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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좋아한다는 감정은 참 신기하다. 처음에는 불편하거나 싫었던 것마저 어느 순간 괜찮아지게 만든다. 침묵하는 순간이 더 많은 면모도, 웃는 일이 거의 없는 얼굴도, 가끔은 심장을 아프게 찌르는 말도 모두 네이슨이 하는 행동이기에 다 좋았다.

가까이 가면 희미하게 풍기는 시원하고 차분한 향도 좋다. 가을이 오기 직전의 바람을 향수로 만든다면 꼭 그런 느낌이 날 것 같았다. 만약 네이슨이 오메가였다면 페로몬에선 저런 향이 났을까. 그랬다면 나는 네게 진즉 고백을 했으려나. 의미 없는 가정임에도 알렉스는 종종 그런 순간을 상상했다.

그러나 이 헛된 상상의 끝은 결국 현실로 돌아오며 끝이 난다. 네이슨은 베타가 아닌 형질에는 관심이 없다. 더군다나 네이슨은 언제나 여성 베타와 데이트를 했다. 지극히 평범한 성향이었다. 알파나 오메가는 몰라도 베타의 경우 꽤 높은 비율로 이성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알렉스 또한 고백을 할 마음은 없었다. 벌써 2년을 그렇게 보냈다. 오메가가 아닌 사람과 사귀는 건 알렉스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는 알파라면 응당 오메가를 만나는 게 맞다고 하였고, 베타나 알파를 만나는 알파를 끔찍이도 역겨워했다.

그 외에도 이유야 많았다. 고백한다면 차일 게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친구일 수 없을 테니까. 희박한 가능성에 도박을 하고 싶지 않다. 알렉스는 더는 삶에서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 더. 이뤄질 수 없는 이유를 굳이 하나 더하자면……

“네이트!”

해맑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우산 속으로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끝이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칼이 보였다. 주근깨가 사랑스럽게 박힌 뺨도 보였다. 그 바람에 알렉스는 우산 밖으로 밀려나듯 물러섰다.

“일찍 왔네? 너무 좋다. 마침 기다리고 있었어.”

“제시.”

네이슨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이름을 불렀다. 싱글거리며 웃던 제시가 알렉스를 보았다. 묘하게 굳은 미소를 띤 그녀가 알렉스를 알은척했다.

바로 이게 이유다. 네이슨에게는 애인이 있다. 그것도 거의 언제나.

“알렉스도 있었네.”

못 보기엔 제법 큰 키일 텐데, 퍽이나. 알렉스는 속으로 언짢음을 삼켰다.

끈질기게 네이슨을 따라다니며 고백을 했던 제시카 번디는 한 달 전 드디어 네이슨과 사귀게 되었다. 예로부터 네이슨의 옆에 있게 된 애인들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고백해 그를 쟁취했다.

만남은 대개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끝났다. 이유는 신기할 정도로 늘 같았다. 네이슨이 관심을 크게 주지 않는다는 게 원인이었다. 그러나 알렉스가 아는 네이슨은 무심하게 보이긴 해도 제 경계 안에 든 사람을 신경 쓰는 이였다.

“못 봤다니 놀랍다.”

알렉스는 그 말을 하고 네이슨의 눈치를 봤다. 네이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의 앞에서는 남들에게 말을 가려 하긴 했지만, 눈앞의 제시카 번디는 정말이지 짜증이 났다. 네이슨의 옆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절 질투하는 건진 몰라도 어떻게든 방해를 하거나 지금처럼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네이슨에게 제일 중요한 건 어차피 저쪽일 터였다.

“나 우산 안 가져왔는데, 같이 쓰면 안 돼?”

얄밉게도 제시는 알렉스의 말을 무시하고 네이슨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네이슨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묘한 정적을 깨고 알렉스는 우산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빗줄기가 그새 거세졌는지 아프게 머리칼을 적셨다. 여기서 우산을 꺼내면 거짓말을 한 걸 들킬 테니까, 그냥 맞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가슴 안쪽이 젖는 듯 기분이 먹먹해졌다.

“난 갈게. 둘이 같이 가.”

“고마워, 알렉스.”

양보를 해 주고 나서야 제시는 제대로 웃는 척을 했다. 네이슨은 가만히 알렉스를 응시했다. 묘한 기대감이 들었다. 그냥 있으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네이슨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을 뿐이다.

“잘 가.”

반이 다르니까 어차피 학교에 들어가면 갈라져야 한다고 쳐도 기분이 가라앉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알렉스는 웃었다. 여우처럼 조금 올라간 눈초리는 웃으면 외려 사납다는 평을 듣곤 했으니 분명 우스꽝스럽게 보이겠지만.

