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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4.


[나 집 도착!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하니까 이 비싼 걸 바로 사 주는 너란 여자! 의리 있는 친구 맞네, 맞아♥ 비싸서 부담스러웠을 텐데 맛있게 잘 먹을게!]
아무 상관없는 혜은을 끌고 휴학계를 내고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어찌나 먹고 싶던지,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묻는 혜은에게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냉큼 말했더니, 며칠 먹고도 남을 양의 큰 사이즈를 사 주었다.
대학생이라 돈도 얼마 없을 텐데. 고마운 마음을 담아서 평소 잘 쓰지도 않던 하트 기호와 함께 인증샷을 찍어서 보내 주었는데, 답장 대신 전화가 왔다. 그런데 전화는 혜은이 아닌 여준에게서 온 것이었다.
“여보세요?”
전화 통화는 처음이었기에 어색함이 묻어 있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받았다.
-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어?
“네?”
- 그럼 나한테 말하지. 나도 사 줄 수 있는데.
재인이 소리 나지 않게 헉, 소리를 내며 메시지를 살폈다. 케이크와 함께 V를 크게 그리며 찍은 사진은 보란 듯이 혜은이 아닌 여준에게 전송되어 있었다.
- 그럼 나한테도 하트 붙여 주나?
재인은 지금 여준이 옆에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감당되지 않게 달아올라 버린 얼굴의 열을 식히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것 같으니 말이다.
- 만날 사 줘야겠다. 맛있는 거.
“잘못 보낸 거 아시죠?”
- 어. 알아. 그래도 기분은 좋아. 친구 만난 거야?
“네.”
- 따뜻하게 입고 나갔다 왔어?
“네.”
덜렁 대답만 하려던 재인이 다시 입을 떼어 냈다. 이상하게도 이 순간 여준과의 대화를 허무하게 끝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 드셨어요?”
- 응. 먹었어. 넌 밥 안 먹고 아이스크림만 먹고 있는 건 아니지?
뜨끔하여 들고 있던 스푼을 슬쩍 내려놓았다.
“밥 먹고 후식으로 먹고 있는 거예요.”
물론 밥 안 먹고 아이스크림 먹고 있다고 하면 걱정할 게 뻔한 여준이라서 꺼낸 변명이었다. 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어서 하는 자신의 모습이 뻔뻔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 이제 뭐 할 거야?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다. 오늘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다고 한껏 멋 부리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던 몸이 나른해질 만큼.
“음. 태아한테 좋은 노래도 좀 듣고, 태아한테 좋은 책도 좀 보려구요.”
- 나는 아빠인 게 참 다행인 거 같아.
“왜요?”
- 책 안 읽어도 되니까.
“에이. 안 돼요. 아빠가 직접 태아한테 읽어 주는 책이 그렇게 좋대요. 그러니까 앞으로 책 읽으셔야 돼요. 그것도 큰 소리로.”
- 그래? 그럼 읽어야지. 뭐.
그의 목소리가 살짝 시무룩해지는 게 귀여웠다.
- 근데. 나 책 읽으면 자는데.
재인은 순간, 티끌 하나 없는 하얀 이불이 깔려 있는 침대 위에서 책을 읽어 주다 말고 잠드는 여준을 상상했다. 그의 곤히 잠드는 모습이 보고 싶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 재인아.
“네?”
그를 몰래 상상하고 있던 재인이 느닷없이 저를 부르는 여준으로 인하여 화들짝 놀라 얼른 대답을 했다. 핸드폰 너머로는 여준의 옅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고르고 일정하게 숨을 쉬고 있는지 재인은 내심 궁금했다.
- 우리 내일 데이트할까?
“데이트요?”
- 응.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네.”
- 또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음…….”
재인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문득, 집을 뛰쳐나가고 혼자 지낼 무렵 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본 아쿠아리움 전단지가 떠올랐다. 어렸을 때에도 학창 시절에도 그곳을 가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더욱 가 보고 싶었다.
