인데 어떻게 잘생길 수가 있지. 눈이 예쁘다고 했는데 뭐라고 하지? 고맙다고 해야 하나. 연두는 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을 반쯤 헤 벌리고 넋이 나가 수호를 바라봤다.

그때,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수학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짝꿍의 멍한 표정을 살피던 수호가 눈썹을 팔자로 만들었다.

“아. 혹시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민망해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연두는 정신을 차렸다. 어쩌면 진짜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몰라. 자주 오지 않는 기회였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 아니여! 나 암시랑도 안 해!”

“푸흡……!”

당황해서 튀어나온 구수한 사투리에 수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망했다.’

연두의 창백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난데없는 웃음소리에 독사 선생님은 아침부터 뭐가 그리 재밌냐며 타박을 했다. 수호가 얼마나 웃음을 크게 터뜨렸는지 연두의 안경에 그의 침방울이 두 개 날아와 안착했다. 덕분에 안경알을 교복 셔츠로 닦는 연두의 얼굴은 누르면 곧 날아가기라도 할 듯이 빨개졌다.

수호는 안경을 닦는 짝꿍에게서 몸을 반대로 돌리고, 큰 손으로 입을 막아 웃음기를 달랬다. 입술끼리 딱 붙이고 평정심을 유지해 보는데, 코가 씰룩거렸다.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고 나서야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애쓴 듯하지만, 긴 눈꼬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웃어서 진짜 미안. 네 입에서 사투리 나오는 게 너무 신기해서.”

연두의 얼굴에서 붉은 기가 사라지기까지는 그 뒤로도 한참이 걸렸다.



***



수호는 교과서 중 몇 개만 먼저 받았다. 덕분에 대부분의 교과서를 짝꿍인 연두와 함께 봤는데, 몸뚱이가 얼마나 큰지 수업 시간마다 불편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어깨가 부딪혔다.

수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눈치였다. 정확히는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1교시에는 어깨가 부딪치자마자 “미안, 내가 어깨가 좀 넓어서.”라며 하지 않아도 되는 사과를 했다. 사과가 아니라, 자랑인가 싶기도 했다.

하루 동안 사과를 세 번이나 받았다. 매번 사과하는 입장이었던 연두는 사과를 받으면서도 왜인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같은 왕따한테 사과도 해 주고…….’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수업 시간을 빼고는 말 섞을 일이 없어 아쉬웠다. 쉬는 시간마다 김혁 무리가 와서 수호를 데리고 가 버렸다. 점심시간에도 그랬다. 연두는 평소처럼 점심을 혼자 먹었는데, 일진들의 관심사가 수호에게 몰리면서 오늘은 조용히 밥만 먹을 수 있었다. 그건 다행이었다.

이번 주부터 시작된 마고의 야자는 22시 50분까지였다. 하지만 연두에게는 상관없었다. 일자리를 잃은 아버지 대신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7시까지 고깃집에 도착하려면 못해도 6시 반에는 버스를 타야 해서 석식을 먹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가는 길에 빵이나 사서 먹어야 할 성싶었다.

등교 첫날부터 인기가 많았던 서울 전학생은 9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김혁 무리와 함께 급식실로 내려가 버렸다. 책가방을 싸는 연두의 손놀림이 괜히 미적지근했다.



<2006. 03. 10. 금요일>

“연두야, 안녕.”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찬 공기에 메아리쳤다. 교실이 산꼭대기도 아니고 메아리 칠 리는 없겠지만, 연두는 그렇게 느꼈다.

짧게 인사를 건넨 수호가 가까이 다가왔다. 연두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옆자리 의자를 손으로 잡아 뺐다. 나이키 백 팩을 의자 뒤에 건 수호가 의자를 조금 더 잡아당겨 앉았다.

“어, 어. 최수호. 왔어?”

새로 생긴 짝꿍은 생각보다 일찍 학교에 오는 편이었다. 그래도 연두보다는 좀 늦었다. 화요일부터 지켜보니 4, 5등 정도로 도착하는 것 같았다.

“응. 어제 알바는 잘했어?”

“어……. 잘은 무슨, 그냥 했지. 뭐.”

“벌써 알바도 하고 대단하다. 난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학교 끝나고 일하는 거 힘들지 않아?”

나도 너처럼 돈이 많으면 알바 같은 거 안 했을 거야. 불쑥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무난한 말을 내뱉었다.

“하다 보면 익숙해져. 용돈도 벌고…….”

사실 용돈이 아니라 생활비를 벌어. 가스비랑 수도세랑 전기세 그런 거. 우리 할매가 그러는데 엄마가 버는 걸로는 입에 풀칠도 못한대. 이번에도 연두는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못난 생각을 했다.

또 거짓말이 늘었다.

