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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하얗고 깔끔한 벽지에 박힌 금빛 로고는 별다른 조명도 없이 홀로 빛났다.

나리는 눈앞에 보이는 로고의 글씨를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차앤우 치과…….”

회사에서 지정한 검진 치과로, 사원증을 제시하면 15% 할인 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 입소문을 타면서 이제는 예약 없이 진료를 받기 힘들어졌다.

“신나리 님.”

하지만 나리는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이곳을 찾았다.

“이쪽으로 모실게요.”

대기실에 앉아 있던 나리가 몸을 일으켰다. 익숙하다 못해 친근하게 느껴지는 치위생사의 안내에 따라 복도를 걸었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혀끝으로 어금니를 쓸었다. 긴장할 때 나오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안내받은 의자에 앉자 치위생사가 모니터 각도를 조절했다. 치료가 끝나면 입안을 헹굴 수 있도록 종이컵에 물을 받아 두고, 그녀를 향해 거울을 고정했다.

그 일련의 동작을 바라보는 나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치통 때문이 아니었다.

“의자 눕힐게요.”

“저, 선생님.”

나리는 결국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담당 의사 바꿀 수 있나요?”

“지금이요?”

정기 치료를 받은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 담당의를 바꿔 달라니.

“어디가 불편하셨어요?”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차 선생님보다 우 선생님이 저한테 더 맞지 않을까 해서요.”

“죄송한데 저희는 미리 짜인 일정대로 진료하기 때문에 갑자기 변경하는 건 어려우세요. 담당의를 바꾸고 싶으시면 다음 진료부터는 그렇게 예약 잡아 드릴 수 있고요.”

“…….”

“그렇게 해 드릴까요?”

차앤우 치과는 오늘로 마지막이 될 것이다. 회사에서 가깝다는 장점과 15%의 할인 혜택을 과감하게 버리고 치과를 바꾸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아니에요. 그냥 차 선생님께 받을게요.”

그러자 치위생사는 미안하다는 듯 미소 짓더니 의자를 뒤로 눕혔다.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와 잇몸을 쑤셔 대는 살벌한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 가운데 의료용 의자에 눕듯이 앉은 나리는 긴장감으로 손끝이 저릿했다. 본래 치과란 100m 전부터 긴장하는 곳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심장이 벌렁거리는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곧 머리를 드리운 동그란 조명 판에 불이 들어왔다. 일곱 개의 전구가 괴물의 눈처럼 나리를 노려보았다. 아니, 이건 차건후의 눈이다. 차건후가 눈을 희번득하게 뜨고 저를 노려보는 듯해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선생님 모셔 올게요.”

“잠깐만요!”

나리가 누운 채로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치료 기록을 모니터에 띄워 두고 돌아서던 치위생사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 그럼 제 눈이라도 가려 주세요.”

“네? 하지만 선생님 오시면 같이 진료 기록을 보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요! 전 안 봐도 되니까요. 조명이 너무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어요. 제가 얼마 전 라식 수술을 해서…….”

하지도 않은 수술 핑계를 대는 나리를 바라보던 치위생사가 곧 할 수 없다는 듯 녹색 천을 들고 다가왔다.

“선생님 오시면 모니터를 보셔야 할 때도 있어요. 그땐 살짝 내려주세요.”

“네.”

나리는 비로소 눈이라도 가렸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마음 놓고 차건후를 만날 수 있겠다.

“안녕하세요.”

잠시 후, 부드러우면서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저음이 귓가에 닿았다. 그가 곁에 바싹 다가와 앉는 것이 느껴진다.

‘미치겠네.’

나리는 건후에게 보이지 않을 왼손으로 주먹을 꽉 말아 쥐는 것으로 긴장을 버텼다.

“신나리 님.”

“……네.”

하지만 얼굴을 미리 덮어 둔 것을 금세 후회하게 되었다. 시야가 가려지니 시각 외 모든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귓가에 솜털이 서고, 미묘하게 흐르는 침묵 사이로 들리는 숨소리에 손에 땀이 찼다. 차츰 제게 다가오는 느낌에 발가락 끝에 바짝 힘이 실렸다.

나리는 평소보다 오감이 민감하게 일어서는 것을 느끼며 입술에 일어난 껍질을 앞니로 뜯었다.