“아쿠아리움. 가고 싶어요.”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그곳을, 새로운 모든 것을 함께 시작하게 될 그와 말이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온 여준은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극심한 한기에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자신의 공간에서 머문 시간은 고작 하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이 지독한 외로움은 무엇 때문일까? 집에 불빛이 하나도 없는 탓일까 싶어서 불을 켜 보았다.
거실엔 어둠이 사라지고 환해졌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어둠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질 줄 알았던 고독함이 무서울 정도로 여준을 휘어 감았다.
온 집 안 가득 어제 머문 그녀의 향기가 가득했다. 문을 열면 침대 위에서 그녀가 잠들어 있을 것만 같았고, 화장실에서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고 수줍은 표정으로 나와서는 후다닥 침실로 들어갈 것만 같았다.
여기 어딘가에 재인이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 있어 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재인아.”
대답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 혹시나 싶어 재인의 이름을 불러 본 자신이 우습기만 했다. 여준은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눈을 감아도 보고 싶고 눈을 뜨고 있어도 보고 싶다. 겨우 오늘 아침에 헤어졌건만 또 보고 싶은 마음에 전화를 해 볼까 핸드폰을 들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여준은 마른 얼굴을 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보고 싶다.”
첫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한 내일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빠른 속도로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잠은 쉽게 오질 않고 시간 또한 빨리 흘러가질 않는다.
오늘 밤은 너무나 더디게 지나갈 것만 같았다.

***

“예뻐, 예뻐.”
평소 괜찮다고 생각했던 옷들도 죄다 마음에 들지 않고, 화장이 너무 과한 것 같은 마음에 몇 번이고 거울을 들여다보기를 반복하던 재인의 뒤에서 동봉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빠.”
“누구 딸인지는 몰라도. 참 예쁘네, 예뻐.”
동봉이 재인에게 다가와 까칠한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그런 아빠의 손길이 싫지 않은 재인이 소리 나게 배시시 웃었다.
“아빠 딸이라 예쁘지.”
“그래. 네가 날 닮아 예쁜 거야. 그걸 늘 명심해야 돼. 알지?”
재인이 입술 끝을 쭉 들어 올리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봉이 재인의 뺨에서 손을 떼어 내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이었다.
“이거. 강 서방이랑 점심이라도 사 먹어.”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를 시작하면 여기저기 드는 돈도 많을 텐데, 소소한 데이트 비용에까지 손을 뻗을 생각은 없었다. 재인은 고개를 내저으며 아빠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나도 이 정도 돈은 있어요.”
“이건 딸이랑 딸 남자친구 밥값 내 주는 거 아니고 딸이랑 사위, 그리고 손주 점심값이야.”
동봉이 재인의 가방에 돈을 넣어 주었다.
“아빠…….”
“얼른 준비하고 나가. 사실 아까부터 강 서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정말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쏜살같이 창문으로 붙어 밖을 쳐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차에 기대서는 하염없이 대문 쪽만 바라보고 있는 여준이 보였다.
“아빠! 나 다녀올게요!”
재인이 창문에서 허겁지겁 떨어져 나와서는 가방을 낚아채 방문을 벌컥 열었다. 뒤에서는 노파심 가득한 얼굴로 동봉이 얼른 재인을 따라나섰다.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구겨 신고 있는 재인이 보였다.
“재인아. 조심, 조심!”
“어! 아, 조심, 조심.”
재인이 동봉의 말을 따라 하며 배를 쓰다듬으면서 집을 빠져나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차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반사적으로 일으키는 여준이 보였다.
“많이 기다리…… 엄맛!”
너무 반갑고,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해서 빨리 내려오려던 재인이 구겨 신은 운동화 때문에 계단에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재인아!”
뒤로 막 넘어지려는 재인을 여준이 달려와 가볍게 품에 안았다. 그때 잠시 일렁이던 재인의 머릿결에서는 어제 여준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향기가 느껴졌다. 여준이 보고 싶어서 밤새 뒤척이며 잠 한숨도 못 이루게 했던 재인의 얼굴을 눈에 가득 담아 넣었다.
