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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ill meet you in  
1.  




늘 듣던 까마귀 울음 대신 창문을 세게 두드리는 빗물 소리가 아침을 알렸다. 오전 7시에 맞춘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이었다. 뻑뻑한 눈꺼풀을 문지르며 알렉스는 몸을 일으켰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까만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느슨히 흘러내렸다.

창밖을 보았다. 먼지가 뿌옇게 꼈던 창을 빗방울이 문지르고 내려갔다. 그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온통 잿빛이었다.

비 오네.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머릿속으로 생각이 솟구쳤다. 몇 시간은 내릴 듯한 기세니 아침 훈련은 없을 것이다. 유소년 축구팀 훈련 환경 관련 보도가 나간 이후로 코치는 비가 내리는 날에는 별다른 공지가 없어도 훈련이 없을 거라는 방침을 세워 놨다. 그러니 일찍 나갈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알렉스는 침대 밖으로 발을 디뎠다.

습기가 올라 찬 나무 바닥이 삐걱삐걱 울리는 소리를 냈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눅눅한 바닥이 발바닥에 들러붙었다. 지어진 지 50년은 되었을 2층짜리 플랏은 겨울엔 외풍을 막지 못해 추웠고 여름에는 불쾌한 나무 냄새가 꿉꿉하게 올라왔다. 알렉스 연은 배드버그가 나타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일 정도로 낡은 집에서 평생을 보냈다.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갔다. 거실에는 아버지가 먹다 남긴 보드카 병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코끝이 찡할 정도로 독한 투명한 액체가 거실 카페트를 까맣게 적신 채였다. 잠은 들어가서 잔 건지 소파 위에는 부스스한 뒤통수가 보이지 않았다.

뒷마당에 널어 둔 빨래는 들여다보지도 않았겠네. 몸을 숙여 보드카 병을 집은 뒤 알렉스는 그대로 뒷문으로 나갔다. 걸어 놓은 당시처럼 축 젖어 있는 옷들을 품에 안고, 병은 수거통에 넣어 둔 뒤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 시계가 7시를 가리켰다. 마음이 급해졌다. 어서 나가지 않으면 ‘그’ 시간에 지하철을 타지 못할지도 모른다.

세탁기에 빨래를 처박은 그는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10분도 되지 않아 샤워를 끝내곤 교복을 주워 입었다. 대충 머리를 말린 후 운동화를 꿰찼다. 그대로 우산을 낚아챈 뒤 열쇠를 꺼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열쇠를 두 번이나 떨어트렸다. 흙이 묻은 열쇠를 주워 문을 잠그곤 핸드폰을 보았다. 역까지 빠르게 달리면 간신히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다녀오겠습니다.”

배웅을 해 줄 사람도 없는 허공에 인사를 했다. 알렉스는 몸을 돌렸다. 서서히 다리를 움직였다. 그라운드 위를 뛸 때보다 더 힘주어 바닥을 박찼다. 우산이 거치적거리는 바람에 결국 알렉스는 곱게 접어 가방에 넣고 뛰었다.

비를 그대로 맞으며 지하철역으로 들어섰다. 빗물에 젖은 교복이 찝찝하게 살갗에 달라붙었다. 까맣게 젖어 둥글게 달라붙은 머리카락 끝으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런던 외곽 방향의 승강장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승강장의 가장 끝에 선 채 알렉스는 바닥을 보았다. 승강장과 열차 사이, 벌어진 간격을 조심하라는 노란 글자가 눈에 박혔다. 평생을 보아 온 문구였다.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고.

비가 오는 날은 생각이 많아진다.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벤치에 머무르는 제 처지나, 혼혈이라는 이유로 완전히 섞이지 못하는 어중간한 모습, 이 모든 게 세상과 그의 간격을 지적하는 것만 같았다. 괜히 기분이 나빠져 알렉스는 신발로 노란 글자를 가려 버렸다.

잠시 후 딱딱하고 건조한 안내음이 울렸다. 지하철이 들어오는 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곧 물기 섞인 바람이 불며 지하철이 멈췄다. 손바닥 한 뼘만큼 벌어진 새카만 틈을 보며 알렉스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평소보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의 제일 뒤 칸에는 그가 찾고 있는 금발의 소년이 보이지 않았다. 실망감이 밀려들었다. 비를 맞으면서 뛰어온 이유가 대번에 사라지는 기분에 실망감 어린 한숨이 새었다.

“뭐 해?”

목소리는 왼쪽에서 들렸다. 알렉스는 시선을 살짝 돌렸다.

“안 들어오고.”

지하철 문 왼편에 기댄 채 가방끈을 쥐고 있는 흰 손목이 보였다. 뼈마디가 예쁘게 도드라진 긴 손가락도 보였다. 곧게 뻗은 목덜미와 화사한 금발. 눈길을 끄는 쨍한 초록 눈.

아, 있다.

알렉스의 얼굴 위로 서서히 홍조가 맺혔다. 숨을 들이켜는 것도 잊은 채 알렉스는 눈을 깜빡였다. 차갑게 식어 가던 몸 전체로 피가 빠르게 돌았다. 순식간에 더워지는 기분에 알렉스는 그대로 굳었다.

지하철 문이 닫히기 직전에야 정신을 차린 그는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가방이 하마터면 문 사이에 낄 뻔했다. 젠장. 멋진 모습만 보여 줘도 모자랄 판에 아침부터 웃긴 꼴을 한 것 같아 목덜미가 더 붉어졌다.

“잘 잤어?”

어떻게든 무마하기 위해 알렉스는 인사를 했다. 표정의 변화가 크게 없는 흰 얼굴이 알렉스를 응시했다. 오늘도 예쁘다. 알렉스는 멍하니 소년을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응.”

되돌아오는 목소리가 건조했다. 그 뒤로 대화가 끊겼지만 알렉스는 개의치 않았다. 네이슨은 원래 이러니까.

어떤 것도 잡지 않고 선 채 알렉스는 가방끈을 움켜쥐다 놓기를 반복했다. 지하철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소란한 정적 사이로 알렉스는 제 심장 소리가 네이슨에게 들리면 어떡할지를 걱정했다.

몇 분 뒤 지하철이 멈췄다. 사람들이 그를 밀고 나간 탓에 알렉스는 네이슨에게 바짝 붙고 말았다. 황급히 손을 들어 네이슨의 머리 위를 짚었다. 그보다 눈높이가 낮은 네이슨이 말없이 시선을 살짝 올렸다. 길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이 아찔했다.

“미안.”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석고보다 하얀 네이슨의 목덜미에 자꾸 눈이 가는 걸 애써 돌렸다.

“어.”

무덤덤한 목소리는 기분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싫겠지. 알렉스는 입을 다물었다. 젖은 교복이 네이슨에게 닿는 게 미안해 그는 어떻게든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그러던 와중 누군가와 또다시 부딪혀 알렉스는 균형을 잃었다.

비틀거리는 그를 붙든 건 네이슨의 하얀 손이었다. 키에 비해 의외로 큼직한 손이 알렉스의 교복을 붙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여름의 나뭇잎 같은 초록 눈이 반듯하게 알렉스를 담았다. 그 눈에 비친 제 얼굴이 붉어진 티를 낼까 숨을 다시 참았다.

“조심해.”

그 말과 함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알렉스는 가까스로 균형을 다시 잡았다. 나비를 삼킨 것처럼 속 안이 요동을 쳤다. 이런 면이 좋았다.

예기치 못하게 다정한…… 네이슨 화이트.

알파인 알렉스 연이 2년간 짝사랑 중인 베타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