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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안 (2)





클라우드가 골몰하며 갸웃거리자 백작이 주름진 눈매를 접었다.

“이리 보니 무척 미인이구나. 하기야 네 어머니도 그랬지.”

“……어머니를 아세요?”

“그럼. 네 어머니가 너희 형제를 낳을 때 숲속 별장을 주자고 의견을 낸 사람이 난데.”

“…….”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이었지. 기묘한 아름다움이었어. 한눈에도 인간이 아니란 느낌이었다. 아버님께서 소년 시절에 만난 인연이라고 해.”

“……몰랐습니다.”

“그럴 만도. 일부러 알리지 않았으니까. 이종족은 혼혈과 혼혈을 잉태한 자 모두 배척한다지? 아버님은 그녀를 보내 주었어. 아이 때문에 종족 전체를 등지게 할 순 없으니까. 너희를 숨긴 것도 그런 맥락인 줄로 안다. ……섭섭했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고개를 저었다.

“이해합니다.”

“의젓하구나. 내 용건은 그게 끝이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렴.”

더 하고 싶은 말. 클라우드는 가장 궁금한 걸 물었다.

“만약 그분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저는 어디서 지내게 되는 건가요?”

“그건 일라이저와 얘기해 볼 문제야. 그자의 거처에서 지내고 싶다면 그렇게 해.”

“그게 아니라…… 바깥에 나가도 될까 해서요.”

클라우드는 성인이 다 되도록 머무는 저택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교육은 가정교사가 방문했고, 나가려 하면 하인이 막았고, 숲 뒤로 몰래 빠져나가자니 가는 길에 죽을 것 같았다. 무려 8개월 동안 지속되는 겨울. 그 탓에 숲은 대부분 눈으로 덮인 상태였다. 하물며 기나긴 겨울 중 석 달가량은 아예 해가 뜨지 않았다.

서펜트의 피가 강한 클라우드는 추위에 약했다. 극야 기간엔 체온 조절 기능이 망가지다시피 해 저택에서 마음 편히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반면 인간의 피가 짙은 클리프는 추위를 좀 많이 탈 뿐 클라우드처럼 기절할 지경은 아니었다.

“아…… 그렇군. 넌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지.”

전대 백작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아이들을 숨겼다. 어미였던 여자가 떠난 지 18년, 그를 증명할 남자마저 신의 품으로 돌아갔으니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백작은 긍정했다.

“좋을 대로 하렴. 원한다면 학교에 다녀도 좋다.”

“감사합니다.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전해 두마. 참, 이왕 이렇게 된 거 종종 나와 지내렴. 방을 만들어 두라고 하마, 클라우드.”

“……예, 형님.”

클라우드는 수줍게 뺨을 물들였다. 펠린은 속으로만 쓰게 웃었다. 저런 요요한 미모라니……. 가만히 있던 사람의 음심마저 자극하는 외모는 위험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생길이 훤하군. 하지만 그건 저 아이의 인생이니 자신은 그저 무탈하게 지내길 기도하는 수밖에.

“돌아갈 때 마차를 타고 가렴.”

클라우드의 얼굴이 밝게 개였다. 마침 비치는 햇살에 은빛 속눈썹이 반짝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그래. 그럼…… 나는 마저 일해야겠다.”

“네. 힘내세요.”

순진하고도 솔직한 인사. 저 아이가 입을 열수록 아연해진다. 힘내라는 말은 그간 백작이 들어 본 적 없는 종류의 화법이었다. 제게 주어진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일 뿐 응원 받을 일이 아니었으므로.

아름답고 영악하지 않은 귀족 도련님이라니. 클라우드가 일찌감치 존재를 인정받고 자랐다면 지금쯤 약혼 제안으로 골머리를 앓았을 터다. 혼혈 태생이라고 배척하는 건 이종족들이나 그렇지, 인간들 사이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배척하는 중점이 다르다고 할까.