짙은 쌍꺼풀과 풍성한 속눈썹, 높지 않고 자그마한 코, 도톰하고 자연스러운 색을 띠는 붉은 입술, 그리고 저의 어깨를 꽉 잡고 있는 작은 손까지. 재인의 모든 것을 한참 동안 눈에 담아 넣고 새기던 여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었다.
“자꾸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지.”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어. 사실, 그 이유 말고도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많으니까.”
“네?”
여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런 재인의 흐트러진 목도리를 여준이 똑바로 매만져 주었다.
“오늘 너 때문에 간 떨어질 뻔했다.”
“앞으로 정말 조심할게요.”
“응. 그래. 고마워.”
목도리를 다 매 준 여준이 재인의 앞에 천천히 앉았다. 그리고 구깃구깃하게 신은 운동화를 똑바로 신겨 주려고 손을 뻗었다.
“제가 할 수 있…….”
재인이 발을 뒤로 살짝 뺐지만 이미 여준의 부드러운 손길로 인해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그는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운동화를 제대로 신겨 주었다. 재인이 살며시 여준을 바라보자, 쪼그려 앉아 있는 채로 여준이 재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밑에서 보면 재인이 이렇게 생겼구나…….”
밑에서 보는 방향은 누구라도 못난이로 만드는 걸 알고 있기에 재인이 놀라 얼른 얼굴을 가렸다.
“예쁜 얼굴 가리지 마.”
여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살짝 여준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어 재인의 심장이 위태롭게 뛰었다.
“가자. 데이트하러.”
여준의 손에 이끌려 차 뒷좌석으로 온 재인이 잠시 망설였다. 뒷좌석에는 이미 재인을 위한 담요가 곱게 접혀 있었다. 이곳에 올라타면 어제 내내 그랬던 것처럼 여준이 안전벨트를 매 주고 운전석으로 가서 뒷모습을 보이며 앉을 것이다. 그리고 운전하는 내내 그의 뒷모습만을…….
“저…….”
“응?”
“조수석에 탈게요. 오늘은 데이트하는 날이니까.”
재인이 이제 갓 피어난 붉은 장미처럼 수줍게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떼어 대답하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 바람에 여준이 얼마나 환하게 웃었는지, 재인은 보지 못했다.
차는 재인의 집을 벗어나 시내로 향하는 도로 위를 달렸다. 재인이 힐끗 옆에 앉은 여준을 바라보았다.
“왜?”
그 눈짓을 금방 알아차린 여준이 가만히 물었다.
“아니에요.”
눈이 마주치자 재인은 확 달아오르는 얼굴에 당황해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재인은 창문에 비치는 여준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 신호가 바뀌면서 차가 멈추고 여준이 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재인아.”
그가 재인의 볼에 검지를 내밀고서 불렀다. 창문에 비쳐서 다 보였지만 재인은 눈감아 주기로 하고 고개를 돌렸다. 콕. 여준의 손가락이 재인의 볼을 푹 찔렀다. 그가 몸을 뒤로 넘기면서 웃는다. 볼에 닿은 자신의 손길 때문에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재인의 심정은 조금도 몰라주고 말이다.

도착한 영화관은 한산했다. 마치, 여준과 재인이 통째로 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고등학교 이후로는 영화관에 와 본 적이 없던 여준은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 했지만 싫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와의 데이트고, 그의 옆에 있는 여자가 재인이라는 것이 여준이 느끼고 있는 모든 어색함을 지워 주었다.
혹여 재인이 불편할까 싶어서 편하게 보라고 일반석이 아닌 널찍한 커플석으로 예매를 했는데, 그 배려가 아무래도 오해를 낳은 듯싶었다. 재인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너 편하게 보라고 예매한 건데. 왜? 불편해?”