약하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힘없이 내려왔다. 미련이 남는 발을 억지로 움직였다.

“끝나고 같이 가.”

반쯤 돌렸던 몸을 다시 틀었다. 네이슨은 여전히 알렉스를 보고 있었다. 제게 한 말이었다.

“나?”

“오늘 훈련 없잖아.”

알고 있구나.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알렉스는 얼른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못 한 게임 같이해.”

용건을 끝마친 얼굴은 미련 없이 앞을 향했다. 심통이 난 얼굴로 알렉스를 노려보던 제시는 이내 네이슨을 이끌고 교문을 향해 가 버렸다.



오후부터 몸에 열이 올랐다. 잠에서 덜 깨어난 것처럼 나른하게 늘어지고 졸음이 밀려들더니, 수업이 끝날 때쯤엔 반대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고 훈련을 했던 때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기를 반복했다.

감기에 걸려 본 기억이 까마득했던지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아침부터 비를 많이 맞긴 했지.

열이 나는 것 외엔 머리가 아프다든가 목이 따가운 것 같은 증상은 없었다. 모처럼 네이슨의 집에 가는 기회를 놓치는 게 싫어 학교 의사에게 가서 감기약을 하나 받아 왔다. 혹시 모르니 진찰을 해 보자는 말을 거절하고 그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네이슨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자고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이건 친구로서 당연히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집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네이슨의 집에 있는 게 더 즐거우니까. 게다가 오늘같이 훈련이 없는 날에는 아버지가 관심조차 두지 않는 탓에 어차피 절 찾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파티에 가자는 누군가의 권유를 거절하고 교문으로 나왔다. 푸른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정문 근처에 섰다. 네이슨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냈다. 티나가 보낸 스냅챗이나 왓츠앱에 도착한 그룹 메시지 외에는 알람이 없었다.

비가 멎은 땅에서는 싱그러운 흙냄새가 올라왔다. 운동화 끝으로 땅을 툭툭 차 내며 알렉스는 핸드폰을 가만히 보았다. 의미 없이 스크린을 넘기길 반복하다 사진첩을 열었다. 사진을 원체 찍지 않는 탓에 안에 들어 있는 건 죄다 누군가에게 받은 단체 사진 외에는 없었다. 정확히는 네이슨과 같이 있는 사진이지만.

둘만 같이 찍은 사진은 없었다. 티나나 주드만 해도 네이슨을 데리고 찍은 사진이 넘쳐 나는데.

“뭐해?”

바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알렉스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는 네이슨이 보였다.

“어, 어?”

황급히 핸드폰을 숨겼다. 따지자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을 저장한 거라, 출처가 떳떳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네이슨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왔어? 늦게 끝났네?”

당황하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하나도 멋있지가 않다. 네이슨의 앞에만 서면 긴장이 심하게 되는 탓에, 원래도 정신이 없는데 오늘따라 특히 얼간이 같은 모습만 보여 주는 느낌이었다. 한심하다, 알렉스 연. 멋진 알파처럼 굴어야 할 마당에. 속으로 스스로를 구박했다. 빤히 올려다보는 시선을 피했다.

“제시카가 붙잡아서.”

네이슨은 그 말을 꺼내고는 먼저 걷기 시작했다. 제시카 번디의 이름이 나오자 알렉스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둘은 같은 반이기까지 했다.

“제시카 번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네이슨은 답을 대신했다. 이름을 듣자마자 속이 답답해졌다. 풀리지 않은 고민을 껴안고 있을 때처럼 어딘가 응어리진 느낌. 네이슨의 여자 친구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게 싫다.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알고 있다. 보통 친구의 여자 친구에게 이렇게 굴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은 알렉스의 의사를 배반하고 멋대로 열렸다.

“제시카가 왜?”

네이슨은 긴 다리를 움직여 벌써 저만치를 가고 있었다. 얼른 몇 발자국을 성큼 걸어 뒤를 따라잡았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꼭 대답할 필요는 없지. 괜히 입술이 달싹거렸다.

네이슨은 말수가 적다. 알렉스에게는 그래도 꼬박꼬박 대답하는 편이지만,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에는 침묵을 지켰다. 네이슨은 좋아하는 것보다 관심 없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누군가 가까이 닿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것도 싫어했다. 제시카 번디에게는 다르게 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땅을 보았다. 물기가 스민 흙이 척척했다. 발걸음이 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