어쨌거나 측은지심을 일으키는 대상인 것만은 확실해 백작은 너그러워졌다.

“클라우드.”

“네?”

“지미에게 향이 덜한 찻잎을 챙겨 주라 일러 놓겠다. 가져가렴. 그리고 간간이 나와 차를 마셔 주면 좋겠구나. 좋아하는 차가 생기면 내게도 알려 주고.”

“예!”

클라우드의 눈가에 이어 귀와 목덜미도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활짝 웃는 얼굴 주변으로 빛이 났다. 펠린은 난데없이 뛰는 가슴에 헛기침하며 손을 내저었다.

“가 보거라.”

이 나이 먹고 나도 참 주책이지.

“따라오세요, 도련님. 찻잎을 챙겨드리겠습니다.”

심술부렸던 하인이 클라우드를 불렀다. 클라우드는 고개를 주억이며 그의 등 뒤로 붙었다. 가는 길에 또래로 봄 직한 청년을 만나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들은 그럭저럭 친절했다. 상상 속에선 무심하거나 악의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었는데 형님도, 하인들도 이만하면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는 적어도 어머니에겐 좋은 분이셨나 보다.

이종족들의 혼혈 배척은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서펜트는 종족 특성상 새끼를 진득하게 키우는 종족이 아니라고 클리프가 알려 주었다. 클라우드는 내심 지금까지 후자에 무게중심을 두었더랬다. 형제가 오랫동안 홀로 남겨졌던 이유는 그런 특성 탓이 크리라고. 어미가 버린 아이를 아비도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라고.

한데 사랑하는 이에게 악영향을 미칠까 봐 일부러 떨어뜨린 거라니.

클라우드는 인간인 아버지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원하지 않는 아이라고 여겼기에 유언도 뜬금없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곧 죽을 듯 헐떡이면서 형제더러 가문의 의무는 지지 않아도 된다는 유언을 남겼다. 하다못해 ‘미안하다’라거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 줄 알았건만 그게 끝이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건 성씨가 전부였다. 세상이 모르는 존재였기에 뭐라고 붙인들 상관이나 있었을까 싶었다. 존재를 내보이지도 않았으면서 가문의 의무는 무슨.

그랬는데 도나우 퀸델 백작 사후 공개된 유언장에서 클라우드와 클리프 형제의 이름이 나왔다. 형제는 전 퀸델 백작의 핏줄로, 그의 개인 재산을 상속받았다. 자그마치 9천 7백만 갈렌이었다. 애석하게도 화폐를 만져 본 적 없는 클라우드는 그게 얼마만큼의 가치인지 정확히 몰랐다. 엄청난 재산이라고 추측할 따름이었다.

아무튼 동생에게 해 줄 이야기가 잔뜩 쌓였다. 학교도 가라고 해 주셨고. 클리프가 들으면 무척 기뻐할 터였다.

찻잎을 받고 정문으로 나가자 정말 집안의 마차가 서 있었다.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마부가 쾌활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크랙이라 합니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크랙.”

“날이 춥습니다. 어서 타시지요.”

마차를 처음 타 보는 클라우드를 위해 크랙이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클라우드는 반대편 창가에 엉거주춤 달라붙었다. 어색했다. 마차는 천천히 출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잔뜩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바로 폈다. 집안의 마차는 푹신하고 따뜻했다. 마법이 걸려 있는지 흔들림도 없었다.

뒤늦게 마차 창문으로 멀어지는 저택을 응시했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대저택이었다. 언젠가 가정교사가 해 주었던 설명이 떠올랐다. 왕국 내 모든 상단의 재산을 합쳐도 퀸델 가의 가주에겐 연못 수준일 거라고. 처지가 처지인지라 설명을 듣고도 크게 실감하지 못했었는데 조금은 알 듯했다.