재인은 불편하기보다는 은근한 걱정이 앞섰다. 뛰는 심장 소리, 조금 거칠어지려는 숨소리, 배에서 나는 꾸르륵 소리, 코를 훌쩍이는 소리까지 너무 가깝게 앉은 그에게 적나라하게 들려 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녀에게서 대답이 없자 그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럼, 지금이라도 다른 자리 예매해 올…….”
“아니에요. 그냥 여기 앉을게요.”
재인이 냉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재인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여준이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로 따라 앉았다.
좁은 공간이다 보니, 살짝 닿은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느껴졌다. 재인이 몸을 여준 쪽이 아닌 반대쪽으로 살짝 기울였을 때였다. 여준이 불쑥 팝콘을 내미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버렸다.
“놀랐어? 미안. 놀래키려고 그런 건 아닌데.”
왜 별것도 아닌 것에 놀라서는 여준을 당황하게 만들었는지, 재인은 스스로가 답답하기만 했다.
“아니에요.”
어색해진 분위기를 피하고 싶어서 평소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팝콘을 집어 먹었다.
“어?”
“왜?”
갑자기 작은 탄성을 내는 재인에게로 또 즉각적인 그의 반응이 돌아왔다.
“네? 아니……. 생각보다 훨씬 더 맛있어서.”
“그래? 그럼 많이 먹어. 모자라면 더 사다 줄게.”
오늘따라 맛있다. 그 거들떠도 안 보던 팝콘이 말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몇 개의 CF가 끝나고 영화를 시작하려는지, 불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여준의 얼굴이 조명이 꺼짐으로써 점점 희미해지더니 완전히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두 눈을 감은 것처럼, 물속에 검은 물감을 부은 것처럼, 여준의의 얼굴이 재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귀에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낮게 내뱉던 여준의 숨소리조차도 삽시간에 어둠으로 스며들고 말았다.
덜컹 겁이 나 버리고 말았다. 여준이 보이지 않는다. 들리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불러 볼까? 대답해 줄 텐데. 손을 뻗어 볼까? 닿을 수 있을 텐데.
“저…….”
손을 뻗어 올리려는 순간, 탁 하고 스크린이 켜졌다. 밝아진 스크린을 바라보며 미미하게 웃고 있는 여준이 곧, 벙찐 얼굴을 하고 자신 쪽으로 손을 올리고 있는 재인을 발견했다.
재인을 바라보는 여준이 웃는다. 환하고 투명한 눈으로 재인을 바라보며 입이 아닌 눈빛으로 재인아, 하고 부르듯이 웃고 있다. 사라지지 않았다고, 없어지지 않았다고 말해 주듯 그렇게 웃어 주고 있었다.
차마 여준에게 닿지 못한 채로 공중에 떠버린 재인의 손이 슬그머니 내려가려던 찰나에 여준이 손을 뻗어 재인의 손을 잡았다.
그와 손을 맞잡는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앞으로 돌린 얼굴이 붉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조금 까칠까칠한 손이었지만 너무 따뜻해서 재인은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꽉 힘을 주어 잡았다.
그의 눈길이 잠시 자신에게 닿았다. 예상치 못했던 재인의 반응에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곧 시선을 스크린으로 돌리는 것을 느꼈다.
재인이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스크린에 집중을 하는 여준의 웃는 옆모습이 엊그제보다 어제가 더, 어제보다 오늘 더 화사하게 느껴졌다.
영화보다는 다른 데에 신경을 더 많이 썼던 영화관을 나온 뒤, 약속했던 대로 아쿠아리움으로 향했다. 에메랄드빛이 감도는 수족관을 자유롭게 헤엄치고 다니는 수많은 물고기 떼에 시선을 사로잡혀 버린 재인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와…….”
화사한 색조를 지니고 있는 물고기 떼로 인해 출렁이는 물줄기가 아름답게 흐트러졌다.
“너무 예뻐요.”
“그러게. 정말 예쁘네.”