그러자 일순 아랫입술에 라텍스 감촉이 느껴졌다. 차건후의 손가락이라는 건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그시 누른 손가락이 움찔하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앞니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덕분에 힘이 들어갔던 턱에 자연히 힘이 풀리며 입술이 풀려났다.

“마지막 치료 후 관리를 얼마나 잘하셨는지 확인해 볼게요.”

언제 입술을 꺼내 주었냐는 듯 상냥하게 들려오는 음성에 나리는 순순히 입을 벌렸다.

차건후의 목소리엔 묘한 힘이 있었다. 지금까지 나른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음색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인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날도 그랬고.

“관리 잘하셨네요. 오늘은 기존 치수염 신경 치료 작업과 치석 제거 들어가겠습니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뒤늦게야 묘한 굴욕감이 덮쳐 온다는 것이다. 목소리에 홀려 시키는 대로 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그가 원하는 대로 되어 있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차건후는 강압적인 반장은 아니었으나 반 아이들 모두가 그를 자연스럽게 따르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 때문에?

아니면 신뢰를 주는 말투 때문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차건후는 그냥 그런 사람이라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었다.

“더 크게 벌리세요.”

나리는 모든 번뇌를 내려놓고 입을 크게 벌렸다. 차갑고 납작한 막대가 그녀의 혀를 짓눌렀다. 또 하나의 막대가 들어와 어금니 곳곳을 살피기도 했다.

“오늘 3번 치아 크라운 씌우죠.”

“알겠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리는 눈을 감았다.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로다.’

처음에는 검진 병원이 차건후의 치과라는 것이 행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키스할래?”



정확히 일주일 전, 차건후와 키스했으니까.

첫 키스였다.

연애에 관심은 많으나 모종의 이유로 늘 차이기만 한 나리의 입술은 스물아홉이 될 때까지 순결했다. 그랬던 그녀만의 공간에 차건후가 대뜸 침입한 것이다. 예고도, 경고도 없이.

“왜 시작부터 얼굴 가렸어?”

“……!”

생각에 잠겨 있는 나리의 귓가로 은밀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 떨고서야 사위가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벌리고 있던 입을 천천히 다문 나리가 혀로 마른 입술을 훑었다.

시야를 가린 천을 살짝 내리자 차건후가 보였다. 치위생사는 크라운을 준비하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는 진지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빛 셔츠에 흰 가운, 깔끔하게 정돈한 머리, 정갈한 마스크는 언제나 환자에게 신뢰를 주었다.

물론 나리의 눈엔 그가 다르게 보였지만.

“언제까지 훔쳐볼 생각이야?”

뺨에도 눈이 달린 모양이었다. 당황한 나리가 재빠르게 천을 올리자 머리 위에서 쿡, 하고 웃음 터지는 소리가 났다.

쿵쿵, 심장이 두근거렸다.

넌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거야? 그렇게 깊게 키스했는데. 막, 혀가 막 얽히고설키고 타액이 오가는 키스를…….

“준비됐습니다.”

그때 치위생사가 치료실로 들어왔다. 그제야 나리는 몸을 일자로 굳히고선 눈을 감았다.

“치료 시작하겠습니다.”

차건후의 묵직한 목소리와 동시에 손가락이 마치 키스하듯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러 왔다. 이번에도 순순히 입을 벌리자 곧장 기구가 파고들었다.

지이잉.

머리가 울렸다. 차건후가 섬세하게 손을 놀리는 대로 입안이 휘저어졌다.

“아프면 왼손 드세요.”

짧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기다릴 것 없이 바로 들었지만 언제나처럼 차건후는 동요하지 않았다.

“조금만 참아요.”

그럼 왜 들라고 한 거야!

놀림 받은 기분에 신경질이 나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부드럽게 달래고 치료하느라 입술에 손가락이 닿고, 자신조차 자세히 들여다본 적 없는 입안을 다른 사람도 아닌 차건후가 구석구석 살피고 있다는 게.

불현듯 그날의 키스가 떠올랐다.

집에 들어가 젖은 팬티를 벗으며 자괴감으로 몸부림쳐야 했던 밤.

그때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혀가 움찔거리고 턱이 다물리는 순간.

“벌려요.”

손가락이 그녀의 입속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