연두의 말을 끝으로 수호가 끙 소리를 내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반듯하게 다려진 교복에서 또 소다 맛 아이스크림 냄새가 났다. 같은 냄새인 거 같은데 오늘은 전에 맡은 것보다 조금 스킨 향이 더 섞여 있었다. 원래는 딱 하늘색 같은 냄새였는데 오늘은 파란색이었다.

이상했다. 화장대에 있는 아버지 스킨 냄새는 독해서 코가 다 아팠는데, 수호의 냄새에 섞인 스킨 향은 무지 좋았다. 그 대상이 수호이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원래 좋은 냄샌데 아버지가 써서 독하게 느껴졌는지는 몰랐다.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연두는 좋은 냄새를 더 맡고 싶어 콧물이 나오는 척 괜히 코를 훌쩍댔다.

이상하게 좋은 수호의 향기 말고도 이번 주는 계속 이상한 한 주였다. 얼떨떨했다. 지난 화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반에서 야자를 안 하는 사람은 연두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이었다. 수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수호는 바로는 아니고 한 시간 후에 나가는 모양이었다. 과외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김혁은 연두 혼자 야자에 빠지는 것처럼 부당한 시비를 걸어 왔다. 기실 김혁이 한 행동들 중 연두에게 부당하지 않은 일은 없었다.

최근 시작한 고깃집 알바는 밤 11시에 끝났다. 아직 일이 익숙지 않아 집에 돌아오고 나면 다음 날까지 피곤했다.

연두는 무거운 눈꺼풀에 화요일 0교시부터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다 자리에 엎드렸다. 어느새 등교한 수호가 옆에 앉는 줄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었는데, 돌연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연두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수호의 입술과 남자답게 각진 턱이 보였다. 수호는 얼굴의 반만 봐도 잘생겼었다.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던 연두의 시선은 저절로 금방 내려갔다. 맞은 등이 욱신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렇지. 너도 결국 똑같구나.’

전학생과 눈을 맞추진 않았지만 인상을 구겼다. 등이 아팠다. 이렇게 될 줄 뻔히 알았는데, 기대한 연두가 바보멍청이였다. 할매는 틈만 나면 연두더러 불여시 같다며 엉덩이를 두들겼지만, 세상에 이렇게 멍청한 불여시가 있을 리 없었다. 괜히 괴롭히는 사람만 하나 늘었다고 생각했다. 이럴 땐 그냥 무시가 답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그걸 빌미로 때릴 게 분명했다. 몇 년의 경험 끝에 우러나온 결정이었다.

연두가 다시 고개를 숙였는데, 다시 한번 퍽 소리가 났다. 이번에도 무시하자 통증이 한 번 더 이어졌다. 때리다 지치면 말겠지 싶어 고집스럽게 고개를 파묻고 있었는데,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등 뒤를 커다란 온기가 덮었다. 뜨끈뜨끈하고 부드러웠다. 뭔가 싶었더니 짝꿍의 손바닥이었다.

“혁아, 애를 왜 자꾸 때려.”

최수호였다.

나긋나긋한 서울 말씨에 연두는 고개를 빼꼼 들었다. 짝꿍이 손으로 자신의 등을 감싸고 있었다. 킬킬거리는 소리에 뒤를 보니 김혁이 서 있었다. 김혁은 야자도 째면서 뭐가 피곤하냐며 욕지거리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두는 자기를 때린 사람이 수호가 아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방금 전에 너도 똑같다고 생각해서 미안해. 눈을 마주치진 못했지만, 연두는 눈썹을 팔자로 모은 채 사과했다. 물론, 속으로만 했다.

“두부 새끼가 나 무시하자네. 내가 어제 말했냐. 이런 새끼는 존내 패야 된당께.”

“야, 뭘 패. 친구끼리 친하게 지내야지.”

“헐. 방금 최수호 존나 이뭐병……. 니 끝나고 굴다리 밑으로 튀어 와라잉. 10초 준다.”

“혁아. 내 앞에서 누구 때리지 마. 나 중학교 때 별명 대치동 간디였어. 비폭력 주의자.”

“간디? 푸하하! 어제부터 졸라 웃기네. 이 새끼 안 그럴 거같이 생겨 갖고 모범생이여야.”

“으……. 너 목소리 너무 커. 귀 아파. 시끄러워.”

수호는 김혁의 욕설이 기분 나쁘지도 않은지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일관했다. 말을 받아치면서도 수호는 손을 마른 등에 그대로 두고 있었다. 연두는 등에 달라붙은 체온이 너무 뜨거워서 재작년에 화상 입을 때 생각이 났다. 수호가 손을 빨리 뗐으면 싶었다.

그 바람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담임이 들어오면서 혁이 자리로 돌아가고, 수호의 손도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연두가 안도감에 작게 한숨지었다.

“아팠겠다. 괜찮아?”

연두는 아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응, 하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