여준은 까만 눈동자가 파란빛으로 물들어 반짝거리고 있는 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휘황찬란한 빛을 띠고 있는 물고기보다 재인에게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옮겨 가며 물고기를 구경하던 재인의 머리 위로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홱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니 상당한 크기의 상어가 긴 꼬리를 느긋하게 움직이며 지나가고 있었다. 뒤에서 따라오던 여준의 팔을 다급하게 잡으며 천장을 가리켰다.
“상어예요! 상어!”
약간 흥분한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하다 말고 문득, 자신이 여준의 팔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재인이 당황해하며 멈칫했다.
“왜?”
재인이 슬그머니 여준을 잡았던 손을 떼어 아래로 떨구었다.
“전 여기 처음 와 봐요. 매일 TV로만 보던 데예요. 상어도 실제로는 처음 보고. 촌스럽죠?”
“어. 촌스럽네.”
여준은 축 처져 있는 재인의 팔을 잡아다가 아예 팔짱을 끼워 버렸다. 그의 몸에 닿자, 또다시 심장이 뛰었지만 싫지 않은 떨림이라 그대로 있기로 했다.
“그래서 부지런히 데리고 다녀야겠어.”
여준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걸음걸이에 발을 맞추어 절대로 어긋나지 않도록 걸었다.
“다 가 보자. 너랑 나랑 우리 아이랑. 가 보고 싶은 곳, 좋은 곳, 어디든지 다 가 보자. 셋이 같이.”
“좋아요. 다 좋아요.”
“어디 갈까? 가고 싶은 곳 다 말해. 다 데려가 줄게.”
재인은 여준과 함께 정말 어디든 가는 것을 상상했다. 바다도 가고, 산도 가고, 잔디가 깔려 있는 별장에서 함께 고기도 구워 먹으면 좋겠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상상으로 만들어 셋이서 마주 보고 앉아 행복해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어디든 좋을 거 같아요. 둘이, 아니 셋이 같이 가는 거라면.”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사롭고 따뜻한 빛을 연상케 하는 샛노란 열대어들이 떼를 지어 따라다녔다.
“배는 안 고파?”
자신의 팔에 얹어져 있는 재인의 손등을 보드랍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배는 안 고픈데 먹고 싶은 건 있어요.”
“뭔데?”
“여준 씨가 해 주시던 파스타요.”
“파스타?”
재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때 새 메뉴 만드실 때, 맛보라고 하면서 주셨던 파스타들 생각나세요? 데미글라스 소스에 크림 넣어서 만들었던 로제 파스타였는데. 맞나?”
“정확하게 기억하네.”
“네. 너무 맛있게 먹어서 그랬나 봐요. 그거 말고도 종종 해 주셨던 파스타, 정말 맛있게 잘 먹었는데, 자주 생각나더라구요.”
막상 말은 했지만 그가 번거로워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매일 하는 파스타가 진절머리가 나고 귀찮을 걸 알면서 왜 이런 부탁을 해서 번거롭게 만드는지 재인은 생각 없이 말한 자신이 미워졌다.
“다음에 시간 나실 때 해 주시면…….”
“너 먹고 싶은 거 만들어 줄 시간은 언제든지 많아.”
“정말요?”
“그럼. 지금 당장 가자.”
여준이 자신의 팔을 감고 있는 재인의 손을 꽉 잡고 출입구 쪽으로 몸을 틀자 재인이 말렸다.
“잠깐만요. 당장은 안 돼요.”
“왜?”
“여기 들어오는 입장권이 얼마나 비싼데. 여기 다 구경하고 가야죠.”
“예쁜데 알뜰하기까지. 이러니 내가 안 반하고 배겨?”
능청스럽게 말하는 여준을 보며 재인이 싫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방금 좀 느끼했던 거 아세요?”
“그래? 많이 느끼했어?”
“네. 많이 느끼했어요.”
“어? 저기. 펭귄 먹이 주나 보다.”
여준이 모른 척 한쪽 손으로 펭귄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쪽을 가리키며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에도 자신이 잡은 재인의 손은 절대로 놓치지 않고 꽉 잡은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