마차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클라우드가 저택으로 향했던 방향과 달랐다. 마른 가지 사이로 저택이 보여서 길 찾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좀 허탈해졌다. 마차가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버지의 임종 때도, 장례식 때도, 오늘도 자신은 걸어서 나갔다. 본가에서 하인이 와 주었기에 망정이지, 혼자였다면 어딘가에 쓰러져 있었을지 몰랐다. 그런 주제에 외출하지 말라는 경고가 우스웠다. 바깥에 내보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저택 밖으로 나오실 땐 언제든 불러 주십쇼.”

“예, 깊은 호의에 감사합니다, 크랙.”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요. 신의 자비가 함께하시길.”

마차의 뒤꽁무니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숲으로 들어오니 그새 하늘이 어둑해졌다. 잎 하나 없이 빈 나뭇가지만 무성한데도 숲속은 기묘하게 컴컴한 구석이 있었다.

클라우드는 정문에 서서 평생 살아온 저택을 관찰했다. 본가의 대저택에 비하면 매우 작은 보금자리였다. 작아도 남자아이 둘에 출·퇴근직 하인 한 명이 머물기에는 딱 적당하다. 그전까지는 이렇다 할 감상을 가져 본 적도 없으면서 실없이 비교하는 작태가 스스로도 우스웠다. 그렇다고 그 거대한 본채가 부럽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친부며, 펠린이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선택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어머니는 해도 잘 뜨지 않는 겨울에 어떤 마음으로 숲을 등지고 가셨을까. 하다못해 추위가 가실 시기면 그러려니 했을 거다. 그녀는 추위에 얼어 죽을 위험마저 감수한 채 떠났다.

겨울이 한창 깊어지는 때. 밤의 이면이 서서히 드러날 무렵, 마녀 형제는 세상에 나왔다.

형제의 생일을 알려 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친부였다. 그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올 때마다 무언가를 알려 주었다.

그럼에도 어머니에 대한 건 예외였다. 기껏 관련된 말이라야 ‘어미를 많이 닮았구나’ 정도일까.

어린 마음에 거울 속 제 얼굴에서 어머니의 형상을 찾아보려 애썼을 때도 있었다. 부친과 닮은 구석이라곤 눈동자뿐이니 이목구비며 허연 색감은 어머니에게서 왔음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얼굴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초상화라도 보여 달라고 해 볼걸.

죽은 이는 말도 없이 재산을 뚝 떼 주었다. 평생 존재를 드러내지 않을 것처럼 해 놓고 장례식에 참석하게 했다. 정작 원하는 건 아무것도 주지 않고서.

처음부터 가진 게 없었으니 서러울 일은 아니다. 다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의문을 생각하자 가슴에 빈 구멍이 생긴 듯해 신경 쓰였다.

“벌써 갔다 왔어? 안 들어오고 뭐해.”

별안간 2층 창문이 열렸다. 클리프가 상체를 불쑥 내밀었다. 아버지 생각을 했다고 말하긴 싫어서 클라우드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생각 좀 했어. 넌 뭐하고 있었어?”

“숙제. 하킨 자작 오는 날이잖아.”

제임스 하킨 자작은 역사 선생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금요일에 와서 형제의 시간을 빼앗았다. 수업이랍시고 그가 하는 일이라곤 훈육을 빙자한 매질과 자기 자랑이었다. 그 짓을 대략 한 시간 반씩 나눠서 하다가 마칠 즈음 후다닥 진도를 빼고 산더미 같은 과제를 내주었다. 클라우드의 눈가에 한심한 기색이 어렸다.

“그러게 미리 하라니까.”

“검사도 안 하는 숙제를 미리 하는 사람은 너뿐일 걸.”

그러는 저도 늦게나마 꼬박꼬박하면서 웃기는 녀석이다. 클라우드는 이상한 억지에 혀를 찼다.

“숙제 말고 할 게 있단 말이야?”

“……말을 말자. 올라오기나 해.”